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마이클 만 [1]

하워드 혹스를 잇는 할리우드 장르영화의 달인, <히트> <인사이더>의 마이클 만 감독

칼날 위의 삶, 감독은 실수할 수 없다

마이클 만은 시시한 이야기를 재미있는 영화로 만드는 재능이 있다.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 니로가 나왔던 <히트>는 강력한 스타 카리스마에도 불구하고 내용은 사실 시시한 영화다. 수많은 영화에서 써먹었던 형사와 범죄자의 대결 구도에 전문가의 윤리의식 문제를 입힌 것일 뿐이지만, 또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 니로의 연기는 허장성세에 가까운 것인지만, 이 영화는 굉장한 흡인력이 있었다. 담배회사의 압력으로 시사프로그램 <60분>의 중견기자와 제보자가 겪었던 시련이라는 실화를 소재로 한 <인사이더>도 미국인들에게는 그리 새롭고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대기업의 이익과 개인의 도덕이 대립하는 이야기 구도에 굉장한 힘을 불어넣는다. 시시한 이야기에 웅장한 배경을 입히고 성격파 배우의 뛰어난 연기를 끌어내는 만은 현대 미국영화 감독의 계보에서 가장 뛰어난 세부묘사와 시각 표현력을 지닌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장르를 현대화한, 재능있는 미국 영화감독이 누리는 특권을 지닌 사람이다. 종종 만 감독은 지나친 표현의 과장법 때문에 허세를 부린다는 평단의 빈정거림을 사기도 하지만 지나침은 때로 보상받는 법이다. 대다수 미국영화는 대체로 너무 안전한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할리우드가 두손 든 완벽주의자

영국 영화월간지 <사이트 앤 사운드>의 닉 제임스는 <히트>의 첫 장면에서 알 파치노가 연기하는 빈센트 한나 형사의 모습이 바로 영화 촬영장에서 볼 수 있는 만의 모습이라고 했다. <인사이더>에서 만의 지휘를 받으며 알 파치노와 공연했던 러셀 크로는 사람들이 호기심에 차 “완벽주의자인 마이클 만과 함께 일했던 경험은 어땠나요?”라고 물으면 쌍소리로 대꾸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제작과 각본과 감독을 곧잘 겸하는 만은 자기 영화의 세계를 폐쇄적으로 다스리는 좀처럼 보기 드문 감독이다. <히트>의 빈센트 한나 형사가 “형사들은 실수할 수 없다”고 말한 것처럼, 만은 한치의 틈도 없어 오히려 질식할 것 같은 그런 세계를 영화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할리우드에 소문난 만의 완벽주의는 늘 등장인물의 성격을 통해 스크린에 관철된다. <히트>에서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하는 은행털이전문가 닉 매컬리는 15초 안에 버리고 떠날 수 없는 것은 옆에 두지 않는다는 신념의 소유자다. 닉의 집에는 변변한 가구 하나 없다. 닉은 파치노가 연기하는 빈센트 형사와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이 아닌 일에서 낙원을 찾는 사람이다. 끊임없이 불안해지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들의 삶은 칼끝 같은 날 위에 선 삶이다. 자신의 성격으로 세상을 제압할 것 같은 등장인물들의 세계에 만은 관객을 몰아넣는다. 언제 베일지 알 수 없지만 결코 지지 않으려는 인간들의 세상이며 화려한 대도시의 이면에 감춰진 악몽 같은 세상이다.

그를 키운 건 8할이 TV

만은 영화보다는 텔레비전을 통해 먼저 유명해졌다. 만은 1943년 시카고 태생이지만 영국의 런던영화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영화학교 재학중에 텔레비전 CF와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다. CF에서 잔뼈가 굵은 리들리 스콧, 알란 파커, 에이드리안 라인 등 영국 출신 감독이 할리우드로 건너와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 만은 TV시리즈인 <스타스키와 허치> <경찰 이야기>의 각본을 써 인정받은 뒤 79년 TV영화 <제리코 마일>로 데뷔했다. TV영화지만 해외에서는 극장판으로도 배급됐을 만큼 팽팽하고 지적인 긴장을 주는 감옥 스릴러였다. 만의 본격적인 극장영화 데뷔작 <도둑>은 제임스 칸이 금고털이전문가로 나온 범죄영화였는데 훗날 이 장르를 세련시킨 만의 재능을 볼 수 있다.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 탠저린 드림의 배경음악이 깔린 가운데 보여주는 초반의 금고털이 장면은 말보다는 설명할 수 없는 이미지로 관객을 내리누른다. 이 영화에서 제임스 칸이 연기하는 주인공은 말을 삼가는 것 같은 표정과 몸짓 연기로 고독한 현대 영웅의 이미지를 변주해냈다. 그리고 거의 추상화 수준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도시의 거리와 밤풍경은 주인공이 마음속에 감추고 있는 불타버릴 것 같은 초조한 격정을 시각적으로 옮겨내면서 범죄스릴러 영화에 현대적인 명상을 불어넣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플롯이 아니라 분위기로 관객의 기선을 제압하는 만의 스타일은 나치 병사가 루마니아의 한 성에서 원시 괴물과 만난다는 기발한 발상의 공포영화인 두 번째 작품 <킵>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만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스타일을 이야기에 끌어들여 전쟁영화와 공포영화의 관습에 두루 걸쳐 있으면서도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이상한 공포영화를 만들어냈다. 이야기는 들쭉날쭉하지만 회색과 초록색이 압도하는 화면 분위기를 통해 이 영화는 두 악의 세력, 나치와 괴물이 대립하는 이야기를 초현실적으로 끌고 간다. 독특한 영화였지만 미국 배급업자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배급할지 몰라 허둥댔고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으며 만은 다시 TV로 돌아갔다.

<마이애미 바이스> <맨 헌터>, 미국의 어두운 초상

그리고 TV매체를 통해 만의 진면목이 나타난다. 만이 제작하고 각본, 연출에도 관여한 <마이애미 바이스>와 <범죄 이야기>는 고금의 범죄영화 스타일을 인용하고 또 인용하는 자기 반영적인 스타일에다 MTV의 속도감을 입힌 박진감 넘치는 내용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 때부터 만은 TV매체의 전설적인 작가 감독으로 자리잡았다. 알란 파커, 리들리 스콧, 에이드리언 라인 등 CF를 영화에 접목한, 만과 비슷한 감각을 지닌 영국 감독들이 때로는 할리우드에서 레이건과 부시시대의 소비 이데올로기에 공헌하는 장식적이고 현시욕에 가득찬 속 빈 강정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면, 만은 지나치게 폭력묘사가 많다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보수적 매체인 TV에서 당대 미국의 어두운 초상을 거의 초현실적으로 보일 만큼 실험적인 화면에 담아냈다. TV에서 작업했는데도 만의 스타일은 영화적으로 보일 만큼 과감하고 치밀하고 혁신적인 것이었다.

<맨 헌터>는 TV에서 성공한 만이 영화로 금의환향한 작품이다. 토마스 해리스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맨 헌터>는 연쇄살인범을 좇는 FBI 요원의 이야기로 그 유명한 한니발 렉터라는 인물이 나온다. 하워드 혹스나 장 피에르 멜빌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이 영화에서 만은 주어진 일을 이뤄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색채, 세트, 카메라 움직임, 음악 등 영화의 시청각적 요소를 모두 동원해 악마 같은 주인공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어두운 본성을 그려낸다. 이 영화의 복잡한 카메라 움직임과 표현주의적인 구도와 참을 수 없을 만큼 폭력적인 분위기를 조장하는 음악은 등장인물의 내면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이 살아가는 악몽에 가까운 세계를 시청각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만의 연출은 강력하고 놀랍도록 정교한데, 폭력은 클라이맥스에 이르기 전까지 구체적으로 묘사되기보다는 그저 암시만 될 뿐이다. 그런데도 하다못해 벽이나 마루바닥 같은 소도구를 통해서도 관객은 형사가 느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를 온몸으로 전달받게 된다. <맨 헌터>로 만은 장르 영역 안에서 작업하지만 치밀하게 이미지를 짜는 능력으로 장르를 현대화할 수 있는 감독이란 신뢰감을 얻었다.

<라스트 모히칸>, 아방가르드에서 주류감독으로

<라스트 모히칸>은 3천만달러의 제작비를 들여 7천만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렸으며 TV 출신의 아방가르드 감독에서 대번에 주류 감독으로 만의 위치를 올려줬다. 제임스 페이모어 쿠포의 소설을 원작으로 36년에 만들어진 영화를 리메이크한 <라스트 모히칸>은 영웅주의, 비겁함, 충성심, 복수와 사랑 등 고리타분한 요소를 죽 심어놓은 대작이었으나, 이 영화에서도 단테 스피노티가 맡은 촬영의 아름다움은 눈부신 것이었다. 만은 단테 스피노티의 실력을 빌려 넓은 와이드 스크린에 19세기의 풍경화가인 토마스 콜, 알버트 비어스타트의 회화미에 맞먹을 만한 아름다움과 질감을 만들어냈다. <라스트 모히칸>은 <마이애미 바이스> 유형의 형사 범죄영화에서 벗어나 마이클 만이 다른 것을 해낼 수 있는 감독임을 보여줬지만 만은 다시 본래의 장기인 형사와 범죄자의 이야기를 다룬 <히트>로 돌아갔다. 만은 이 영화에서 돈 심슨과 제릭 브룩하이머가 구축한 액션영화의 유행 장르에 자기만의 변형을 가하는 강렬하고 인상적인 순간을 만들어내면서 전문가주의 윤리를 찬양한다. 날렵한 양복 차림의 닉 매컬리 일당이 은행을 털고 난 뒤 도시 한복판에서 벌이는 시가전은 과장된 수사법으로 액션영화를 장식하는 흔해 빠진 설정처럼 보이지만, 꼬마 소녀를 인질로 잡은 은행강도가 아빠처럼 다정하게 소녀에게 속삭이는 것과 같은 색다른 파멸과 모순의 순간을 잡아낸다. 만의 영화에서 영웅주의는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다. 늘 죽음을 곁에 두고 질주하면서 그것을 통해 고독한 삶을 초극하려는 인간상은, 하워드 혹스가 이미 오래 전에 완성했던 미국영화의 유구한 전통을 이어받으려는 만의 야심을 보여준다.

세밀한 인물화 그리느라 3시간 걸린다

<필름 코멘트>의 리처드 콤브스는 80분짜리 형사 대 강도의 이야기가 감독의 세밀한 인간탐구 때문에 세시간짜리로 늘어난 작품이라고 평했다. 특히 일중독자이자 완벽주의자인 빈센트 한나 형사와 은행털이 강도 닉 매컬리가 커피숍에서 마주하고 앉아 대화하는 장면은 두 인간의 대결 묘사에서 희열을 느끼는 만의 취향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만은 이 두 사람의 삶에서 숙명적으로 피할 수 없는 비극의 냄새를 암시적으로 화면에 배어나게 하기 위해 애를 쓴다. 이들의 삶에는 출구가 없다. 삶의 막다른 골목을 향해 달려가고 피로와 싸우면서 대결하는 순간의 긴장을 통해 삶을 진정으로 감각하는 자들의 삶은 덧없다. 단테 스피노테가 유려하게 잡아낸 LA의 풍광은 이 덧없는 삶의 유한함을 아이러니로 비유해낸다. 만의 영화는 다른 할리우드영화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막강한 시각적 묘사의 힘이 있다.

등장인물의 성격에 매혹당하고 그 매혹을 화면으로 옮겨 보여주려는 만의 충동은 <히트>와 <인사이더>에서 계속 작업한 배우 알 파치노에 대한 호의에서도 잘 나타난다. 만은 두편의 영화 연출이 파치노의 연기를 돋보이게 하는 데 중점을 뒀다고 말했다. “이것은 알 파치노의 영화다. 스크린을 응시하면 당신은 그 남자가 하는 대로 끌려가게 될 것”이라고 만은 말했다. <인사이더>는 시사프로그램 <60분>의 기자 로월 버그만 역의 알 파치노와 담배회사에서 해고당한 뒤 회사의 비리를 폭로하는 제프리 와이갠드 역의 러셀 크로가 나누는 일련의 대화 장면으로 대부분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두 사람은 호텔과 식당과 차와 야외를 오가며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전화로, 팩스로도 소통한다. 그러나 이 영화가 묘사한 두 남자의 관계는 <히트>의 빈센트 한나와 닉 매컬리의 관계와는 다르다. 버그만은 와이갠드를 설득해 담배회사가 니코틴의 중독성을 알고 있었다는 진상을 공개하게 하고 와이갠드에게 닥치는 인신공격과 살해위협으로부터 와이갠드를 지켜주려고 애쓴다. 버그만은 세상의 게임의 규칙을 알고 있지만, 정작 고독하게 버티며 시련을 맞는 이는 와이갠드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와이갠드는 버그만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하고 호텔 방에 틀어박혀 자살을 결심한다. 와이갠드가 절망에 차서 호텔 방의 벽을 쳐다볼 때 벽은 갑자기 와이갠드의 두딸이 놀고 있는 스크린으로 바뀐다. 두딸은 낙오자가 된 아버지를 조롱하듯한 시선을 보낸다. 바로 그때 멀리 떨어진 해변에서 강제 휴가를 보내고 있는 버그만이 열심히 휴대폰으로 와이갠드의 소재를 알아내려 애쓰고 있다. 마침내 와이갠드의 소재를 알아낸 버그만은 와이갠드와 통화하고 대화중에 문득 와이갠드가 자살을 결심했다는 것을 알아챈다. 버그만은 필사적으로 와이갠드의 마음을 돌리려하고 바로 그 순간에 버그만의 얼굴 너머 저편에는 넓은 바다의 풍경이 펼쳐져 있다. 성격과 처지가 다른 두 남자가 필사적으로 마음을 나누려하는 이 장면의 시각적 설득력은 논리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화려한 고독, 그 뒤의 그림자

만의 영화는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관계 맺기가 불가능한 인간들이 절망적으로 부여잡는 안간힘과 고독의 흔적 같은 것이 배어 있다. <히트>에서 해변에 위치한 그림처럼 아름다운 닉의 집이 닉에게 별다른 위안을 주지 못하듯이, 만 영화의 유려한 화면은 등장인물의 어두운 삶에 아무런 윤기도 더해주지 못한다. 만은 현대적이고 장식적인 수사법으로 인물을 꽁꽁 포위해놓고 거기에서 비극적인 장엄미를 얻어내는 감독이다. 장식적인 스타일과 지나친 기술숭배가 팽배한 현대 미국영화에서 뒤늦게 정상에 오른 이 완벽주의자 감독은 영화가 기교 이상의 무엇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