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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랜드에 들어선 공포 극장, <슬리피 할로우>

팀 버튼의 아름다운 동화 <슬리피 할로우>

팀 버튼이 아직 ‘어른스러운’ 주제는 다뤄본 일이 없지만, 돈 되는 할리우드 감독치고 미학적 완결성을 그보다 더 엄격하게 추구하는 이 또한 없다. 데이비드 린치보다는 좀더 폼잡는 대중적 감독이고 스티븐 스필버그보다는 대중적 성공에 신경을 덜 쓰는 편인 버튼은, 스튜디오 영화의 소잿감을 특유의 음습하고 수다스러운 표현주의적 목표를 위해 끈질기게 뒤집고 뒤틀어왔다.

<슬리피 할로우>는 ‘반(反)엔터테인먼트적’이라는 측면에서는 그의 비운의 실패작 <화성침공>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끝내주게 멋지고 살 떨리게 무서운 신작의 순수한 영상은 가히 눈부시다. 떨어지는 나뭇잎이 목표물에 명중하고, 신호에 맞춰 셔터가 흔들리고, 번개가 악귀의 등장을 비추는 일종의 할로윈 귀신 영화라고나 할까. 이 버튼판 유령의 집은, 비록 살아 숨쉬는 배우들이 우글거리기는 하지만, 반세기 전 워싱턴 어빙의 귀신이야기에(빙 크로스비의 내레이션은 말할 것도 없고) 코믹한 한기를 불어넣었던 디즈니 애니메이션만큼이나 물샐 틈 없는 스타일을 과시한다.

버튼의 가장 문학적인 그림동화

버튼의 영화 중에서 가장 문학적인 <슬리피 할로우>는 어두침침하고 연기 자욱한 1799년 뉴욕시티에서 막이 올라, 익살스러울 만치 세기말적이게도, 울창한 가을 허드슨강 계곡 안개에 휩싸인 동화 속 마을로 랩소디처럼 화면이 흘러간다. 어빙의 원작에서 얼간이 교사였던 이카보드 크레인은 아름다운 청년 조니 뎁이 연기할 뿐만 아니라, 의식적으로 현대적이고 귀엽게도 겁많은 형사로 격상된다. 벽촌마을로 파견된 그는, 하나같이 가발을 뒤집어쓰고 얼이 빠져 그로테스크한 인상을 풍기는 일단의 우스꽝스러운 영국 배우들 패거리(그 중에서도 특히 마이클 갬본과 미란다 리처드슨)를 만난다.

이카보드의 공식 임무는, 목을 잘린 채 살해당한 일련의 살인사건들을 해결하라는 것. <쎄븐>과 <8MM>를 썼던 시나리오 작가 앤드루 케빈 워커는 어빙의 고전적인 미국 민담을 연쇄살인범 이야기(가 아니고 뭐겠는가?)로 재가공했다. 어빙의 원작과 무시무시한 옛 디즈니 만화에서 ‘알고 보니 속았다’는 식인 호스맨은 여기서는 문자 그대로 펄펄 살아 있다. 잃어버린 모가지를 찾아서 끝도 없이 헤매는 짐승 같은 독일인 용병으로(크리스토퍼 워컨이 가지런한 이빨을 자랑한다). 버튼은 시나리오가 매끈하게 닦아놓은 길에서 좀체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영화가 다 그렇듯이, <슬리피 할로우>는 내러티브 영화라기보다는 장소에 관한 영화다. 분위기는 무섭다기보다(grim) ‘그림 형제’(Grimm)적이다. 버튼은 그 소름끼치는 액션이 마치 재미있는 인형극이나 되는 듯이, 또다른 <크리스마스의 악몽>이라는 듯이, 연출한다.

까다로운 성격에 현학적인 이카보드는 정교한 수사도구들의 발명가다. 극도로 이성적인 이 반푼어치 예술가는, 이따금 맞닥뜨리는 끔찍한 수술에도 눈 하나 깜짝 않는다(조니 뎁의 연기는 <에드 우드> 정도는 아닐지라도 <가위손>에서처럼, 감독의 환상적인 미장센을 위해 봉사한다). 버튼의 주인공들이 늘상 그렇듯이, 어린 시절의 정신적 외상을 안고 살아가는, 손에 기이한 못자국이 난 이카보드는 영화 내내 꿈나라로의 주기적인 여행을 통해서 어린 시절을 다시 방문한다. 거기서 (‘의미심장하게’(?) 버튼의 반쪽 리사 마리가 연기하는) 그의 마녀스러운 엄마는 그에게 ‘회전요지경’으로 알려진 시각적 장난감을 주는데, 이 장난감은 그의 부적이 된다.

개조된 그랑 기뇰, 볼 것 많은 요지경

이카보드는 환영을 만들어내는 이 회전요지경을, 영화에 등장하는 몇몇 마녀 중에서 가장 순결한 카트리나 반 타슬(크리스티나 리치)에게 보여주면서, “진실이 겉모습과 늘 같은 건 아니”라고 설명한다. 여러분들 또한 꼬이고 비틀린 채 피 흘리는, 슬리피 할로우라기보다 지옥으로 향한 자궁 같은 통로인 나무뿌리 틈에서 목없는 호스맨이 썩 납실 때마다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하게 될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나뒹구는 잘린 목이 으스스하기는 하지만, <슬리피 할로우>는 기본적으로 코믹하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약간 잔인할지도 모르지만, 특히 마을의 산파와 그 어린 아들(어린 이카보드가 그랬듯이, 그도 시각적 장난감들을 몹시 좋아했다)에 내려지는 야만적인 응징이 그렇지만 말이다.

워커의 시나리오는 너무 복잡한 동시에 미흡한 대목이 많은데도, <슬리피 할로우>는 멋진 화면과 화면 사이를 질주하면서, 숨막히게 스릴 넘치는 장면을 수없이 제공한다. 이 요술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볼거리는 버튼의 아름다운 프로덕션 디자인이다. 이미지들은 풍요로우면서도 서로 빈틈없이 어울린다. 잡다하고 시시콜콜한 온갖 것들이 전체를 향해 봉사한다. 그러면서도 버튼과 워커는 원시림의 공포를 식민의 반란에서 피어오르는 죄의식과 버무려 독창적인 고딕 영상을 멋지게 창조해냈다.

호스맨은, 목이 잘렸지만 여전히 가공할 힘을 지닌 미국혁명의 억압된 가부장적 잔재의, 모든 측면에서의 부활을 뜻한다(마치 뉴욕 사람들이 맨해튼 배터리 공원에서 끌어내린 조지3세의 동상이 살아돌아온 것처럼). 하지만 영화 자체는 역사적 오만이자 상징적 대역(大逆) 행위다. 디즈니랜드가 프로이드적 비유가 난무하고 역사적 울림이 있는 ‘그랑 기뇰’(1897년 프랑스에 창설된, 무서운 연극을 상연하던 극장-옮긴이 주)로 개조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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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은 <빌리지 보이스>의 짐 호버먼 칼럼을 독점전재합니다. 이 글은 99년 11월 24일치 평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