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2000년 애니메이션 제1탄, <고인돌>
황혜림 2000-02-22

오돌또기+박수동=비디오 애니메이션 <고인돌>, 짖궂은 성적농담

에로스 동산에 방울소리 들린다

새 천년 2월, 애니메이션 은하계 에로스 행성에서 한국 비디오시장을 향해 두번째 운석이 날아왔다. 휴대폰은 커녕 편지 쓸 종이도 없는, 컴퓨터는 고사하고 기계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원시사회의 성 풍속도를 담아낸 비디오용 애니메이션(OVA) <고인돌>. 보이면 난리가 나는 신체 특정 부위를 아슬아슬한 의상으로 슬쩍 가린 원시 남녀들을 내세운 이 에로스의 운석은, <누들누드>1탄과 2탄으로 패인 성적 판타지의 구덩이를 또 한뼘 넓힐 요량이다.

박수동 화백의 18년 연재물 <고인돌>

<고인돌>은 서울애니메이션과 오돌또기가 공동으로 기획하고 오돌또기에서 실제작을 담당한 성인용 비디오 애니메이션이다. 고인돌? 제목을 되새겨보고 ‘아하’하는 감탄사를 흘린다면 20대 후반 이상일 가능성 90%. <고인돌>은 74년부터 <선데이 서울>에 연재된 박수동 화백의 만화가 원작이다. 정력 센 미스터 고를 필두로 미스터 인, 돌 등 머리속이 온통 섹스 생각뿐인 엉뚱하고 어리숙한 원시남들과, 아닌 척하지만 실은 성적 욕구와 호기심 왕성한 미스 오, 육, 팔 등 원시녀들이 만화의 주인공들. 이들이 펼치는 야하고 발랄한 성 풍속도는 18년간 830여회 연재라는 기록을 세우며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석기시대 원시인들의 공동체 생활에 당시 한국사회에 대한 풍자와 억압된 성애의 해학을 솜씨있게 버무려낸 선화(線畵)는, 문학평론가 김현의 평을 빌리자면 “남성 위주의 한국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미와 성의 해방에 대한 긍정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할 만한 도발이기도 했다. 성 담론 자체가 금기시된 한국사회에 외설 시비와 함께 등장한 <고인돌>은 건강한 에로티시즘의 표현으로 한국 만화의 새 지평을 연 작품이란 평가를 받았다.

미스터 고, 인, 돌과 미스 오, 육, 팔의 성판타지

태어난 지 스물여섯해, 2000년대를 여는 첫 국산 창작애니메이션으로 새롭게 돌아온 <고인돌>은 물론 그러한 원작과 닮아 있다. 65분짜리 비디오를 채운 11개 에피소드는 원작의 에피소드들을 각색, 합성한 것으로 역시 성을 둘러싼 유희와 해학이 골조를 이룬다. 틈만 나면 서로 치근거리고, 짝짓기 탐색전을 벌이는 여섯 남녀의 상열지사에 특히 초점이 맞춰진 만큼, 좀더 노골적인 에로스의 극으로 밀어붙인 판타지가 주된 웃음원.

데모를 겸해 가장 먼저 제작된 ‘묘기 대행진’은 원작 만화의 ‘묘기’ ‘쌍방울’이란 에피소드에서 끌어온 상상력과 애니메이션 특유의 동적인 활기가 잘 맞아떨어진 작품이다. 나른한 어느 오후, 미스터들은 묘기를 보여주겠다며 공기놀이를 하던 미스들에게 접근한다. 먼저 팬티에서 담배를 꺼내 피더니 연기를 참았다가 귀로 내뿜는 미스터 인의 묘기. 하지만 미스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아니나다를까, 반격에 나선 미스 팔은 같은 담배를 오럴섹스를 하듯 빨더니 아랫도리에서 연기를 내뿜는 게 아닌가? 이에 질세라 조그만 둔덕에 올라선 미스터 돌은 죽어라 제자리 달리기를 한다. 황당해서 화를 내려는 미스들에게 갑자기 방울 소리, 아랫도리에서 부딪치는 쌍방울 소리가 들려온다. 점입가경이라, 미스 육은 다리 사이를 이용해 미스 팔이 던진 호두알을 공중 캐치하더니 껍질을 부숴 미스터들에게 내놓는다. 결정타는 미스터 고의 “약동하는 젊음”. 둔덕 위로 엎드린 미스터 고는 미스 오를 훔쳐보더니 불끈 발기된 성기로 몸을 지탱하는 묘기를 보인다. 음흉한 시선을 피하려는 미스 오의 움직임에 따라 성기를 축으로 빙빙 돌던 미스터 고가 가속도 때문에 구름 위로 날아가는 장면은 애니메이션다운 에로틱 판타지를 보여준다.

‘성인용’이란 딱지가 붙은 만큼, 야한 걸로 치자면 이 정도는 시작에 불과하다. 인간 보트 미스터들과 그 위에 타고 바다에 나선 미스들, 발기된 성기를 ‘안전벨트’ 삼아 여성 상위의 체위로 밀착된 두 남녀의 파도타기는 성교를 방불케 하고(‘안전벨트2-보트놀이’), 미스터 고가 나간 사이 미스 오를 넘보려던 인과 돌이 문구멍에 맞는 열쇠를 찾지 못해 포기하는데 알고 보면 고의 성기가 열쇠라든지(‘구멍’), <고인돌>은 성욕과 성애의 판타지에 바탕한 웃음투성이다.

옛 성농담에 덧입혀진 현대적인 감각

원작이 오래돼서 농담이 좀 예스럽지 않을까 우려하던 제작진은 현대적인 감각을 덧입히기 위해 패러디를 취했다. 미스 오 강간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는 ‘수사반장’의 경우, 마을 판관격으로 종종 나오는 영감님이 출현할 때는 <007>을 연상시키는 총소리, 음악 등이 배경에 깔린다. 미스 오를 덮친 범인을 찾기 위해 저울로 진범을 가릴 때는 옛날 TV드라마 <수사반장>을 연상시키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어디 그뿐인가. 첫 에피소드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에서 유인원과 뼈다귀 장면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연상시킨다. ‘배암그라’편에서 영감님을 위해 딱 한알 특별제조한 정력제를 엉뚱하게 먹은 개가 돌도끼를 피할 때는 영락없이 <매트릭스>의 키아누 리브스가 총알 피하듯 한다. ‘안전벨트1-비행고인돌’에서 익룡의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미스터 고와 미스 오 위로 흐르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음악, 성교하듯 미묘한 자세로 공중에서 <타이타닉>을 연출하는 장면 등의 패러디가 곳곳에 포진해 젊은 관객들의 웃음 수맥을 터뜨린다.

혹 잦은 패러디로 웃음의 리듬을 잃어버리는 이라면, 각색이 아니라 순수 창작에 가까운 ‘육(肉)중창’을 눈여겨볼 만하다. 심상찮은 제목의 이 에피소드는 6명 남녀의 육체적 결합이 만들어내는 교성의 아카펠라를 그리고 있다. 영감님의 지휘 아래 세쌍의 원시 남녀의 성교와, ‘아하∼’하는 야릇한 신음소리를 혼성 아카펠라처럼 녹음한 ‘육중창’은 폭소를 자아낸다. 국산 창작애니메이션에서는 보통 일본과 마찬가지로 후시녹음을 애용하는 편인데, 이 교성의 중창을 위해 선녹음한 뒤 타이밍 그래프를 찍어가며 만들었다고. 노래가 약해 악기를 좀 쓰긴 했지만 아카펠라 분위기를 잘 살린 이 음악은, 소위 ‘테크노 뽕짝’이라는 황신혜밴드의 주제가와 더불어 작품에 잘 들어맞는다.

<고인돌>이 비디오로 나올때까지의 3년

<고인돌> OVA가 지난 2월11일 비디오가게 진열대에 오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3년. 출발은 지금은 해체된 제이컴이 박수동 화백과 판권 계약을 맺고 애니메이션 기획에 들어간 97년 3월로 거슬러올라간다. 하지만 “쉬운 캐릭터도 아니고, 성 해학이란 부분을 놓치고 싶지 않은데 성인용으로 갔을 때 시장 경쟁력이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설프게 했다간 우스운 꼴”이 될 것 같아 고민하는 새 시간이 많이 흘렀다. 제이컴의 해체 이후 김선구 PD를 비롯한 <고인돌> 기획팀은 완구업체 손오공의 자회사인 서울애니메이션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다시 제작을 추진했다. 본격적으로 제작에 박차를 가하게 된 것은 서울애니메이션의 전액 투자와, 99년 7월 오돌또기의 합류가 결정되면서부터. 극장용 <오돌또기> 제작을 위해 만화가 박재동 화백을 중심으로 모인 창작집단 오돌또기는, 제작비 문제로 숙원사업을 미뤄온 동안 MBC에서 방영된 <박재동의 시사만평>, 데모를 겸한 <아구찜과 빠가사리> 일부를 만들고 <누들누드2>에도 참여하며 노하우를 쌓아왔다.

양쪽 PD로 구성된 기획팀은 시나리오와 콘티를 어떻게 풀지를 공동으로 짜고, 6개월이란 비교적 단기간에 <고인돌> OVA를 완성했다. 시간적으로 두배 이상, 인력은 그 몇배를 들인 <누들누드>에 비하면 제작기간도, 인력도 턱없이 모자란 조건이었다. 오돌또기 내부에서 에피소드 6개를 직접 만들고, 나머지 5개는 콘티 설정 및 연출을 끝낸 상태에서 삼원동화에 외주제작을 맡긴 뒤 나중에 다시 감수하는 시스템을 갖췄다. 오돌또기팀의 오성윤 PD에 따르면, “처음엔 오돌또기란 이름으로 이런 작품 해도 될까 고민도 없지 않았다”고. 하지만 제주의 삶을 그릴 토속적 애니메이션 <오돌또기>가 지연되는 상황에서 또다른 토속적 매력을 품은 <고인돌>은 흥미로운 기획이었다. 결국 기획팀은 물론, <누들누드2> 중 ‘역무원 K’를 연출했던 이춘백 감독, 극장용 <마루치 아라치> <날아라 슈퍼보드> 외 TV물 다수의 배경을 담당해온 중견 유승배 감독을 비롯한 오돌또기 제작진들이 모두 <고인돌> 제작실무에 나섰다.

제작비는 판권료를 제하고 마케팅비용을 포함해 3억원이 좀 넘는 저예산. 3만8천여개 팔린 <누들누드>가 가능성을 보여준 성인 애니메이션 시장을 겨냥해서 비디오 5만개를 풀었다. 흥행결과를 섣불리 예측할 수 없지만, 적어도 비디오가게에서 뒤집힌 <고인돌> 케이스를 발견하기 어렵지 않다는 점에서 제작진은 낙관하고 있다.

짧은 제작기간이나 적은 예산을 감안하지 않아도, <고인돌>은 국산 창작물 가운데 보기 드물게 세련된 자태를 갖추고 있다. 첫 에피소드부터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섬세한 색채와 배경 묘사다. 자연광의 미세한 변화를 담은 듯 세심한 명도, 채도 차이가 돋보이는 색감은, 동양화의 부드러운 선맛을 살린 배경과 어우러져 푸근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엷은 밀짚색, 조금 진한 황토색, 연한 연두색과 암녹색으로 자연스럽게 물든 땅, 하늘색과 연보라, 청회색으로 낮과 밤을 담은 하늘과 구름빛, 동굴의 음영까지 부드러운 파스텔조의 담채화가 자연의 표정을 풍성하게 잡아냈다. 레이아웃을 손으로 그려 스캔을 받은 뒤 컴퓨터로 채색을 하되, “수채화와 파스텔톤”의 색채를 내기 위해 고심한 시도가 성공적인 셈이다. 유승배 배경감독은 “원작에는 배경이 많지 않고 공간 처리가 돋보인다. 그런데 애니메이션에서 그대로 하면 좀 딱딱해 보일 것 같아 약간 동양화풍으로 가면서, 현란한 색 대신 모노톤 분위기로 갔다”고 설명한다. 많은 국산 창작물들이 원색, 혹은 진하고 현란한 색상의 부조화로 색 지정에서 많은 아쉬움을 남겨온 전례와 비교할 때 유난히 매력적인 점이다.

수채화와 파스텔톤 배경, 단순화되지 않은 굴곡

박수동 화백의 개성을 대표하는 캐릭터는 제작진이 가장 고심한 부분 중 하나. 상대적으로 정적인 배경은 섬세한 묘사가 돋보이지만, 캐릭터를 비롯해 시종일관 움직이는 것들은 아무래도 단순화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원안의 “흐르는 듯 자연스러운 선맛, 손맛을 살리기 위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며 선이 반듯해지곤 하는 중간과정을 꼼꼼히 체크했다”는 이춘백 감독의 말대로, 캐릭터의 생김이나 표정도 기대 이상으로 생기발랄하다. “만화는 아무래도 평면적이니까 애니메이션, 삼차원적인 무대로 옮겼을 때는 플러스 알파가 있어야 한다”는 이 감독은 하지만 콘티가 충분히 입체적이지 못했고 카메라워크가 풍부하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한다.

어쨋거나 <고인돌>은 1시간이 좀 넘는 동안 재미를 잃지 않고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다. 성담론조차 금기시됐던 시절을 용감하게 활보했던 만화 <고인돌>과는 출신배경이 다른터라, 애니메이션 <고인돌>은 풍자와 해학보다 도발적인 성적 판타지쪽으로 신나게 밀고나간다. 남근 중심적인 사고에 치우쳐있는 것 아닌가 하는 토를 달 수도 있지만, 성인용 애니메이션 <고인돌>이 애니메이션의 표현영역을 넓히고 다양한 작품이 나올 수 있는 시장을 만드는데 또 한 걸음 보탠 것은 사실이다.

성인용에서 포르노 사이

올해 선보일 성인용 애니메이션들

<누들누드>1.2편의 뒤를 잇는 <고인돌>은 세 번째로 출시되는 성인용 비디오 애니메이션(OVA)이면서 동시에 2000년 들어 선보이는 국산 창작 애니메이션 제1호이기도 하다. IMF 이후 제작규모가 큰 극장용 장편 제작이 거의 중단되고 TV와 비디오 애니메이션 제작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최근 2∼3년간 국산 애니메이션 시장의 추세다. 특히 <고인돌>로 문을 연 올해는 기획, 제작되는 작품 가운데 유난히 성인 애니메이션물이 늘어 눈길을 끌고 있다.

우선 <고인돌>의 뒤를 바로 잇는 작품은 3월6일 세음미디어에서 출시될 예정인 <69 핑크 라이더스>. 비디오 제작사 IMK가 제작한 <69 핑크 라이더스>는 ‘성인용’ 딱지도 모자라 국내 최초 ‘포르노 애니메이션’을 표방한 작품이다. 여체 모양의 오토바이를 탄 ‘터미네이터’를 비롯해 섹시한 미녀, 회춘을 꿈꾸는 노인 등 코믹한 캐릭터들이 겪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옴니버스 형식에 담았다. SF적인 요소와 강도 높은 섹스 코미디가 뒤섞였다. 지피엔터테인먼트가 제작하고 역시 세음미디어에서 5월 출시 예정인 <러브 칵테일>은 옴니버스 형식이 대부분인 기존 작품들과 달리 전체적인 드라마 구성을 갖추고 있다. 20대 초반의 여기자와 미모의 여형사가 겪는 사건을 뼈대로 과감한 섹스와 액션 연출을 선보인 작품. 그 밖에 고전 <흥부전>을 비틀어 재해석한 윤태호의 만화가 원작인 <연씨별곡>도 제작이 한창이다. 음악극과 패러디를 이용한 해학적 에로틱 코미디를 내세우고 있는데, 페이즈엔터테인먼트의 작품이다. 영화로 흥행에 성공한 바 있는 고전 <변강쇠뎐>은 올해 극장 개봉을 목표로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제작중이다. 고전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한편, 동양화의 독특한 붓선과 화선지의 질감이 어우러진 풍속화 같은 영상을 만들겠다는 게 제작사의 야심이다. 서울무비에서 기획하다가 제작이 연기됐던 극장용 <누들누드 외전>도 올해 다시 제작을 추진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