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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석의 씨네콜라주] 슬리피 헬로

“덩크슛! 한번 할 수 있다면, 내 평생 단 한번만이라도….” 조니는 한강 둔치를 거닐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마이클 조던의 팬이었던 조니. 하지만 그는 선천적인 장애로 농구를 할 수 없는 몸이다. 그래서 틈만 나면 둔치를 찾아, 농구하는 아이들을 구경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다. 그런데 오늘은 저녁 노을이 물들기 전부터 아이들이 하나둘 코트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흐린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도 땀을 흘리며 농구하는 아이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안녀∼엉. 오래간만에 나왔네.”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조니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음산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수요일에만 이곳을 찾아오는 웬즈데이라는 아가씨다. “오늘은 미장원 쉬나 보지?” 조니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심장이 더 두근거렸다. “네, 월차냈거든요.” “말 놓으라니까 그러네. 근데 수석 아티스트가 빠지면 미장원 영업이 되나?” 조니는 앞으로 바짝 다가오는 그녀를 피해 엉겁결에 손을 내밀었다. 그러다 잘못하여 그녀의 뺨을 자신의 가위손으로 베고 말았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니의 팔뚝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가위날 위에 묻은 피를 혀로 날름날름 핥아먹었다. “조오∼니, 목이 마른가 보지?”

조니는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고 했지만, 웬즈데이는 그를 주저앉히며 농구장쪽을 가리켰다. “벌써 가면 어떡해. 요즘 여기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는데.” 어느덧 해는 저물어 강변에는 가로등이 켜지고 있었다. “재미라고요? 농구하는 애들도 없는데.” 그때 웬즈데이의 휴대폰이 울렸다. 웬즈데이는 수화기를 들며 말했다. “잠깐 기다려. 올 거야.… 여보세요? 네, 다 도착했다고요? 그럼요. 참가만 해도 MP3 플레이어는 공짜랍니다.” 그리고 곧 농구복을 입은 학생들이 몰려와 코트에서 몸을 풀기 시작했다. 웬즈데이가 말을 이었다. “요즘 여기에 데니스 호스맨이라는 괴물 농구 선수가 나타나 아이들을 상대로 게임을 벌인다더군. 그런데 그 실력이 엄청나서, 1 대 5로 싸워도 한골도 먹지 않는다는 거야. 대단하지? 호호, 그리고 경기가 끝나면 말이야. 진 팀 선수들을 모두 강에 빠뜨려 죽여버린다는 거야.” 오호라. 그래서, 아이들이 일찍 집으로 돌아갔던 거군. “앗, 그러면 저 학생들은 뭐죠? 혹시 당신이?” 조니가 놀라 벌떡 일어나는 순간, 물안개를 뚫고 호스맨이 나타났다. 그 흉측한 얼굴에 오금에 저려 조니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곧이어 게임이 시작되었다. 호스맨은 과연 대단했다. 호랑이처럼 달려들어 공을 빼앗곤 독수리처럼 날아올라 덩크슛을 꽂았다. 이 경기에 반칙은 없다. 어떤 수를 쓰든 공을 빼앗아 상대 골에 넣기만 하면 되는 거다. 설사 프로 팀이라도 이 기가 막힌 살인 농구에는 맥을 추지 못했을 것이다. 전반전이 끝나자, 이미 선수 모두 부상을 입어 걸을 수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 조니는 그제야 생각이 났다. 공포의 호스맨! 독일 용병으로 NBA에서 활약했지만, 거칠고 과격한 플레이로 쫓겨난 뒤 한국 리그에 진출. 이곳에서도 경기중 선수와 심판들을 폭행한 뒤 선수 자격 상실, 결국엔 한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비운의 농구 선수다.

“그래, 하하하. 한골만 넣으란 말야. 그럼 너희들의 목숨은 살려줄 테니.” 코트에 쓰러져 뒹굴고 있는 아이들에게 호스맨은 소리쳤다. 그때였다. “기다려. 교체 선수다.” 왜 그랬을까? 조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로 돌진해 갔다. 웬즈데이도 화들짝 놀라 원래부터 하얗던 얼굴이 반투명이 돼버렸다. 그래, 싸우자.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한골만 넣자. 조니는 사력을 다해 호스맨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공을 빼앗아 골대 위로 솟구쳤다. 거짓말처럼 날아 힘차게 덩크슛을 꽂았다. 농구공이 터질까봐 손도 대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아픈 추억이 되살아났다. 그래, 해냈다. 공도 터지지 않았다. 아직 그때까지, 조니는 자신이 새로운 전설을 만들어냈음을 알지 못했다. 그때부터 목이 잘린 호스맨이 “내 머리 내놔라. 내 머리 내놔라”하며 아이들의 농구공을 뺏앗아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등장인물

가위손 조니: ‘비듬 사순’ 미용실의 수석 헤어아티스트. 농구광이지만 신체 장애로 공을 쥐지 못한다.

웬즈데이: 괴상한 취미를 지닌 <아담스 패밀리>의 장녀.

데니스 호스맨: 독일 출신의 용병 프로 농구 선수. 과격한 플레이로 선수 자격을 박탈당한 뒤, 전설의 인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