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베를린이 사랑한 감독들 [6] - 클로드 밀러

<마법사의 방> 감독 클로드 밀러

“애정이라는 마법이 세상을 풍요롭게 한다”

우연일지 몰라도, 올 베를린에서 프랑스 감독들은 그다지 환대받지 못했다. 파스빈더의 희곡을 영화화한 <타는 바위에 떨어지는 물>의 프랑수아 오종이 “평가절하됐다”는 것은, 독일 언론의 자백이기도 하다. <작은 도둑> <귀여운 반항아>의 클로드 밀러(58) 역시 신작 <마법사의 방>(La Chambre Des Magiciennes)으로 “새로움이 없다”는 매질만 당하다가, 국제예술영화평론가협회(FIPRESCI)상을 수상하는 데 그쳤다. <마법사의 방>은 그러나, 따뜻하고 아름다운 메시지와 디지털 카메라 촬영 등의 신기술이 결합한, 주목할 만한 영화다. 그간 캐릭터 중심의 영화를 만들어온 클로드 밀러 감독은, 이번에도 소외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그 영혼의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을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다.

인류학자 클레어는 논문을 준비하다 까닭 모를 구토와 설사, 어지럼증에 시달리고, 결국 입원 치료를 받기로 한다. 잠 안 올 때 양을 세는 대신 남자친구를 세는 하반신 불구의 젊은 처녀, 아기처럼 천진하고 여왕처럼 오만한 얼굴의 치매 노인과 병실을 나눠 쓰게 된 클레어는, 그들로 인해 날로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치매 할머니가 초능력자라는 소문을 듣고 겁에 질린 클레어는, 어느 날 자기 침대에 들어와 자고 있는 할머니를 발견하고는 경악한다. 클레어의 항의로 할머니가 침대에 묶이자, 그를 극진히 보살피던 할아버지는 클레어에게 “자비를 배우라”는 충고를 한다. 늦은 밤 배고프다고 아우성치는 할머니에게 음식을 먹이던 클레어는, 묘한 감정의 떨림을 경험한다. 그리고 할머니의 침대가 싸늘하게 식어버린 아침, 클레어도 병원 문을 나선다.

-제목이 <마법사의 방>이다. 당신이 믿는 마법이란 어떤 것인지.

=사람들간에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 서로를 알아간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런 관심과 애정이라는 마법이, 사람들을, 세상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고 믿고 있다.

-형식이 파격적이다. 도그마에 자극받은 것인가.

=개인적으로 라스 폰 트리에 영화를 좋아하지만, 도그마 영화들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그 성과에 대해 뭐라 말할 시점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젊은 영화인들을 격려하는 차원에서, 의도는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신한 아이디어를 거침없이 쏟아낼 수 있는 젊고 유능한 영화인들이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 포기해야 한다면, 불행한 일 아닌가. 상상력의 지평을 넓히는 데 도그마가 큰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다.

-원작 소설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다.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각색했나.

=<블라인드 폴드>라는 소설인데, 무척 감동적이다. 작품 전체를 영화로 옮기는 데는 무리가 따랐고, 그래서 택한 것이 주인공이 병원에 찾아가서 치료받는 과정을 그린 ‘3장’이다. 인물의 심리 상태가 가장 잘 드러난 대목이 바로 거기다. 그녀의 가족 이야기, 병을 얻게 된 사연 등은 각색 과정에서 필요에 의해 추가됐지만, 주로 원작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같은 병실을 쓰는 노파가 초능력자라는 암시도 있는데.

=엘레노아는 원작에 없던 인물이다. 하지만 주인공의 심적 변화를 부추길 중대한 요인이 필요했고,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골치 아픈 이웃’ 하나를 보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관계는 우연일 수도 있고 필연일 수도 있다. 나는 그들 사이에 벌어진 여러 가지 사건과 변화들이 초자연적인 능력이라기보다는 매우 자연스러운, 지극히 인간적인 힘에 의해 가능했다고 말하고 싶다. 특별한 것이라면 개개인이 처한 상황뿐이다.

-클레어는 캐릭터 변화 폭이 매우 크다. 배우에게 특별한 주문이라도.

=나는 클레어의 에너지에 이끌렸다. 때로 폭력으로 변이되는, 주체 못할 만큼의 엄청난 에너지, 아무리 상황이 열악해도 생존하고자 하는 열망 등이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그런 성격들을 배우 앤 브로세에게서 발견했다. 나는 자기만의 템포와 리듬이 있는 배우를 좋아한다. 브로세는 그런 의미에서 내가 매우 아끼는 배우다.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해 본 경험에 대해 말해달라. 앞으로의 전망은 어떤지.

=앞으로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하기 적합한 프로젝트라면, 다시 시도해 보고 싶다. 디지털 카메라는 저렴하고 작고 가볍다는 장점 외에도, 배우들에게서 최대한 자연스럽고 다양한 연기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음 프로젝트에선 두대의 카메라를 설치하고 자료화면도 다양하게 활용해 이번에 누린 자유로움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

-새로운 기기,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사용하는 작업이 배우들과의 관계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고백하건대 과거에는 영화의 기술적인 측면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느라 배우들과 교감할 시간이 충분치 않았고, 그 때문에 늘 불만족스러웠고 괴로웠다. 반면 이 영화는 90% 이상의 시간을 배우에게 공들였다. 그리고 카메라의 도움으로 3%의 시간만을 테크닉에 할애할 수 있었다. 이번 작업의 가장 큰 보람 중 하나가 바로 배우들과 함께 할 시간이 많았다는 점, 그리고 배우들과 한결 친밀해질 수 있었다는 거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유색인종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는 대목이 나온다. 반면 주인공의 직업은 인디언이나 아프리카 원주민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섭렵하는 인류학자인데.

=주인공의 아버지에게서 드러나는 인종차별주의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가족 구성원과 친구 등 주변 인물의 캐릭터를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인종 차별 문제는 미국뿐 아니라, 이즈음의 유럽사회에서 다시 제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간 유럽영화에서는 이런 문제 제기가 드물었지만, 오히려 터놓고 얘기하는 편이 자연스럽고 리얼하다고 느꼈다. 주인공이 반복해서 보는 다큐멘터리 필름의 내용은 15∼20년 전쯤에 어떤 감독이 촬영한 미국 인디언들의 전통 의식이다. 그 이미지가 너무 강렬하고 아름다워서, 영화 속에 넣기로 했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