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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가족, 벌레먹은 꿈, <아메리칸 뷰티>

“난 마흔두살인데, 일년 안에 죽을 것이다. 물론 난 아직 그걸 모르고 있다”

이게 무슨 소린가. 불치병에 걸린 걸까. 사고를 당하나. 자살한다는 건가. 죽는다 해도 이 말은 누가 언제 하고 있는 걸까. <아메리칸 뷰티>는 첫 내레이션에서부터 시점(時點)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를 슬쩍 지우며 시작한다. 목소리의 주인공 버냄은 중년의 미국 화이트 칼라다. 대도시 근교의 멀쩡한 집에서 아주 정상적으로 살고 있다. 아니, 말하는 걸 봐서는 정상적이지 않은 것 같다. 외양은 매끈하기 짝이 없다. 집도 근사하고, 미인 아내는 부동산 중개업을 열심히 하고 있으며, 고등학교 다니는 딸도 몹시 예쁘다. 그런데도 내레이션은 이렇게 이어진다. “난 이미 죽어있는지도 모른다. 내 아내와 딸은 내가 엄청난 패배자라고 생각한다.”

<아메리칸 뷰티>라는 제목의 뜻은 ‘①가장 고급스런 장미의 이름, ②금발에 파란 눈, 전형적인 미국 미인, ③일상에서 느끼는 소박한 아름다움’이라고 풀이 되어 있다. 이 세 가지는 영화에 다 나온다. 하지만, 짐작하다시피, <아메리칸 뷰티>는 이 셋 중 결국 어느 것도 얻지 못하고 죽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소재가 새로운 건 아니다. <블루 벨벳>의 악마적 충동을 감춘 데니스 호퍼나 <아이스 스톰>의 무기력하게 자멸해가는 케빈 클라인도 조건은 비슷했다. 이 족속들이 주는 냉혹한 교훈은 현대인이 갖는 마지막 희망, 그저 평범한 소시민으로 밋밋하지만 안정되게 살겠다는 소박한 소망마저 피안의 꿈임을 굳이 알려준다는 데 있다.

비슷한 설정이지만 <아메리칸 뷰티>는 앞선 두 영화와는 달리 유머러스하다. 버냄이라는 남자는 불쌍하고도 웃긴다. 아침 샤워실에서의 수음은 그의 일과다. 버냄은 말한다. “이 때가 하루 중 최고의 순간이다. 여기서부터 내리막길이다.” 가족에게 구박당하고 직장에선 언제 잘릴지 모르는 신세. 아내 캐롤린도 별로 행복해보이진 않는다. 백인 중산층 여성의 텅 빈 사교적 미소는 맘껏 구사하지만, 팔아야 할 집을 팔지 못하면 자기 뺨을 때리며 울 정도로 성공과 돈벌이에 강박돼있다. 제인은 부모 특히 아버지를 경멸하고, 자기혐오에 빠진 10대 소녀다. “아빠를 죽였으면 좋겠어.” 버냄은 정말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버냄의 동굴 같은 삶에 빛이 되는 존재는 놀랍게도 제인의 친구다. 버냄은 학교 치어걸 단원인 제인에 끌려가서 어이없게 제인의 친구 안젤라에게 반해 정신 못 차린다. 전라의 안젤라가 붉은 장미꽃잎에 파묻히는 환상에 빠진 뒤로, 그녀는 버냄의 희망이 됐다. 그녀로 인해 버냄은 보디빌딩과 조깅을 시작하고 핑크 플로이드를 듣는다. 또 한 사람 있는데, 이번엔 딸의 남자친구다. 옆집 사는 리키는 고등학생이지만 아름다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며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다. 가부장적이고 파시스트적인 해병대 대령 출신의 아버지,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황폐한 어머니와 함께 살며 육신은 구금돼 있지만 영혼은 비할 데 없이 자유로운 리키는 90년대로 길을 잘못 접어든 60년대 히피나 뉴에이지세대처럼 보인다. 그는 버냄과 제인에게 사랑과 자유의 묘약을 선사한다. 이건 정말 마약이다.

실제로도 리키는 버냄에게 대마초를 공급하지만, 두부녀에게 각각 다른 방식으로 살아 있음의 동물적 환희를 체험케 한다. 묘하게도 그는 죽음과 허무와 너무 친근하다. 비디오 촬영이 유일한 취미인 리키는 새의 시신에서 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끼고, 바람타는 빈 봉투의 부유에서 전존재적 전율을 느낀다. 그의 따뜻한 초월성이 차갑게 살아 있는 부녀의 내면을 흔든다. 버냄은 직장을 내던지고 매혹적인 안젤라에 대한 사랑을 당당하게 키우며 매력적인 남성으로 눈부시게 변신한다. 그러나 리키에게 다가설수록 버냄의 육신의 삶은 위태로워진다. 신기한 일이다. 죽음과 다름없던 삶을 벗어나자 삶보다 더욱 매혹적인 죽음이 다가선 것이다. 빛나던 장미의 윤무는 흘러내리는 핏빛과 너무 닮았다.

스타 연극연출가였던 샘 멘데스 감독은 이 수일한 데뷔작에서 유머와 비극, 관능과 영성(靈性), 일상성과 초월성, 죽음과 삶의 경계를 시적인 운율로 넘나드는데도 구성은 빈틈이 없다. 캐릭터와 이미지, 사건들에 이중성을 담아 이 경계 주위에서 양쪽으로 열어놓고 펼치는 솜씨는 첫 연출작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 연기 컴퓨터 케빈 스페이시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갑자기 늙어보이는 아네트 베닝은 기왕의 우아함을 버리고 이물스런 연기를 능청맞게 해낸다. 드라마를 잃어가는 할리우드에서 <아메리칸 뷰티>는 눈부신 진경드라마다. 미국 개봉 당시에 언론들은 최상급 찬사로 축사를 보냈으며, 500개 이하의 극장에서 개봉했는데도 주간 흥행 5위에 오를 정도로 관객의 축복도 받았다. 골든 글로브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의 주요 세부문을 이미 독식했으며, 아카데미에서도 주요 8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감독 샘 멘데스

연극계에선 이미 스타

각본을 쓴 앨런 볼과 감독 샘 멘데스가 모두 이 영화로 데뷔했다는 건 의아한 일인데, 샘 멘데스는 연극계에서 명성을 떨친 인물이라 수긍이 간다. 방송작가 출신의 앨런 볼이 쓴 <아메리칸 뷰티>의 뛰어난 시나리오를 놀랍게도 대부분의 할리우드가 거절했는데, 단 한 사람 스티븐 스필버그만이 샘 멘데스의 출세작 <카바레>를 관람한 뒤 멘데스 감독을 열렬히 추천해 <아메리칸 뷰티>의 제작이 성사됐다. 스필버그는 처음엔 주변에서 직접 연출하라는 제의를 받았으나 “이건 내가 잘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샘 멘데스가 적역이다”라고 고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신의 영화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 가운데 하나가 됐다.

영국 태생인 샘 멘데스는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1987년 졸업 뒤 치체스터 페스티벌 극장에 들어갔다. 얼마 있지 않아 <체리 과수원>을 연출해 영국평론가협회에서 최고신인상을 받았고, <오델로>로는 최우수연출상을 받으면서 곧바로 스타 연출가 대열에 들어섰다. 스필버그를 매혹시킨 <카바레>는 런던과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됐고 4개 부문을 토니상 등 수많은 상을 멘데스에게 안겨준 출세작. 브로드웨이에선 니콜 키드먼이 주연한 화제의 연극 <파란방>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아메리칸 뷰티>에서 두드러진 공간을 시각적으로 활용하는 솜씨는 이미 연극연출에서 일가견을 인정받았다. 이젠 어떤 할리우드 메이저도 군침흘릴 존재가 됐지만 멘데스 자신은 “아직 영화에 매달릴 생각은 없으며 당분간은 다시 연극을 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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