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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보고] 선댄스 2000 [2]

프리미어, 미드나이트-신진들의 학예회?

굳이 디카프리오 해프닝 때문만이 아니어도, 원작소설 자체가 일으킨 커다란 반향만으로도 모두가 기다려마지 않았던, 게다가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 한편으로 선댄스의 개국공신 중 하나로 추앙받는 매리 해론의 신작이기에, <아메리칸 사이코>에 걸린 기대는 올해 프리미어 프로그램 전체를 대표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가는 다소 갈리는 듯. 그러나 대체로 <나는 앤디워홀…> 이후 오랜 공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감독은 여전히 강한 카리스마와 인간성 파괴에 대한 심도있는 통찰력으로 여피문화의 세기말적 극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크리스천 베일의 선한 얼굴 뒤에 숨은 섬뜩한 연기는 압권. 이미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올라 있다. 그외 작품들은 굵직한 작가들이 보따리를 풀어놓았던 예년보다는 최근 몇년간 선댄스를 디디고 막 일어선 감독들의 학예회를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사실 많이 알려진 배우들의 등장 외에는 별로 건질 것이 없었다.

< X등급 >

에단 호크가 주연한 <햄릿>, 재작년 선댄스의 신데렐라였던 <다음정거장 원더랜드> 감독의 신작 <행복한 사건>, 그리고 어느새 대머리가 되어 나타난 에밀리오 에스테베즈가 수렁에서 막 건져낸 찰리 신과 오랜만에 뭉쳐 심기일전으로 감독·주연한 ‘디지털 버전 부기 나이트’ <X등급>(X-Rated)이 디지털로 상영되어 관심을 모았다. 거품증시 폭락과 맞물려 증권가의 뒷무대를 신랄하게 해부했다고 해서 관심을 모은 벤 애플렉 주연의 <보일러룸>도 관객의 관심을 유도했다. 또 간혹 비주류 독립영화에 서슴지 않고 나와 새로운 모습으로 관객들을 즐겁게 하는 카메론 디아즈에 글렌 클로즈, 홀리 헌터, 케시 베이츠 등 특급 여배우들이 포진한 독특한 코미디 <그저 그녀의 얼굴만 보고서 당신이 말할 수 있는 것들>도 수월찮게 호응을 얻었다.

지난 2년간 <블레어 윗치> <큐브>의 신화를 탄생시키며 경쟁부문을 압도하며 관심을 고조시켰던 미드나이트 섹션은 제2의 웹 블록버스터를 찾아헤매던 갬블러들에게 적잖은 실망만 안겨주었다.

그나마 제목 흡인력 하나로 올해 가장 기대를 모았던 <사이코 비치 파티>는 존 워터스 유의 악취미 영화와 60∼70년대 정통 스크루볼 코미디가 궁합이 안 맞은 채로 뒤범벅된 바람에 애초 함량미달로 낙인찍혀 컨셉뿐인 화제작이 돼버린 케이스. 재패니즈 사이파이 포르노를 표방한 디지털 프로젝트 전방위 미디어 아티스트 슈리칭의 <I.K.U.> 역시 디지털로 찍어서 디지털로 영사되는 '사이 파이 포르노'라는 화제성에 비해 동어반복 같은 화면구성과 의미없는 포르노적 상상력의 지나친 강조로 상영 중간에 절반 이상의 관객이 극장을 뛰쳐나가는 사태를 연출. 오히려 영화 외적인 관점에서 출발할 때, 요즘 일본에서 한창 유행하는 영화와 게임처럼 새로운 매체의 공격적인 결합을 시도하려는 점에선 미디어 개척가로서 감독의 의도가 엿보인다.

97년에 <킬러>라는 작품으로 파크시티 심야를 잠 못 들게 했던 마이크 맨데즈의 신작 <콘벤트>는 수녀 모습을 한 뱀파이어들을 내세워 역시 위험한 상상력을 선보였는데 <황혼에서 새벽까지>를 너무 뒤틀어논 탓에 호응이 적었고, <하지만 난 치어리더야>는 동성애자인 자식들을 이성애자로 만드는 훈련소라는 아이디어는 반짝였으나 연출력이 받쳐주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그 밖의 부문들-<세이빙 그레이스> 400만달러에 팔려

월드시네마 부문에서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더불어 최고의 화제작은 <세이빙 그레이스>였다. 브렌다 블리신의 말이 필요없는 명연기를 내세운 <세이빙 그레이스>는 영화제 초반 소니 클래식스에서 400만달러에 구매했는데 올해 선댄스의 다크호스로 픽업되면서 관객이 몰리기 시작해 일찌감치 유력한 관객상 후보로 점찍혔다. 역시 관객상을 쥐었다.

<빅 카후나>

깜작 상영작으로 스티브 부세미의 감독 데뷔작 <동물 공장>(Animal Factory)이 공개되었다. 스티브 부세미는 이번 작품으로 곧 몇 안 되는 성공적인 배우 출신 감독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잠재력을 과시했다. 또한 독립영화에 공헌한 배우들에게 수여되는 파이퍼 하이잭 공로상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아메리칸 뷰티>로 오스카상 0순위에 올라 있는 케빈 스페이시가 수상했다. 그는 시상식에서 독립영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피력, 많은 갈채를 받았다. 그는 프리미어에 출품된 미-이탈리아 합작영화인 <빅 카후나>에도 출연해 좋은 연기를 보였는데, 대어급 배우들도 서슴없이 독립영화에 출연하고 단순한 이미지메이킹 차원이 아닌 스스로의 발전을 위해 좋은 기회로 활용하는 풍토에 대해 새삼 부러움을 느끼게 했다.

배급지형도 재편 움직임-주춤한 미라맥스

새 천년 선댄스의 또 하나의 변화는 더이상 이 마을이 미라맥스, 뉴라인 등 미니 메이저들의 놀이터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년간 수백만달러를 눈 뿌리듯 선댄스를 호령하던 미라맥스, 뉴라인의 기세가 올해 들어 왠지 움츠리는 태세에 접어든 것. 아마도 당장 이들이 선댄스에 내놓은 라인업 중 휘어잡을 만한 눈에 띄는 화제작이 드물었고 미라맥스의 <사이다 하우스 룰>, 뉴라인의 <목련> 등 골든글러브와 아카데미를 겨냥한 작품들이 예년에 비해 힘이 빠지는 관계로 프로모션 중심이 오스카쪽으로 분산된 때문으로 보인다.

게다가 미라맥스의 경우, 무턱대고 구매만 할 뿐 제대로 자리매김하지 못하면 자칫 창고로 들어가기 쉽다는 독립영화인, 외국영화인들의 불신이 깊어지면서 이렇다할 큰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한 게 사실. 당연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는 또다른 미라맥스 지망생(wannabe)들이 맹공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회사들이 아티잔, 라이온스 게이트 등 신흥 중소배급사들과 지난해 옥터버필름을 인수하면서 공공연히 미라맥스에 도전장을 내민 USA필름, 게다가 최근 들어 독립영화, 외국영화 구매에 활기를 띠기 시작한 소니 픽처스 클래식스, 파라마운트 클래식스, 폭스 서치라이트 등 스튜디오 계열들이다.

그러나 경쟁양상은 다소 안정되었는데, 예년같이 무작정 덤벼들어 가격경쟁을 하거나 난투극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전무하며 오히려 회사들이 자신들의 조건에 맞는 영화들을 집중공략해 거래를 도출해내는 약간의 담합성 분배가 이루어진 편. 많은 배급사 대표들은 올해 선댄스 출사표를 묻는 인터뷰에서 “정말 좋은 영화가 아니면 선댄스에서 한 작품도 안 건져도 상관없다”, “더욱 신중하게 고르겠다” 등등 스스로 현명해 보이는 전략을 내세우고 있는데, 그 뒷배경에는 <블레어 윗치> 같은 희대의 사건 정도를 제외하고는 전번적으로 최근 몇년간 실제 배급시장에서 침체일로에 빠진 인디 영화의 실속없음을 반추하고 있다는 사정이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이미 메인 호텔로 자리잡은 섀도 릿지 호텔에는 세일즈 및 프레스 오피스가 입주해 더이상 선댄스가 배급전초기지로서의 부업이 아닌 본업임을 실감케 했다.

사상 최고의 북미 데뷔전

선댄스로 간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올해 경쟁부문 바깥의 최고 화제작은 단연 이명세 감독의 한국산 액션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였다. 현란한 컷들이 서로 경쟁을 하는 듯, 갓 총신에서 뿜어져 나온 듯한 화려한 연출력을 보여주는 <인정사정…>은 마치 활기찬 기운으로 가득 차 진동하는 생명력과 ‘horn-made’의 떠들썩한 혼합을 보여준다. 약간의 내러티브 기술의 결함은 발견되지만 이 점은 오히려 이 영화가 절제된 시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관객을 들뜨게 하고 극장 안에 있던 수백명의 이방인들이 모두 공통의 현기증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기술만으로도 이명세 감독은 확실히 빛을 발하고 있다. 시사가 끝나고 나서도 조너선 드미를 포함한 그 이방인들은 파크시티 밤거리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이명세 감독 곁에서 영화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하길 멈추지 않았다. 도저히 모두가 쉽사리 발걸음을 뗄 수 없었던 거다." - <뉴욕 타임스> 2월2일치, 엘비스 미첼

독자에게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야 할 필자로서 반칙인 줄 알면서도, 비즈니스에 애국주의는 금물이라는 것을 명심하면서도, 한국영화의 해외 배급자로서 또 3년간 선댄스를 취재했던 필자로서 가장 뿌듯한 순간을 맞았다는 개인적 감상만은 용서를 구하고 글을 시작해야 할 듯하다.

1월28일 이집션 극장, 월드시네마 부문에 초청된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시사는 앞으로 우리 영화가 미국시장을 개척하는 데 여러 가지 희망적인 기대를 품게 해주었다. 이미 <인정사정…> 열기는 예정된 5번의 상영분이 영화제 초반 일찌감치 매진되는 바람에 29일 추가 상영이 경정될 때부터 심상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배급업자 및 기자시사 직후, 수석 프로그래머인 제프리 길모어에게 수많은 배급업자들과 기자들이 몰려와 공통으로 “도대체 이 사람이 어디서 나타난 거야?"라며 소개를 부탁했다는 후일담이다.

영화 시작 전 이명세 감독의 무대매너도 많은 호응을 얻었는데, 감독의 첫인사중, “어떤 이들은 내 영화를 보고 누굴 닮았다 어쨌다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나, 단 하나의 이명세일 뿐이다”라는 대목에서는 영화보기 전부터 젊은 관객으로 하여금 새로운 스타일을 기대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영화가 시작되고, 흑백톤의 강렬한 도입부를 거쳐 타이틀이 올라가자마자 장내에서는 일찍이 듣지 못한 환호성이 터지더니, 현란한 액션신이나 이명세 감독 특유의 상상력이 빛나는 왈츠 액션이나 박중훈의 코믹한 연기가 펼쳐질 때마다 한국에서와 비슷한 폭소가 터져나오고 주요한 장면마다 연신 박수가 터져나왔다. 특히 이날 시사에는 <뉴욕타임스> <LA 타임스>를 비롯한 쟁쟁한 필자들이 총출동했으며, <양들의 침묵> <필라델피아>의 명장 조너선 드미 감독이 상영장을 방문 크나큰 관심도를 짐작게 했다.

또한 상영이 끝난 뒤, 극장 앞에는 사인을 받으려는 인파와 미국 굴지의 에이전시 관계자들이 서로 명함을 내밀며 관심을 나타내는 진풍경을 연출, 제2의 오우삼을 기대해보기에 충분했다. 물론 이 모든 반응들이 실질적으로 어떻게 배급과 연결되고 이명세 감독의 국제적인 커리어에 받침이 되느냐가 앞으로의 과제다. 하지만 그동안 이곳에서 매년 1편 정도씩 구색 맞추기에 불과했던 우리 영화가 이제 <셸 위 댄스>나 <풀몬티> 같은 경우처럼 선댄스를 발판으로 본격적인 북미배급의 청신호를 감지했다는 것, 비록 특화한 영화제 관객이긴 하지만 많은 젊은 관객이 편안하게 웃고 환호하게 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이 한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이명세 감독 자체를 보고 차기작까지 감안한 배급사나 에이전시들의 접근 양상을 볼 때 이번 선댄스영화제는 <인정사정…>뿐아니라 한국영화 전체로도 값진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