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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재미 찾는 사회

언제부턴가 주위에서 ‘재미없다’는 말이 자주 들린다. 그런 ‘과’(科·발음대로라면 ‘꽈’)만 주위에 분포된 건지, 전반적 사회 분위기가 그런 건지는 확인할 길 없다. 그렇지만 ‘직장인보다는 재미있게 산다’고 자부하는 내 입에서도 이틀에 한번쯤은 이런 말이 나오는 걸 보면 후자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근거 하나 더. 원고를 청탁받을 때의 주문도 ‘쉽고 재밌게 써달라’는 게 대부분이다. 바야흐로 ‘재미 찾는 사회’다.

이전에는 어땠기에? “그때 그 시절 사람들이 찾던 것은 재미가 아니라 의미였다”라는 주장이 꽤 있을 듯하다. 재미와 의미라. 그럭저럭 세태의 변화를 상징해주는 대조다. 운(韻)도 맞아떨어진다(의미는 한자어고, 재미는 순우리말이지만 무슨 상관이랴). 좀 과장을 보태면 재미는 이제 모든 것의 가치를 판단하는 지고의 기준이 되었다. 기왕 재미 타령을 한 김에, 몇 방울 남지 않은 먹물을 쳐서 “최근 한국사회에서 ‘재미의 정치학’에는 몇개의 양상이 존재한다”고 우겨보기로 하자.

첫째, 재미는 ‘있다/없다’의 문제다. 기준은 자의적이고 모호하지만, 결론은 빠르고 명백하다. ‘도 아니면 모’식이고 ‘그냥’이라는 단어 외에는 말이 필요없다. 그만큼 재미는 사활적이고 절실하고 처절하고 절박하고 목숨거는 문제가 되었다. 그때 그 시절, 의미는 그래도 ‘크다/작다’로 표현되는 ‘정도’의 문제였다. 재미는 그런 거 없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재미없다’라는 반응은 최악의 평이다. 아, 재미의 정도를 측정하는 단위가 있기는 하다. 단, 그때도 비교급보다는 최상급에 가깝고, 이를 위해 각종 부사가 동원된다(그 중에 ‘라’자로 끝나는 두 글자가 인기가 많다).

둘째, 재미의 정도는 결과에 집착하지 않을수록, 과정에 몰입할수록 커진다. 좀 지저분한 얘기지만 ‘재미봤다’라는 은어가 있다. 이 말은 주로 돈과 섹스에 쓰이는데, 대상의 속성이 몰입하기 쉽기 때문에 그런가보다. 요즘 ‘트렌디’한 수단은 각각 주식투기와 원조교제란다. 물론 이 경우 결과에 연연해 하는 구석이 많으므로 사이비다. 진짜 재미는 모든 걸 잊고 몰입할 때 극대화한다. 잡생각이 머리에 떠오르면 재미없는 거다. 어설프게 공부한 서양 정신분석의 용어를 빌면 ‘자아 상실’(ego-loss)이다. 주의할 점은 몰입이 ‘중독’으로 바뀌면 폐인되는 수가 있다는 점이다. 원고 마감 앞두고 자료 찾으러 인터넷에 들어가서는 홈페이지와 웹진을 둘러보고 CD숍(shop)과 북 스토어까지 구경하고 나온 뒤의 처절한 깨달음이다.

세 번째, 재미를 찾는 일도 일종의 ‘싸움’이다. 예술이든, 스포츠든, 다른 무엇이든 재미를 즐기려면 수고와 비용이 들기 때문에 시간을 잘 배분해야 한다. 아이러니다. 재미란 대상에 몰입하여 에너지를 남김없이 탕진할 때 극대화하지만 그를 위해서는 치밀한 준비와 관리가 필요하니까. 이건 정말 싸움이다. 그래서 때로는 준비하다 지쳐서 정작 재미를 느껴야 하는 순간에 지쳐 떨어지기도 한다. 1년 전쯤 ‘mp3’라는 것 좀 들어보려고 고물 컴퓨터 업그레이드하고, 프로그램 깔았다 지웠다를 반복한 다음에 떠올랐던 생각이다.

서가에 꽂힌 <1980년대: 혁명의 시대>라는 책의 뒷표지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1980년대의 문화운동이 아직 가치있다면 문화를 윤리의 문제로 사고했다는 점이고, 가치가 없다면 재미의 문제를 사고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재미를 강조하고 있지만 글쓴 사람이 읽어도 그닥 재미없다. 반응은 “‘열라’ 어렵고 재미없다”는 게 대부분이고, 책도 기대보다 안 팔린다고 한다. 제길, 학계에서는 ‘잡문’이라고 그럴 텐데 뭐가 어려울까. 어떤 ‘전방위 문화평론가’가 쓴 책처럼 제목을 <나는 80년대가 재미있다>라고 할 걸 그랬나(후회: 역시 사랑했던 대상에 대한 속내는 쉽게 드러내는 게 아닌가보다). 어디선가 “그 따위로 하면 ‘재미없을’ 줄 알아”라는 말이 들려온다. 감기약을 먹었더니 착시에 이어 환청까지.

그런데 혁명? 그건 재미있는 일일까. 내 식대로 라면 목표에 연연해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불법 사전선거운동 집회장에 “또다시 혁명을 꿈꾸며” 운운하는 플래카드가 내걸린 장면을 본 뒤로는 미심쩍어진다. 코미디지만 개코미디라서 ‘졸라’ 재미없다… 궁시렁궁시렁… 여기서 한국형 재미의 마지막 양상이 드러난다. 시간이 지나면 재미없던 것이 재미있게 되기도 한다. 이전에는 없던 여유가, 관용이 생기니까. 한국인들은 바로 앞의 것에는 매정해도, 앞의 앞의 것에는 관대하다. 어때, 재미있는 국민이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