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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의 대사 시절도 있었어요, <불후의 명작>의 김여랑
사진 오계옥이영진 2001-02-06

“벗은 모습하고 옷입은 모습하고 어느 게 더 보기 좋아요?” 조금 머뭇하더니 진희가 인기에게 묻는다. 진희는 답을 바라는 게 아니다. 그냥 한번 심중을 떠보고 싶은 거다. 욕망은 종종 타인에게 향한다. 상대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 상대가 원하는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다면, 그것보다 행복한 일이 어디 있을까. 진희는 자신의 처지가 딱하다. 매번 문고리를 붙잡고 헉헉대야 하는 에로배우 진희는 인기 앞에서 “심중에 있는” 고백을, “끝끝내 못하고” 떠나간다. <불후의 명작>의 진희는 그런 인물이다. 김여랑(24)은 진희를 “매번 옷을 벗고 가성을 내지만, 머리로는 클래식을 듣는” 인물이라고 추측한다. 그게 진희의 삶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진희만 그럴까. 에로감독 인기와 대필 작가 여경은 어떤가.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것 아닐까. 김여랑과 진희의 공통점은 거기에 있다.

김여랑이 털어놓은 짧은 삶의 이야기에도 그런 흔적이 묻어 있다. 80년대 왕영은이 <뽀뽀뽀>를 진행하던 시절, 어린 꼬마 김여랑도 브라운관 안에 있었다. 눈에 띄는 아이는 아니었다. “얼떨결에 유치원 선생님을 따라간” 이 내성적인 아이는 되도록 뒷줄에 섰다. 무용을 배우던 중·고등학교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삼총사라 불리며 팔짱끼고 다녔지만, 팔이 길어 손만 뻗어도 예술이 되는 친구와 무용뿐 아니라 공부도 잘하던 친구 사이에 끼어, 콤플렉스를 안고 살았다. 대구 계명대학교에 진학해서 한국무용을 전공으로 택했어도 ‘내가 잘하는 건 뭘까’ 하는 물음을 달고다녔다. 95년 한 방송사에서 슈퍼탤런트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서, ‘혹시 길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고, 원서접수는 공짜라는 말에 황급히 가족사진을 잘라내 지원서를 냈다. 1차에 덜컥 붙으면서부터 진짜 고민이 시작됐다. “실기시험 이틀 전 방송사에서 나눠준 독백을 읽는데, 제가 한글을 그렇게밖에 못 읽는다는 게 한심하더라구요.” 전국 투어중이던 연극연출가를 찾아 지방까지 내려갔다는 그녀는 이틀 동안 속성 과외로 배운 몇줄 대사를 400∼500번 반복했고, 그대로 흉내냈다.

공채로 탤런트가 됐지만, 변한 건 없었고, 오히려 속상한 일만 늘었다. 새내기 시절, 단역 하나 배정받아 동기들의 부러움을 사면서 대본 연습실에 들어간 날도 그랬다. 대본의 마지막 장을 넘겼는데도 자신은 대사 한마디가 없었다. 의아해서 물었더니 ‘수다떨고 있는 친구 1, 2, 3’이라는 지문에 무언의 대사가 숨겨져 있었단다. 지방에서 촬영있는 날이면 새벽차 타고 내려가 부지런을 떨었지만, 도착하면 촬영이 시작할 때까지 반나절을 보내야 하는 때도 많았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김여랑에게 그 시간은 소중했다. “전엔 순전히 독불장군이었거든요. 그만큼 폐쇄적인 성격이었죠. 스무살될 때까지 고생 한번 해본 적 없다가 그렇게 부대끼고나니 오히려 사람들에게 애정이 생기더라구요. 그때서야 철이 든 거죠.” 김여랑은 방송사와 전속계약이 끝나자 무용을 그만두고, 서울예대 방송연예과에 입학했다.

“제 이름이요? 울림이야 좋죠.” 김여랑은 자신의 이름이 ‘너 여’자에 ‘사내 랑’자를 쓴다고 했다. “너는 사내다. 뭐 그런 뜻이죠.” 위로 언니만 둘이라 부모님이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름을 지었다는 것. 그 딸이 이번에는 <불후의 명작>에 출연한다고 하니 부모님도 반기는 눈치다. “딸이 영화에 나온다고 아버지께서 친구분들에게 자랑하시더라구요. 그런데 제가 맡은 역 때문인지 보지는 말라고 하시던데요.” 몇번씩 혼자 침대에 누워 연습하다가도 정작 촬영장에 가면 몰입이 쉽지 않았다는 김여랑은 알몸으로 출연하는 영화의 첫 장면을 찍으면서 NG가 날 때마다 “민망해서 죽는 줄 알았다”고 털어놓는다. 그래도 앞으로 그녀의 얼굴을 스크린에서 찾아볼 기회는 적지 않을 것 같다. “영화라는 게 같이 고생하고 나누는 작업이잖아요. 이젠 영화에 맛들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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