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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영화를 가르쳐준 책 [3] - <영화 사전 이론과 비평>
심영섭(평론가) 2000-04-04

이론과 비평에 관한 ABC

수잔 헤이워드의 <영화 사전 이론과 비평>

다행인지 불행인지, 영화를 강의를 통해 배운 적은 없었다. 학부에선 생물학을 공부했고, 대학다닐 때 유일한 홍일점 야구선수로 뽀얀 흙먼지 뒤집어쓰고 놀기에 바빴으니, 영화에 관한한 무슨 교양강좌나 무슨 아카데미, 무슨 무슨 학교에조차 얼굴을 들이민 적이 없는 셈이다. 가끔 영화 강의를 하러 가는 곳에 이력서 제출이나 영화에 관한 경력을 물어보면, 그냥 ‘<씨네 21> 평론상을 수상했어요’라고 말한다. 그러면 오히려 그쪽에서 머쓱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하긴 자기가 무슨 쿠엔틴 타란티노라고.

실제로 인생의 많은 것들은 환자한테서 배웠다. 무엇이 정말 잔인한 것인지 무엇이 진짜 슬픈 것인지에 관해서 말이다. 영혼이 부서진 정신과 환자의 그림은 놀랍도록 영화의 한 장면과 닮아 있다. 까만 크레파스로 사람들이 둥글게 손을 맞잡고 있는 말기 정신분열증 환자의 그림에서 프에블로 인디언족의 벽화나 베르히만의 <제7의 봉인>의 한 장면을 본 날이면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럴땐 인간 속에 숨겨진 저 밑바닥의 근원적인 힘에 관해 느끼곤 한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마음이 언어 속에 갇혀 있지 않고 그림의 형태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대나무를 닮은 남자의 비어 있는 지혜나 나무의 수액 속에서 나온 술과 딱정벌레 옷을 입은 여자의 단단함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한참 뒤에 이 책 <영화 사전>을 만났다. 사전이라고는 하지만 한두줄의 단어 설명으로 빼곡한 그런 범생이 타입의 사전은 아니다. 영화이론과 비평에 관한 ABC격인 용어들이 풍부한 예와 사진으로 설명되어 있다. 구조주의와 정신분석이 뒤얽혀 페미니즘의 뿌리를 이루고, 다시 이것이 에이리언의 타락한 우주 자궁에 관한 비밀을 풀어내는 식이다. 저자 수잔 헤이워드는 프랑스영화가 전공인 영화학자로 현재 버밍엄대학의 교수로 있는 여성 영화학자이다. 그녀는 서문에서 이 책의 목적을 영화에 관한 주요 장르와 영화이론 및 영화운동들에 담긴 역사적 개관을 제공하려 했다고 밝히고 있다. 누벨 바그니 작가영화니 영국의 프리시네마운동 등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한 여성 영화학자답게 이 책의 페미니즘 이론은 아주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다. 페미니즘과 연관된 각종 용어. 예를 들면 주체성, 정신분석학, 성차, 지배 영화, 멜로드라마, 계급 등이 굵은 활자체로 표시되어 있어 책을 읽다가 이게 뭔가 싶으면 해당 단어들을 들춰보기만 하면 된다. 수잔 헤이워드의 해박한 통찰은 영화 전반에 관한 깊이있는 이해와 시선을 전달해준다. 여기에 이론의 토대가 되는 사례 영화들이 비교적 비디오가게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것도 큰 장점. <크라잉 게임>이니 <사선에서> <싸이코> 같은 대중적인 영화들로 이루어진 본문의 내용은 비록 한두줄의 단편적인 설명이라도 이런 영화를 이미 본 것 자체가 크게 도움이 된다. 앤 캐플란이 편집한 <정신분석학과 여성영화> 중 대부분의 논문들이 취급하는 영화가 <백주의 결투>니 <젊은 날의 링컨> 같은 20년 전 TV에서 본 영화들로 이루어진 것과는 대조적이다. 여기에 역자인 이영기씨의 포스트 식민주의나 질 들뢰즈의 영화 기호학 비판 등의 추가 항목도 최근 영화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최신의 정보를 주고 있다.

설사 영화이론의 영자도 모르더라도 이 책의 내용 자체를 이해하기 위한 과정에서 역으로 인문학 공부를 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기호학이나 구조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낯설다면 본문에 인용된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나 롤랑 바르트의 신화론을 읽고 다시 구조주의를 공부하는 식이다. 시간이 꽤 걸리겠지만 영화를 보는 눈을 얻는 데는 그만인 방법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그간 가지고 있었던 조각조각된 인문학적 지식을 영화라는 큰 틀 내에서 수렴하게 된 것이 가장 큰 득이었다. 아무튼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영화 용어들을 까만 글씨 절반에 흰 종이 하나로 보이지 않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번역자인 이영기 기자에게 술 한잔이라도 사드려야 할 판이다.

이 책을 무척 좋아하고 읽기도 많이 읽었다. 그러나 읽을수록 책에서 다루어진 내용 자체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영화를 보는 ‘눈’에 대한 어떤 통찰을 얻게 된다. 이런 비유를 들 수 있을까? 아마도 무성영화에서는 카메라가 움직인다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정지된 화면에 에너지를 부여하기 위해 배우들이 쉼없이 움직였어야 했을 것이란 것이다. 버스터 키튼이나 더글러스 페어뱅크스처럼.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영화라는 유한의 마법상자를 돌리는 사회적·심리적 축들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영화가 들려주는 또다른 소리를 듣는 것, 무성에서 유성으로 영화의 속을 들여다보는 새로운 ‘발견’의 길이 열리는 순간의 아찔함이기도 했다.

저자소개

수잔 헤이워드는 프랑스 영화전공인 영화학자로, 현재 버밍엄 대학 교수로 있다. 특히 저자는 여성영화학자인 저자는 페미니즘이란 확고한 입장을 가지고 프랑스 영화를 미국에 알리는 데 공헌하였다. 역자가 이미 인정하고 있듯이 수잔 헤이워드의 시각에는 소아병적 페미니즘을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균형감각이 돋보이는 영화학자이다. 남성 중심적 시각에서 놓칠 수 있는 관점들을 보완하면서도 정신분석학 같은 기존의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입장에서 바라본 많은 개념들을 페니미즘 입장에서 반론을 제공하고 있다. 저서로는 <프랑스 민족영화>(1993)가 있으며, <프랑스 영화, 텍스트와 컨텍스트>(1989)를 공동 편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