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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이야기, <그린 마일>

“복수는 달콤하다.” <필름 코멘트>의 평론가 데이브 커가 말한 스티븐 킹 작품세계의 모토를 프랭크 다라본트만큼 충실히 실천한 감독도 드물다.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 앤디가 파렴치한 교도소장을 감쪽같이 속이고 탈옥하는 대목에서 느낄 수 있는 환희는 어렵게 자유를 얻은 기쁨만으로 설명하기 힘들다. 여배우 포스터 뒤에 뚫린 터널과 텅 빈 금고를 확인하는 교도소장의 허탈한 표정은 복수가 왜 달콤한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96년 6권 연작으로 발표된 스티븐 킹의 소설을 영화화한 <그린 마일>에서도 악당을 벌주는 대목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케 한다. 하지만 대공황기에 사형수 감옥 ‘그린 마일’에서 일어났다는 이번 이야기는 앤디의 탈옥처럼 희망적인 쪽은 아니다. 오히려, 나쁜 짓 한 사람 한둘 지옥에 보낸다고 원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비극적 정서를 깔고 있다. 똑같이 감옥을 배경으로 삼고도 <그린 마일>이 <쇼생크 탈출>과 달리 탈옥 영화가 아닌 건 그래서다.

영화가 시작되면 관객은 낭만적인 꿈처럼 느껴지는 뮤지컬의 한 장면을 보게 된다. 어빙 벌린의 노래 <Cheek to Cheek>에 맞춰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가 춤을 춘다. 1935년작 뮤지컬 <톱 햇>의 한 장면을 보는 노인들의 한결 같은 표정 사이에 복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오열하고 마는 할아버지가 눈에 띄는데 그가 바로 주인공 폴 에지콤이다. “난 지금 천국에 있네”라는 가사가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자신이 지옥에 있음을 깨닫는 에지콤이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하면 방광염 때문에 소변보면서 고통스러워하는 톰 행크스의 얼굴이 보인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과거 에지콤을 괴롭히던 방광염과 낭만적인 노래 사이에서 <그린 마일>은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문제의 인물인 거구의 흑인 사형수 존 코피는 처음에 괴물처럼 나타난다. 육중한 몸과 큰 키의 위압감은 공포 영화의 전주곡처럼 시작하지만 “어둠이 무섭다”는 육체에 어울리지 않는 언어로 인해 코믹하게 반전된다. 괴물에서 겁쟁이로 변한 코피는 얼마 뒤 신비한 능력을 보여준다. 처음엔 에지콤의 방광염을 고치고 다음엔 죽은 생쥐를 살리고 마침내 뇌종양에 걸린 교도소장의 아내한테서 암덩어리를 빨아들여 삼킨다. 그는 기적을 행함으로써 자신이 신의 증거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신은 왜 흑인 사형수를 자기 능력의 증거로 삼았는가? 에지콤은 코피의 백인 변호사를 만나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지독한 인종주의자인 변호사는 코피가 유죄임을 확신한다. ‘그는 흑인이다. 그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한가’라는 태도다. 전기의자에서 십자가를, 기적을 보이는 흑인 노예의 모습에서 구세주를 떠올리게 하면서 스티븐 킹은 미국판 성서를 다시 쓴 셈이다.

다라본트는 코피의 변호사로 게리 시니즈를 등장시켜 존 스타인벡 원작의 <오브 마이스 앤 맨>을 연상케 한다. 대공황기를 무대로 편견의 희생양을 그린 이 작품은 게리 시니즈가 연출한 영화로 코피의 죽음과 비슷한 슬픔이 배어 있다. 하지만 스티븐 킹은 존 스타인벡 같은 리얼리즘 작가가 아니며 다라본트는 시니즈처럼 하나의 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연출가가 아니다. 언제나 유머를 잊지 않는 다라본트는 묘기를 부리는 귀여운 생쥐 징글스와 악당이 들어가 마땅한 징벌방을 통해 철창과 족쇄로 채워진 사형수 감옥의 살벌한 풍경을 희노애락이 피어나는 무대로 만든다. 잔가지를 치면서도 거룩한 희생이라는 큰 줄기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 <그린 마일>에서 돋보이는 이야기체 영화의 매력인 것이다.

미국에서 이 영화는 제작진의 면모 때문에 대단한 기대를 모았지만 올 아카데미에는 달랑 작품상 후보에만 올랐다. 평단의 반응은 갈리는 편인데 “대목마다 말도 안 되는 3시간짜리 멜로드라마”라는 <뉴스워크>의 평과 “크리스마스 시즌에 이보다 잘 어울리는 메시지가 있을까”라는 <필름 코멘트>의 입장이 대조적이다. 비판자들의 요지는 선악 구분이 너무 단순하고 백인우월주의에 빠져 있다는 것. <그린 마일>이 좋은 편과 나쁜 편을 단번에 가르는 뻔한 대립구도로 이뤄져 있다는 지적은 사실이다. 특히 에지콤을 비롯한 백인 간수 대부분이 착하기 이를 데 없어서 “흑인의 죽음은 단지 백인 친구의 여린 감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라는 혐의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에지콤과 동료들이 하는 선행과 악인들의 행동은 치고 빠지는 박자가 정확해서 결코 극의 균형을 잃지 않는다. 사실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과 이야기꾼 다라본트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쪽이다. 극의 절정을 향하는 대목에서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가 춤추는 뮤지컬 장면이 다시 등장한다. 형집행을 앞둔 코피의 마지막 소원이 바로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지옥의 문턱에서 노래가 들린다. “난 지금 천국에 있네”라는 노래가.

<그린 마일>의 배우들

<LA컨피덴셜>의 비열한 경찰

데이비드 모스

제임스 크롬웰

톰 행크스는 94년 아카데미 후보자 만찬회에서 다라본트를 만났다. 둘은 <포레스트 검프>와 <쇼생크 탈출>로 후보자에 지명된 사람들. 톰 행크스는 다라본트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고 <그린 마일>의 배역을 흥쾌히 받아들였다. 스티븐 킹과 다라본트 두 사람은 에지콤으로 톰 행크스를 떠올렸던 차다. 에지콤의 착한 동료들 가운데 브루트 역은 <더 록>의 데이비드 모스다. <더 록>에서 에드 해리스의 충성스런 부관으로 나와 뚜렷한 인상을 남긴 데이비드 모스는 스티븐 킹 원작의 TV시리즈 <랭골리어스>에 출연했던 경력도 있다. 존 코피 역을 맡은 거구의 흑인은 마이클 클라크 던컨이다. <아마겟돈>에서 혜성폭파 임무를 수행하는 팀의 일원 베어로 출연한 그는 경호요원 일을 하다 제작자의 눈에 띄어 연기를 하게 됐다.

교도소장으로 출연한 제임스 크롬웰은 매우 낯익은 배우다. <베이브>에서는 순박한 시골농부로 나왔고 <LA컨피덴셜>에서는 비열하고 냉혹한 경찰로 등장했다. 그는 <베이브>로 95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경력을 갖고 있다. 생쥐를 기르는 사형수 델 역은 연극과 TV에서 경력을 쌓은 마이클 제터. <트루 크라임> <피셔킹> <마우스 헌트> 등에서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다. 강자 앞에 약하고 약자 앞에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간수 퍼시로 나오는 덕 허치슨은 <타임 투 킬> <베트맨 앤 로빈> 등에 출연했다. <X파일>이나 <밀레니엄> 같은 TV시리즈에서도 주로 악역을 전문으로 맡아온 배우. 살인마 와일드 빌로 나온 샘 록웰은 톰 디실로의 <달빛 상자>, 폴 슈레이더의 <라이트 슬리퍼> 등 인디 영화에 자주 얼굴을 비춘 인물이다. 착하고 젊은 간수 딘으로 나온 배리 페퍼는 톰 행크스와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함께 출연했던 배우. 스필버그가 적극 추천해 <그린 마일>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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