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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날의 향기, 습도, 촉감…, <닥터 지바고>
2000-02-15

23년 전, 그해. 올해처럼 눈이 많던 겨울 설날에 입을 꾹 다문 채 한동안 하늘을 바라보던 한 아이가 갑자기 뛰기 시작한다. 오전 내내 이집 저집을 부지런히 돌아다닌 보람으로 주머니에는 제법 100원짜리 동전이 들어차서 내딛는 걸음마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가득하다. 얼어붙은 밭길을 넘어 산딸기의 씨앗들이 겨울잠을 자는 강둑을 툭툭 뛰어넘는다. 지평선 위를 실루엣으로 가로지르는 한 아이의 모습은 옆동네 여자친구를 찾아 소풍을 가는 풍경 같아 보인다. 두손에 꼭 쥐었던 100원짜리 2개를 작은 극장 매표소 창구로 내보일 때 동전에 밴 땀 위로 겨울 햇빛이 잠깐 눈부시다. 그때 시력이 나빠졌을까? 알지 못하는 본능 앞에 기분좋게 굴복한 채 나 홀로 감행했던 이 첫 경험은 <황금박쥐>와 <춘자는 못말려>를 포함한 200원짜리 네편 동시상영 관람이다. 어쨌든 그때 난 작은 시골의 산골 동네를 누비던 포스터 세로길이만한 키의 조그만 아이였다. 닥터 지바고의 잃어버린 딸 토냐처럼 누구 손을 잡은지도 모른 채 뛰어다니던 어릴 시절부터 어쩌면 아직도 난 내가 선택하지 않은 여행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첫 경험으로부터 13년 만에 만난 영화, <닥터 지바고>는 시와 여행과 고통에 관한 영화다. 10년 전, 19살. 난 하룻밤에 19개의 꿈을 꾸고 19편의 시를 쓰곤 했다. 형제애와 자유, 정의, 평등 그리고 빵을 외치다 깨어나 미처 매듭짓지 못했던 거친 꿈을 말아먹고 누우면 다시 이어지는 시의 미로 속에 살곤 했다. 젊은 의사 지망생 지바고는 언제나 꿈을 꾸는 듯한 눈동자로 세상을 바라본다. 소박한 시위 대열이 역시 형제애와 자유, 정의, 평등 그리고 빵이라는 ‘근사한 말’들을 내걸고 매력적인 <인터내셔널가>의 원작에 맞춰 거리를 가르고, 세계사 어디에도 있다는 듯 차르의 군사들이 아들과 노인들까지 단칼에 베어버리는 흡사 광주의 풍경 앞에서도, 집을 빼앗겼을 때도, 짐짝처럼 흔들리며 우랄산맥을 향해 달리던 어두운 기차 안에서도, 적군에게 납치돼 아내와 아이와 연인으로부터 한꺼번에 격리되었을 때도, 한겨울의 무인지대에서 새벽의 늑대들과 마주쳤을 때도 닥터 지바고는 묵묵히 거대한 시상을 떠올리는 듯 꿈을 꾸고 있는 눈빛이다. 그 눈빛 속에는 이 영화를 이데올리기에 희생된 인간의 삶을 다룬 이런저런 이야기쯤으로 요약할 수 없게 하는 묘한 이유가 담겨 있다. 궤도의 끝을 알 수 없는 불안한 삶의 여정이 요구하는 특유의 인내심으로 단련된 그의 침묵과 미소는 이념보다 사람이 소중하다는 여느 객관식 정답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삶과 사랑의 섭리를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묵묵히 순응하는 자에게 보내지는 나의 이 연민은 어디서 생겨나는 걸까?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이 잠든 새벽에 깨어난 지바고는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한다. 따뜻한 햇살과 바람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한마디 새벽편지를 쓰기 위해 이 세상 깊은 어딘가 마르지 않은 희망의 샘을 향해 ‘라라’라는 이름을 새긴다. 바랜 추억에 집착하는 시작(詩作)이라는 반동적인 행위의 상징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한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대체된다. 전쟁과 희생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사랑과 이별 또한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냐고 조용히 묻는다. 아무튼 그때 ‘좋은 시절에 다시 만나자’라는 형제끼리의 약속은 지켜졌을까? 우리에게 평생 좋은 시절이란 게 있기는 한 걸까? 나는 평등과 행복의 좋은 시절을 찾아 지나온 해방 전후 한반도의 어느 기찻길을 더듬어본다. 그러나 후∼, 어디에서 한 걸음 여유롭게 쉬어갈 수 있을 것인가? 기차가 도착한 그곳,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자 지바고는 대답한다. “그냥 살아갈 것이다.” 어떤 역에 멈추더라도 나는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첫 번째 임무다.

한 시대의 정점을 오르내리는 성취가 아니라 그 시대의 아픔을 얼마나 안고 서 있는가가 그의 생애를 읽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면 우린 언제라도 닥터 지바고를 만나볼 만하다. 참지 못할 정도로 가볍고 표피적이고 감상적이고 싶었던 시절. 일체의 밀월여행이 허용되지 않던 어지러운 한 시절. 꿈을 꾸는 눈동자. 새벽에 쓰는 시. 난 <닥터 지바고>와 함께 나섰던 모호한 여행을 떠올린다. 아련하게 아파온다. 그 아픔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순간의 나의 감정. 무언가 겹쳐지고 겹쳐지고. 나의 어린 날의 향기, 습도, 촉감…, 사랑하는 사람을 끝도 없이 기다리는 나의 거짓 같은 마음. 1년 전 2년 전 3년 전…. 주소도 밝히지 않은 그것들은 여러 겹으로 겹쳐지며 나의 마음 빈 공간을 출구 삼아 추억으로, 의식으로 전환되며 차오른다. 그 공간은 항상 너무도 작아서 표현하기 힘든 묘한 아픔을 느낀다. 그 아픔은 일종의 울렁임. 깊은 바닷속의, 더 깊은 곳 짙은 파랑의 꽉 막힌 두려움, 내려앉는 고요함. 그 속의 울렁임. 당신도 느낄 수 있겠지. 그립다. 나도 당신과 함께 여행을 가고 싶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당신의 아련한 슬픔을 가까이서 느끼고 싶다. 내가 당신의 슬픔 속으로 들어가서 감싸안을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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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민규동/ 영화감독·<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