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ovie > 무비가이드 > 씨네21 리뷰
파라다이스의 숨막히는 풍광, <비치>
김혜리 2000-02-01

타이타닉의 갑판에서 살얼음 낀 검은 바다로 떨어진 지 3년. 나른한 태양 빛에 온종일 희롱당하는 아름다운 해변을 지닌 남국에 봇짐 하나 달랑 메고 도착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인생을 선택하라”던 <트레인스포팅>의 이완 맥그리거와 비슷한 목소리로 뇌까린다. “내 이름은 리처드. 그것 말고 나에 대해 뭘 더 알 필요가 있나. 부모가 누군지 내가 어디서 왔는지 그런 건 다 부질없다.” 모름지기 영화의 쿨한 서두를 위해 이 정도 불친절은 감수할 수 있는 법. 영화의 전개와 함께 주인공을 더 깊이 알아갈 수 있다는 보장만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마약에 중독된 스코틀랜드 실업자 렌튼과 달리, 동남아 관광지의 미국인 배낭족이 삶의 진면목과 엑스터시를 맛보려면 약간의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속물’ 관광객을 벌레보듯 경멸하며 그들과 다르기 위해 애쓰는 리처드는 낯선 도전을 두려워 말자고 다짐하며 충동에 몸을 싣는다.

소품 <에일리언 트라이앵글>을 제외하면, 대니 보일-존 호지-앤드루 맥도널드 팀의 다섯 번째 영화이자 <이완 맥그리거의 인질>에 이은 할리우드 장편 2호인 <비치>는, 영국 작가 알렉스 갈란드가 쓴 동명 처녀작에서 나왔다. 책보다 영화를 많이 섭취한 탓에 펜을 달림과 동시에 머릿속에서는 영화를 찍는 세대의 작가 갈란드는 영화화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로케이션 물색에 나선 제작진은 타이 해안 푸켓 부근에서 벼랑과 산호초로 둘러싸인 작은 섬 피피레를 낙원으로 낙점했다. 야자수 100그루를 심고 사구를 낮추는 공사로 환경훼손 소송에 휘말리기도 한 <비치>의 제작에는 4천만 달러가 소요됐다. 그렇게 탄생한 영화 <비치>는 <푸른 산호초>류의 무인도 로맨스도 아니지만, <파리 대왕> 같은 원초적 본능의 연구도 아니다. 살이 이끄는 파라다이스는 아주 현대적인 쾌락 원칙으로 지어지고 운영되는 자생적 ‘클럽 메드’에 가깝다. 상어에 물린 한 멤버가 본토 병원에 가지 못하고 썩어가자, 그때까지 사랑의 히피 공동체처럼 보이던 낙원 주민들이 신음과 악취를 참지 못하고 그를 내다버린다. 휴양지란 본디 병자와 불행의 냄새를 견딜 수 없는 곳이므로.

고향에서 신랄한 이야깃꾼이자 스타일리스트였던 대니 보일은 갈수록 후자의 재능만 계발하고 있는 듯하다. 히치콕(<쉘로우 그레이브>)과 큐브릭의 <시계태엽장치 오렌지>(<트레인스포팅>)에 대한 은근한 경배를 거쳐 스크루볼 코미디의 전통(<이완 맥그리거의 인질>)을 끌어들였던 대니 보일은 <비치>에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을 비롯한 미국의 베트남 전쟁 영화를 뒤적거린다. 리처드라는 인물과 ‘코뮌’의 묘사에는 <택시 드라이버>와 <좋은 친구들> 풍의 붓질도 슬쩍 끼어든다. 다리우스 콘지의 카메라는 비취색 물과 진줏빛 해변이 맨살을 맞댄 비경과 본토의 밤거리를 맵시있게 오가느라 분망하고, <…인질>의 애니메이션 대신 비디오 게임 화면이 등장해 디카프리오를 ‘게임보이’ 캐릭터로 둔갑시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모든 미기(美技)는 서로 손을 맞잡고 영화를 일으켜세우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비치>는 주연 배우를 사랑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만족도의 편차가 큰 영화다. <바스켓볼 다이어리> 시기로 돌아간 디카프리오는 여기서 그를 일찍 알아본 올드팬들이 반길 만한 연기를 펼친다. <로미오와 줄리엣>, <타이타닉>에서 때없이 그의 눈에 우아하게 드리우던 앞머리를 걷어치운 그는, 검게 그을린 피부에 찡그린 콧잔등과 특유의 이마 주름살을 보여주기를 꺼리지 않는다. 한편 한쪽 벽을 디카프리오 사진으로 도배한 어린 소녀들은 극장 침투에 고심할 전망. <비치>는 미국에서 R등급, 국내에서 18세 관람가 판정을 받았다.

불꽃 같은 한철을 나고 크게 깨달은 표정을 얻어 귀향한 리처드의 배낭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이상향은 희생없이 지탱될 수 없다는 깨달음? 유토피아는 장소가 아니라 인생의 어떤 순간이기에 찾는다해서 도달하는 게 아니라는 각성? 동원된 호화판 재능과 로케이션에 견주어 <비치>의 자문자답은 좀 맥빠지게 들린다. 대니 보일 감독은 그 설명에 인색하게 굴며, 그나마 그가 들려주는 것도 우리가 이미 아는 이야기다. 디카프리오라는 근사한 동행과 파라다이스의 숨막히는 풍광에도 불구하고 <비치>의 여행이 영 찌뿌드드한 여독을 남긴다면 그 때문이다.

살 역의 배우 틸다 스윈튼

유럽영화계의 뮤즈, 살아 숨쉬는 공산주의자

관객에게 의미심장한 윙크를 보내던 <올란도>의 신비로운 그, 아니 그녀를 기억하는지. <비치>의 코뮌을 냉정히 다스리는 여인 살을 연기한 틸다 스윈튼(39)은 현대 유럽영화계가 배출한 가장 재능있고 아름다운 여배우의 한 사람이다. 또한 공언한 공산주의자인 그녀는 영화, 연극, 미술, 비디오의 장르를 개의치 않는 전위 독립 예술인들의 벗이기도 하다. 스코틀랜드 상류 가정에서 일급 교육을 받고 성장한 틸다는 남아프리카에서 구빈 활동으로 1년을 보낸 뒤 케임브리지에 입학했다. 정치학과 사회학을 전공한 재학 시절 이미 학생극 배우로 이름을 날린 그녀는 교통 사고로 뇌진탕을 일으킨 날도 무대에 선 열정의 연기자였다. 졸업 뒤 에딘버러의 트래버스극단과 로얄 셰익스피어 컴퍼니, <BBC> 드라마를 거친 스윈튼이 영화배우로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86년 <카라바지오>에서 퀴어 감독 데렉 자만을 만나면서부터. 이후 그녀는 감독이 AIDS로 작고한 94년까지 그의 전 작품에 출연해 자만의 뮤즈로 이름을 알렸다. 둘의 우정은 스윈튼이 레즈비언이라는 추측도 낳았으나, 대니엘 데이 루이스와의 로맨스에 얽힌 소문이 뒤를 따랐다.

틸다 스윈튼을 가장 널리 알린 영화는 버지니아 울프 원작의 <올란도>. 400년을 살며 남성과 여성을 오가는 인물에 관한 이 영화에서 스윈튼은 그녀의 모호하고도 매혹적인 육체로, 성별을 바꾸고 때로는 정물과 인간 사이를 오가는 마법을 부렸다. 그녀의 자웅동체적 매력은 92년 연극 <맨 투 맨>에서도 참전한 남편을 기다리다 마침내 남편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여인 역으로 연극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모차르트 역으로 이어졌다. 95년에는 런던 서페타인 갤러리에서 유리 상자 속에서 잠자는 살아 있는 설치물로 변신해 화제를 낳기도 했다. 어렵사리 국내 관객과 다시 만난 <비치>에서는 그녀의 재능이 ‘낭비된’ 인상이 짙어 아쉽다. 스윈튼의 다음 영화는 팀 로스의 감독 데뷔작 <전쟁 지역>이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