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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퀴어, 그 모순어법, 뉴퀴어영화 <소년은 울지 않는다> <리플리>

21세기 첫해 열린 제7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무엇보다도 의외의 선택은 단연 힐라리 스왱크의 여우주연상 수상일 것이다. 아카데미의 보수적인 성향에 비추어볼 때, <소년은 울지 않는다>(킴벌리 피어스)에서 남장여자를 연기한 배우의 수상 가능성은 거의 전무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최근 영국의 영화잡지인 <사이트 앤 사운드>는 이 영화와 <리플리>(앤서니 밍겔라), <존 말코비치 되기>(스파이크 존스)를 묶어서 뉴 퀴어영화(New Queer Cinema)와의 관련성 속에서 논평하기도 했다. 이런 최근의 흐름들은 마치 ‘퀴어’라는 새로운 정치학 또는 담론이 미국의 독립영화는 물론이고 주류영화에서조차 하나의 상업성 있는 소잿거리나 두드러진 경향이 된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레즈비언과 게이영화와 퀴어영화간의 구별도 분명하게 이해되지 못한 채 그 이름들이 소통되는 우리 현실 속에서 미국영화의 이런 흐름과 변화는 어떤 의미를 지니며 또 이 영화들은 어떤 맥락들 속에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일까?

퀴어, 정치적 용광로이자 문화적 전위

<소년은 울지 않는다>

퀴어영화는 무엇보다도 80년대의 에이즈 위기, 즉 신우익이 지배하는 레이건 시대에 에이즈를 이용하여 동성애운동에 가해졌던 극단적으로 반동적인 탄압에 대한 정치적 대응이라는 맥락 속에서 90년대 이후에 등장한 영화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루비 리치와 같은 영화이론가들이 이들에게 ‘뉴 퀴어’라 이름붙인 것은 아마도 바버라 해머나 데릭 저먼 등의 작업을 통해서 비록 고립된 형태로나마 그 이전부터 존재했던 퀴어영화의 전통을 인정하면서 이것과 구별짓기 위한 의도에서 일 것이다.

1960년대 이전까지 동성애자는 영화 속에서 주변적이고 버림받은 존재였으며, 세상이 비도덕적이고 퇴폐적인 곳임을 입증하기 위한 수단으로 동원되었다. 이처럼 동성애자들은 극히 부정적으로 재현되거나 간신히 그 정체성을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점멸하는 존재였다. 또한 ‘계집애 같은 사내’(sissy boy)나 ‘남자 같은 레즈비언’(mannish lesbian) 등, 틀에 박힌 정형화를 벗어나지 못했고 예외없이 반사회적인 폭력이나 범죄세계와 연루된 인물들로 묘사되었다. 60년대 이후가 돼서야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사랑’은 긍정적이고 진지한 시선을 통해서 스크린 위에 등장하게 되고, 대부분 고전적 스타일로 만들어진 그 영화들은 동성애자의 평등권과 동성애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를 이성애자들에게 요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을 하나의 통일적인 본질로 바라보는 정체성의 정치학과의 단절을 선언한 퀴어 정치학은 훨씬 더 당당하고 거침없는 태도로 이성애/동성애라는 이분법 자체를 거부했고 열려 있는 성 정체성과 유동적인 성적 지향을 급진적으로 추구한다. 따라서 애초부터 퀴어영화는 레즈비언과 게이영화와는 확연하게 틀린 미학이나 정치적 태도를 보여주게 된다. 특히 90년대 들어 <독약>(토드 헤인즈), <젊은 영혼의 반란>(아이작 줄리언), <졸도>(톰 칼린), <리빙 엔드>(그렉 아라키)와 같은 새로운 주체성을 협상하고 장르들을 병합하며 이미지의 정치학을 통해서 역사를 교정하는 뉴 퀴어영화들이 거센 기세로 등장한다. 루비 리치에 따르자면 이들은 패스티시나 아이러니와 같은 포스트모던한 기법들을 사용하고, 미니멀리즘과 과잉 사이를 오간다. 이전의 인간주의적 관점을 낡은 것으로 만들어버리면서 이 영화들은 성적 소수자들의 역사를 다시 쓰고 역동적이면서 분방한 비전들을 제시하며 무엇보다도 쾌락으로 가득 차 있다. 하여튼 퀴어영화는 그 안에서 섹슈얼리티, 젠더, 인종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퀴어적인 육체와 욕망, 환상과 로맨스가 출렁이며 번져나가는 정치적 용광로이자 문화적 전위였다. 그곳에서 협상과 순응은 들어설 자리가 없었고 전복과 일탈, 경계 깨뜨리기와 정전 뒤집기는 친숙한 전술과 수사학이 되었다. 따라서 퀴어영화는 20세기 말에 단순화와 스펙터클로만 치닫는 할리우드영화는 물론이고 매너리즘에 빠져 정체돼버린 유럽영화를 일신시킬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상상력과 자극적인 영감을 제공하는 가장 강력하고 매혹적인 영토로 자리잡게 된다.

왜 퀴어영화에 레즈비언은 없는가

<리플리>

그러나 곧 퀴어영화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퀴어영화 진영 내에 남성 대 여성, 백인 대 유색인종, 동성애자 대 더 하위의 성적 소수자, 엘리트주의 대 대중주의라는 갈등과 긴장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퀴어영화는 성적 욕망이라는 면에서 형상화되는데 그 욕망은 배타적으로 남성의 것이고 따라서 이성애 영화에서보다 퀴어영화에서 여성은 훨씬 더 주변화되고 있다”는 에이미 투뱅의 지적은 예리하고 정확한 것이었다. 장 콕토, 앤디 워홀, 파스빈더, 케네스 앵거 등을 그 뿌리로 삼는 퀴어영화는 철저하게 남성 예술가 중심의 계보도를 그려낸다. 더구나 그렉 아라키나 톰 칼린의 영화들은 페미니즘영화보다는 폭력을 통해 남성성을 정의하는 마틴 스콜세지나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들과 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고, 몇몇 퀴어영화들은 여성혐오증과 레즈비언혐오증을 드러내기까지 한다. 실제로 90년대 중반까지 게이의 욕망을 다루는 영화에 비해 레즈비언영화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백인 남성 게이 감독들이 주목받으면서 재정적 지원을 쉽게 얻을 수 있었던 반면 레즈비언 감독들은 성차별주의가 가져다준 다양한 장벽들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한편으로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를 거울반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앞서 지적되었듯이 퀴어영화 자체 내에 존재하는 긴장과 갈등들을 드러내 보이는 <소년은 울지 않는다>와 <리플리>는 흥미로운 한쌍을 이루고 있다. 우선 두 영화는 동성애와 폭력간의 질긴 상관성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고, 갖지 못한 것(남성성과 부유함)을 향한 주체의 욕망에 의해 추동되는 삶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나 두 영화 속에서 여전히 동성애혐오증이 횡행하는 현실과 동성애적 욕망이 숨쉬는 허구 세계간의 관계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조우하고 그 폭력이 갖는 정치성은 의미를 달리한다.

1960년의 <태양은 가득히>(르네 클레망)에 이어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원작을 두 번째로 영화화한 <리플리>는 원작 속에 내재하는 동성애적 이끌림과 등장인물의 게이다움(gayness)을 더 강화시켜서, 여전한 앤서니 밍겔라의 호사가적 취향을 반영하는 이국적인 풍광 속에다 그려넣는다. 재즈를 즐기고 자유분방하며 우아함과 퇴폐적인 세련미를 지닌 디키(주드 로)는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히치콕의 <열차의 이방인>의 안소니를 연상시킬 만큼 전형적인 게이 캐릭터를 선보이고 있고 그에 대한 리플리의 부러움과 집착은 점차 동성애적 뉘앙스를 띠어 간다. 더구나 리플리가 디키로 정체성을 전환한 다음에 이루어지는 피터와의 관계는 좀더 명백하게 동성애 성애를 암시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영화 속에서 게이다움과 동성에 대한 성적인 이끌림은 배신과 살인, 음모와 가공할 폭력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성적 소수자와 범죄자라는 두 아웃사이더 집단을 은밀하게 상호 연결하면서 동성애자를 주로 범죄자로 재현해온 주류영화의 상상력으로부터 이 영화가 자유롭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리플리와 디키간의 계급적 차이는 영화의 사회학적 배경 정도로 물러나고, 손쉽게 타인으로, 살인자로 변모하는 리플리는 오랫동안 동성애자의 인성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병리학적 설명을 재등장시킨다.

장르로 굳어져가는 퀴어영화 균열내기

반면에 1993년 실제로 일어난 ‘증오 범죄’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 <소년은 울지 않는다>는 그 사건에 대한 꼼꼼한 조사와 치열한 해석을 통해서 90년대 미국사회에 대한 예리하고 의미심장한 정치적 진단으로 나아간다. 이 영화는 타자에 대한 불관용, 여성혐오증과 레즈비언혐오증의 결합, 생물학적인 성과 사회문화적인 성정체성의 관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성들간의 사랑과 섹슈얼리티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이슈들을 복합적으로 엮어내면서 남성중심주의와 강제적인 이성애제도가 안고 있는 폭력성과 억압성을 포착해내기 때문이다. “어떻게 지금도 이런 일이…”라는 탄식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티나 브랜든 살해사건은 섹스와 성별이 어떻게 교차하는지, 하위문화가 정체성의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물론이고 성별의 규범에 대한 위반과 여성의 자율적 섹슈얼리티가 갖는 정치적 의미까지를 일거에 제기해준다. 일차적으로 티나 브랜든의 비극은 레즈비언 문화와 공동체가 부재하는 현실에서 비롯된다. ‘성전환을 위한 안내서’를 들고 다니며 남성이 되기를 꿈꾸고, 남자의 옷을 입고, 동성인 여성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브랜든은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성정체성을 무어라 이름지을 수 없었고 또 자신의 성적 욕망을 문화적으로 승인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브랜든을 모욕, 강간, 살해라는 세번의 죽음으로 이끄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남장여자라는 성별 규범의 위반과 여성들간의 섹슈얼리티를 치명적인 위협이자 도전으로 여기면서 손쉽게 폭력으로 치닫는 남성들의 권력이다.

따라서 <리플리>와 <소년은 울지 않는다>는 하나는 역설적인 방식으로, 다른 하나는 가장 절박한 방식으로, 90년대 들어 점차 게토가 주류가 되고 주변은 중심이 되며 전복적 상상력이 합법적 장르로 굳어져가는 퀴어영화의 모습을 비판한다. 여성혐오와 동성애혐오는 결코 종식되지 않았고 주변부와 하위의 주체들이 여전히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현실 속에서 퀴어영화의 정치적 역할과 대안으로서의 위치는 여전히 유효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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