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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정말 영화 잘들 찍는군
2000-02-15

<반칙왕>

지난 한해 아시아영화들을 둘러보고 다니는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 김지석씨에게 “요즘 동아시아영화들 어때요? 한국 같은 데 있어요?”하고 물어보았다. 그의 대답은 “없다”는 것이었다. “산업으로나, 작품수준으로나.” 80년대 중반 이후 작가 영화의 뉴 웨이브로 한때 한국 ‘작은영화주의자’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기도 했던 대만영화만 보더라도 지금 “근근이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국내산업은 거의 몰락했고 명망가 감독들이 외국 돈으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이다. 차이밍량은 미국 돈으로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고, 허우샤오시엔은 프랑스 자본으로 신작을 찍는데 ‘시나리오를 미리 내놓으라’는 주문을 이행하지 못해 촬영을 중지당했다는 것이다. 중국 역시 국가주도 영화산업이 민영화의 과도기에 극심한 자금난을 겪고 있고 독립영화작가들은 검열과 제작비 문제로 게릴라식 작업을 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바다. 일본 역시 메이저들은 생산활동을 중지했고, 과거와 같은 대작 제작시스템은 무너졌으며, 독립영화사들이 각개약진하는 상황이다. 일본영화에 밝은 <씨네21> 허문영 팀장도 “적어도 상업영화의 기획력에선 한국이 일본을 앞선 느낌이다”고 했다.

지난 1년의 한국영화 목록을 훑어봐도, 과연 문제작들의 홍수다. 이런 시절에 영화잡지를 만들고 있다니, 이런 행운이! <씨네21> 창간할 때만 해도 한국영화와 해외영화를 균형있게 다룬다는 편집방침을 세워놓고는 불안해했다. 영화주간지 지면을 채울 만큼, 작품이 생산될까. 할리우드 스타들이 아닌 국내 감독과 배우들이 대중의 관심을 얻을 수 있을까. 97년, ‘한국영화 르네상스’가 운위되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그것이 잠깐의 흥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산업기반의 허약함이나 시장의 한계가 제거된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산업이 소프트웨어를 기르기도 하지만 거꾸로 소프트웨어가 산업을 기르기도 한다는 것을, 지금의 한국영화는 입증하고 있는 것 같다. 소프트웨어나 산업을 만드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라는 사실 역시.

요즘 장르별로 재능들이 폭넓게 포진해나가는 걸 보면, ‘한국영화 르네상스’는 꽤 지속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나는 <반칙왕>을 보면서 정말 웃기는 감독 하나 나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김지운 감독은 한국영화에서는 대단히 낯선 컬트적 코미디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데, <조용한 가족>이 그 시범케이스였다면 <반칙왕>은 회심의 한판승부에 해당할 것이다. 이제 한국의 코미디 영화가 억지 슬랩스틱도 얄팍한 개그도 아닌, 삶의 단맛 쓴맛 신맛을 모두 버무려넣은 격조있는 희비극의 경지를 개척하고 있다. 김지운, 송능한, 장진 같은 감독들의 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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