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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영화제 은곰상 <그림 속 나의 마을>의 히가시 요이치 감독
사진 이혜정김혜리 2000-02-22

“순수를 찾으러 50년 전으로”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을 탄 1996년작 <그림 속 나의 마을> 개봉에 맞춰 서울을 방문한 히가시 요이치 감독(東陽一·66)에게 한국 나들이는 이번이 네 번째다. 1993년 <NHK> 다큐멘터리 <한국의 서커스>를 위해 두 차례 취재 여행을 다녀갔고, 1998년 서울 국제독립영화제 손님으로 초대받은 것이 세 번째 방문이었다. 교육 영화와 다큐멘터리로 이름난 이와나미영화사를 거쳐 1969년 히가시프로덕션을 설립한 히가시 감독은 <써드>(78), <다리없는 강>(92) 등 일본사회의 저변을 훑는 사실주의적 영화들로 일본평단에서 가볍지 않은 믿음을 쌓아온 노장. 필름 위에 빛으로 그린 그림책 같은 영화 <그림 속 나의 마을>에서도 그의 투명하고 엄정한 시선은 그대로다.

지난 2월9일 회색 양복에 갈색 편물 넥타이를 맨 젊은 차림새로 <씨네21>을 방문한 히가시 감독은 활달한 손짓을 곁들여 자신의 영화와 인생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보통의 경우라면 “나는 35살”이라고 고집을 피우다가 다음 순간 “사실은 300살”이라고 시치미를 떼는 상대와의 인터뷰란 곤혹스런 일이었을테지만, 노인의 지혜와 소년의 생기를 번갈아 발산하는 히가시 감독과의 대화는 기자에게 유쾌한 어지럼증을 선사했다.

-와세다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것으로 안다. 어쩌다 영화에 끌렸는지.

=문학과 연극, 음악과 회화의 요소가 어울린 영화를 문학 못지 않게 좋아했다. 작가로는 재주가 없다고 느끼기도 했고. 와세다대 연극 동아리에도 가입했지만 1년 뒤 그만뒀다. 병영 같은 선후배 질서가 싫어서였다.

-1958년 영화계에 입문했는데 당시 일본사회에서 영화를 생업으로 택한다는 것은 어떤 일이었나.

=그맘때 성적 좋던 친구들은 다들 방송사에 갔고 지도교수는 내게 광고 대행사를 권했지만, 나는 지금이나 그 때나 오직 영화였다. 영화가 상영되는 컴컴한 공간이 특히 좋았다. 여럿이 같이 보면서도 고독하고, 홀로 보면서도 여럿이 함께 한다는 느낌을 주는 장소가 매력적이었다.

-<그림 속 나의 마을>에는 우메보시(매실 장아찌)만으로 식사하거나 맥아더의 토지개혁을 원망하는 종전 직후 일본의 일상이 등장한다. 50년을 거슬러올라간 이유는.

=“예전이 좋았지” 식의 향수는 아니다. 나는 옛날보다 지금이, 지금보다는 미래가 중요하다고 여기니까. 그러나 현재와 미래를 개선하려면 때로 과거를 간직해야 한다. 현재란 인간에게 있어 파악하기 어려운 대상이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를 때마다 옛날엔 어땠나 돌이켜본다. 오늘날 일본에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날 때면 “나는 이런 일본을 사랑할 순 없구나” 생각하는데, 되짚어보면 늘 일본 민족의 삶이 이렇게 살벌한 것은 아니었다. 잃어버린 순수를 회복하기 위해 50년 전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림 속 나의 마을>이라는 제목은 도달할 수 없는 곳이라는 의미인지.

=일본어 ‘그림’이란 단어에는 이미지라는 뜻도 있다. 이미 소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나의 추억 속 이미지 안에 있는 마을이란 의미다. 촬영장소도 내가 소년기를 보낸 시골과 실제로 가까웠다. 영화에 흘러넘치는 여름 햇살은 내 어린 시절 기억의 산물이다.

-극중 대사대로, 국가적으로는 수난기였다해도 당신의 “뿌리에 양분을 준” 아름다운 시절인 셈인가.

=한편으로는 회상하기도 싫은 시대지만, 아예 남의 일에 끼어들지 않는 요즘 일본 젊은이들 모습과는 달리 그 때는 적어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사람과 자연의 관계가 농밀했다. 심하게 싸운다해도 깊은 부분에서 연결돼 있는 <그림 속 나의 마을>의 쌍둥이 형제처럼.

-<그림 속 나의 마을>로 들어가자. 마을 나무에 깃들어 사는 세 노파는 운명의 실을 잣는 <맥베스>의 마녀들을 연상시킨다. 일본민담의 원형적 캐릭터인가.

=<맥베스>에서 영감을 받긴 했다. 마을의 정령이자 민담에도 근원을 둔 복합적 캐릭터다. 연기자들은 촬영한 마을의 할머니들이었는데, 내 팔로 직접 나무 위로 올려드렸다. 세 노파는 그리스연극에서 코러스에 해당하는 시점을 영화에 부여하는 화자이기도 하다.

-쌍둥이의 말썽에 “재밌었니? 엄마도 해보고 싶구나”라고 반응하고, 아무도 안 보면 소녀처럼 행동하는 어머니 캐릭터가 마음을 끈다. 그녀가 어린 아들과 목욕하면서 여성의 몸에 관해 설명하는 장면은 이제껏 보아 온 영화 속 누드신 가운데 가장 독특하고 아름답게 구사된 나체 장면의 하나였다.

=일본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심부름을 제대로 않고 군것질을 한 아이가 어머니에게 돈을 잃어버렸다고 거짓말을 해놓고 간이 콩알만해져 있는데, 그말을 들은 어머니가 밝고 크게 웃자 마음이 활짝 갰다는 이야기다. 그 어머니의 모습이 머리에 입력돼 있었던 모양이다. 목욕탕 장면을 원작에서 보았을 땐 나도 놀랐다. 그런 어머니는 드물다. 만약 일본 어머니들이 그런 식의 성교육을 했다면 지금 일본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성범죄도 없었겠지.

-학교와 동네에서 소외당하는 두 아이 센지와 하츠미를 통해 하려던 이야기는?

=소녀 하츠미는 일본에서 차별당했던 부랑민을 표상한다. 거친 소년 센지의 캐릭터에는,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돌며 어디선가 나타나 홀연히 사라지는 일본 전설 속 방랑자의 이미지가 있다. 나는 슬픔을 모르는 인간은 쓸데없다고 믿는다. 괴롭힘당하는 소수자들은 고통을 통해 순도 높은 슬픔을 갖게 되는데 그 비애는 정신을 정화시킨다. 나는 약자를 아낀다. 가엾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인간적 순수함과 섬세함, 강인함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이죠가 송곳에 찔리는 순간, 정적이 내리면서 매미소리가 갑자기 커지는 장면이 있다. 자연음과 르네상스 이전 음악이 갈마드는 방식도 인상적이다. 사운드 구사의 원칙은.

=나는 병약한 아이였다. 혼자 집에 있으면서 빛과 소리의 미세한 움직임을 더듬곤 했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만들 때에도 그 부분에 아주 민감하다. 음악은 직감으로 택한다.<다리없는 강>에서는 볼리비아 음악을 쓰기도 했다. 중세 음악은 악보없이 즉흥 연주되는 소박한 음악인데 그것이 영화와 어울린 것 같다.

-하츠미가 세이죠에게 “네 그림이 좋아”라고 말하는 장면 등 감정이 고조된 몇 대목을 롱숏로 보여주는데.

=생각없는 방송사 사람들은, (웃음) 그런 장면에 어김없이 클로즈업을 쓰는데 나는 그러지 않았을 뿐이다. 멀리서 찍으면 사람들의 호기심은 가운데로 집중되니까 오히려 효과가 크다.

-관객은 처음에는 쌍둥이들을 귀엽다고 느끼지만, 어느새 그들을 내려다보기를 멈추고 동일시하게 된다. 성인과 어린이를 모두 염두에 뒀나.

=찍을 때에는 관객을 잊어버린다. 내 머릿속에 있는 단 한 사람의 관객만 빼고. 그는 현실에 없는 존재로 직감이랄 수도 있고 또 다른 ‘나’이기도 하다. (그분께도 인사 전해달라고 말하자) 음, 안부를 전해봤자 그는 늘 나돌아다니다가 영화 찍을 때만 훌쩍 돌아오니 지금은 소용없다. (웃음) 물고기의 혼잣말을 자막 처리한 대목에서는 아시아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웃음과 박수가 나왔다. 어느 나라 사람이나 모든 사물을 살아 있는 것처럼 대하는 유년 시절의 체험은 통하는 것이다.

-어린이를 중심에 둔 이란영화들을 봤는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을 만난 적이 있지만 어딘지 권위적이어서 인상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감독이란 영화가 훌륭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체리향기>는 실망스러웠지만 그의 초기작은 굉장히 좋아한다.

-<그림 속 나의 마을>은 아기자기한 동화지만, 불평등과 편견, 약자를 동정하면서도 다수에 휩쓸리는 비겁한 소시민의 심리까지 담아낸다. 이전에 만들었던 다큐멘터리나 사회드라마를 연출할 때와 이런 ‘맑은’ 영화에 사회적 코멘트를 집어넣을 때 차이는.

=내게 붙은 ‘사회파 감독’이라는 평은 잘못된 것이다. 나는 단지 인간을 좋아해서 영화를 찍을 따름이다. 방법론 상으로는 사회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기도 하고 사적인 문제를 보편적인 문제로 인식하기도 한다. 옴 진리교 테러는 사회적 사건이지만 나는 교주 아사하라 쇼코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관심을 갖는다. 반대로 (통역을 가리키며) 이 분이 한국 여성과 연애를 한다면 한일관계라는 문맥에서 이해하려 할 것이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각각의 매력은. 혹은 그 두 가지를 결합하고 싶은 방식은.

=기록 영화를 찍을 때는 픽션처럼, 극영화를 찍을 때는 다큐멘터리처럼 접근하는 것이 좋다. 즉 극영화 배우의 연기를 시나리오가 준 자극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으로 본다면 다큐멘터리적 관점이 된다. 예를 들어 안성기씨가 연기를 한다면 시나리오를 통해 안성기씨의 다큐멘터리를 찍는 셈치는 것이다.

-올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된 <나의 아저씨>는 어떤 영화인가.

=원인불명의 은행강도를 저지르는 소년과 스트레스에 치인 직장인의 감정적 교류를 그린 영화다. 요괴도 등장한다. 도쿄에서 언론 시사 중인데, <그림 속 나의 마을>을 칭찬한 이들은 이 영화를 싫어하고 <그림 속 나의 마을>을 마땅찮아 했던 사람들은 호평한다. 두 영화를 같이 틀면 손님이 많이 들지 않을까 싶다. (웃음) 나는 스스로 신인이라고 주장하는데 베를린영화제쪽은 신인을 위한 포럼 부문 말고 파노라마 부문에 초대했더라.

-일본의 젊은 감독 중 각별히 예뻐하는 후배가 있다면.

=최고는 칸 감독주간에 초청됐던 스와 노부히로다. 그의 <M/other>는 <키네마준보>에서 그 해 다섯 번째 좋은 영화로 선정했는데, 일등을 못한 것은 순전히 <키네마준보> 심사위원들이 다들 노인네이기 때문이다. 스와 노부히로 첫 작품 <2 Duo>에서 주연한 유애리도 무척 훌륭한 여배우라고 본다.

-당신은 60∼90년대를 통과하며 영화를 만들어왔다. 당신이 체감하는 일본영화 환경의 변화는.

=60년대 이전에는 무능한 사람도 몇년만 촬영소에서 자리를 보존하면 감독이 됐으니 재미없는 작품들도 많았다. 지금은 영화감독이 된들 돈을 못 번다는 사실을 다들 알아서 정말 영화를 원하는 사람들만 남는다. 소규모 영화사에서 감독들이 데뷔하는 것도 좋아진 점이다. 반면 젊은이들이 점점 재미도 없는 미국영화 영향에 휩쓸리는 건 나쁜 점이다. 디즈니랜드도 있어야 할 존재지만 문화 자체가 디즈니랜드가 되면 그렇게 서글픈 일이 없다. 요즘 관객의 특징은 영화의 국적을 상관 않는다는 점이다. <쉬리>의 경우도 즐겁게 보고 나서야 한국영화인지 깨달은 일본인이 많을 거다. 딴 얘기지만 <쉬리>는 더 칭찬받고 더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영화가 한국과 일본에서 거둔 큰 성공 자체가 한국영화사의 ‘사건’이니까. 그것이 <씨네21>의 책임 아닐까?

-연륜이 쌓이면서 영화와 사회에 대한 시선이 변했는지. 영화를 택한 것을 후회 않는지.

=다섯시간쯤 시간 있나. (웃음) 근본적으로는 아직도 소년의 마음이다. 인간은 이런 것이다라고 단정하면 끝장인 것 같다. 인간이란 어떤 것일까 끝없이 묻는 궁금증이 중요하다. 지도교수 말대로 광고회사를 갔다면 지금쯤 임원일 텐데 가끔 생각하지만 후회는 없다. 단지 감독 자신만 알아차릴 수 있는 과거 작품에 대한 불만은 있다. <그림 속 나의 마을>에도 그런 점이 있지만 여기서는 말하지 않는 편이 유리하겠지.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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