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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캠페인
김규항(출판인) 2000-04-11

“낙천 낙선운동. ‘선거혁명’이라는 수사가 통할 만큼 거대하고 일사불란하게 진행되고 있는 이 운동이 한동안 맥없이 살아온 한국인들에게 신명을 불어넣고 있다. 현재 시점에서 이 운동을 지지하는 일은 최소한의 정신건강만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물론 나 역시 이 운동을 지지하며 이 운동이 우리 사회에 분명한 유익을 남기길 기대한다. 그러나 나는 이 운동의 거대한 일사불란함 속에서 얼마간의 허전함을 느낀다. 허전함은 이 운동이 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그들, 몹쓸 정치인들을 뽑은 게 바로 우리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오늘 우리가 온갖 비난과 분노를 쏟아붓고 있는 그들은 다름아닌 우리 자신이다.

허전함은 이 운동을 주도하는 총선시민연대에서도 온다. 그 연대는 여러 입장과 견해를 초월한 위대한 연대인 동시에 최소한의 상식과 원칙을 생략한 허황한 연대이기도 하다. 가장 끔찍한 경우는 이른바 음대협(음란폭력성조장 매체대책 시민협의회) 관련인사들의 참여다. 나는 도덕을 기준으로 온 세상을 판단하는 그들의 인생관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최종 선택은 전적으로 유권자에게 남겨두는 낙천 낙선운동과, 공권력의 힘을 빌려 <거짓말>이라는 영화에 대한 관객(유권자들이기도 한)의 선택의 기회를 제거하려는 폭력이 그들의 머리통 속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정신분열적이다.

허전함은 또한 우리의 비굴함에서도 온다. 한국정치가 복구불능해 보일 만큼 썩었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사회 모든 부문 가운데 유독 정치만 썩었다거나 한국사회의 모든 불행이 정치에서 온다는 식의 주장은 우리의 비굴함을 드러낼 뿐이다. 그런 비굴함은 우리에게 진실을 주는 게 아니라 값싼 위안을 준다. 정확하게 말해서 한국정치는 한국사회에서 유일하게 썩은 부문이 아니라 그 썩음이 가장 도드라져보이는 부분일 뿐이다.

한국정치는 한국사회의 거울이며 한국 정치인은 한국 국민의 거울이다. 우리가 또다른 고문기술자를 뽑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여자와 아이를 때리는 일에 익숙하기 때문이며 우리가 또다른 도둑놈을 뽑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돈봉투를 교환하는 일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자성이 없다면 그들은 우리 앞에 불멸할 것이다. 이 운동이 선거혁명이 될지 선거혁명의 모양을 한 거대하고 일사불란한 카타르시스가 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해설: 한 신문의 청탁으로 썼던 글. 그 신문은 낙천 낙선운동을 지지하고 그 열기를 높이려는 의도로 여러 주에 걸친 캠페인 코너를 마련했고 나를 필자군에 넣었다. 내 글은 캠페인 초입에 실릴 거라 했고 그 시점은 낙천 낙선운동의 열기가 한껏 고조되고 “선거혁명이라는 수사가 통”할 무렵이었다.

캠페인이 중반을 넘어도 내 글은 실리지 않았다. 나는 조금씩 불편해졌다. 내 생각에 내 글은 그 안에 담긴 냉소가 그 운동의 대세를 거스르지 않고 그 운동에 유익을 줄 수 있을 만한 시점에 쓰여졌지만 시간이 지나 그 운동의 열기가 조금씩 누그러지고 그 운동을 훼방하려는 세력이 대열을 정비하는 시점이 되자 내 글 안에 담긴 냉소의 가치 또한 변하고 있었다.

캠페인이 거의 끝나갈 무렵(내 기억으로 총선연대 관계자들이 검찰에 출두할 무렵) 원고를 청탁했던 기자가 전화했다. 그는 몹시 미안해하며 내 글이 지나치게 냉소적이라는 게 자신들의 판단이라 했다. 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현재 시점에서 그 글을 썼다면 내가 성격이 삐뚤어진 사람이겠죠. 없던 일로 합시다.”

내 글에 담긴 냉소의 가치가 내 생각처럼 시점에 따라 상대적으로 변화한 건지 그 신문의 생각처럼 시점에 상관없이 지나치게 냉소적이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내 글이 그 캠페인에 포함되지 않았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인정해야 할 현실이라는 점(더욱이 그 신문이 이 나라 안에서 가장 진보적인 신문이라는 사실 앞에서)일 게다. 이제 그 현실이 내게 남긴 질문은 이렇다. 우리의 캠페인은 놈들의 캠페인과 어떻게 달라야 하며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