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춘향뎐>과 임권택 [1] - 제작기 ①

임권택 감독의 97번째 영화 <춘향뎐> 제작기

“영화감독이라는 것은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다. 아무리 도망가고 싶어도 자기 자리로 돌아와서 결국 그 삶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임권택 감독은 먼길을 돌아 <춘향뎐>의 입구에 도착했다. 스스로 휴지같다고 표현한 1960년대, 동시대인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애정을 드러낸 1970년대, 그리고 방황과 구도의 1980년대를 보낸 뒤, 우리 것의 뿌리를 탐사한 90년대의 끝자락에서 그는 마침내 불멸의 고전 ‘춘향뎐’과 만난 것이다. 이것은, 그러나, 회귀이면서 동시에 혁신이다. 서구적 영화문법을 훌훌 털어내고 그를 전율케 했던 판소리의 감흥으로 모든 형식적 규율을 제압하는 미학적 도전이다. <춘향뎐>은 그래서 임권택 영화 이력의 결산이라기보다, 새출발처럼 보인다. 막 데뷔한 신인감독처럼, 그는 솟구치는 흥분과 불안을 눌러가며 판소리 춘향가를 조심스럽게 영화로 옮기기 시작했다.

1998. 9.16

“춘향전 판소리로 영화할 거야”

김대승, 강경환씨 등 연출부를 타워호텔 커피숍에 모아놓고 임권택 감독이 운을 뗐다. 강경환씨는 황당했다. 보름 전에 <명성황후> 만들자고 제안했다가 “미친 놈, 시대극하면 그 많은 제작비를 누가 대냐”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춘향전은 더 구식 시대극 아닌가. 게다가 요즘 사람들이 듣지도 않는 판소리로 영화를 만든다니. 그러나 임 감독은 이미 영상으로 소리의 감흥을 극대화하겠다는 컨셉트뿐만 아니라, 시나리오는 소리꾼이기도 한 배우 김명곤씨(국립중앙극장장)가 맡고, 실제 춘향 몽룡 나이에 맞는 신인배우를 공채하며, 소리판과 극을 오가면서 영화를 끌고 가겠다는 구체적 구상까지 마친 상태였다. 임 감독은 <서편제> 만들 때 조상현씨 판소리 완창 춘향전을 들은 뒤, 윙윙거리는 그 소리를 5년 동안 달고 살았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결국 소리로 돌아왔다.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과도 말을 끝냈다. “당신이 춘향전 한다면, 내가 제작해야지.” 그렇기는 하다. 임권택-이태원 파트너십 아니면 이런 영화를 누가 엄두라도 낼까. 판소리보다 더 판소리 같은 영화, 대사도 동작도 리듬도 판소리 같은 영화. 평생 온건한 이야기체 영화를 벗어나본 적 없는 임 감독에게 이건 굉장한 미학적 야심이지만, 삐끗하면 추락하는 모험이다. “정말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게, 어떤 영화로 나올진 솔직히 나도 몰랐다.” 오래 품어온 프로젝트였지만, 백전노장도 긴장하고 있었다.

1998. 11.10

첫 헌팅 겸 시나리오 회의를 위해 임 감독, 김명곤씨, 연출부의 남원행. 임 감독의 일성, “지금까지 잘 쉬었다.” <춘향뎐>은 정말 시작된 것이다. 남원 민속촌에서 마치 춘향이 집 지으라고 기다려온 듯한 땅을 발견했다. 왠지 일이 초반부터 잘 풀린다. 시나리오 작업은 하루종일 판소리를 듣는 것. 거기서 이야기도 나오고 대사도 나오고, 빼고 넣을 부분도 결정된다. 더 중요하게는 판소리의 리듬을 모두가 몸에 익히는 것. 이제부터 판소리로 새고 판소리로 저무는 날이 끝도 없이 이어질 것이다. 연출부는 임 감독에게서 또 하나의 중요한 지시를 받아 두었다. 고증은 철저히! 임 감독은 세부의 리얼리티가 허술한 걸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다. <서편제>에서 떠돌이 의붓오누이의 옷에 구김자국, 땟자국 하나 없는 대목을 보면 아직도 부끄러워 도망가고 싶어한다. 연출부의 일은 춘향전의 시대적 배경인 조선 숙종 때 생활상에 관한 자료를 남김없이 찾아내는 것. 고증은 끝이 없다. 의상, 음식은 물론이고, 곤장의 재질, 동헌사령의 자세, 도깨비불의 색깔까지. 도서관 뒤지고 민속학자, 한학자 찾아다니며 자문구하는 일은 촬영 종료하는 날까지 멈추지 않았다. <춘향뎐>의 원형 옥사와 몽룡이 탄 아시아 나귀는, 잘 보이진 않지만, 연출부의 진한 땀이 배인 고증의 결실이다. 원형 옥사는 임 감독의 “내가 어릴 때 본 감옥은 TV에 나오는 네모반듯한 게 아냐. 둥근 거야”라는 증언에 따라 갖가지 자료를 뒤진 끝에 1900년대 초 둥근 공주 옥사 사진을 찾아내 고증한 것. 이몽룡이 타는 나귀는 ‘서산 나귀’라는 구절의 ‘서산’이 아시아지역을 뜻한다는 알고 수소문 끝에 벽제에서 찾아낸 귀한 아시아 혈통 나귀. 나귀(그의 이름은 삼돌이)는 나중에 사고도 치고 지지리 애도 먹이지만 <춘향뎐>에서 없어선 안 될 귀한 존재가 된다. 해를 넘겨 3월4일엔 이효정과 조승우를 신세대 춘향·몽룡으로 선발하고, 3월8일엔 미시령에서 눈 오는 하늘 첫 촬영.

1999. 5.12

그동안 띄엄띄엄 찍었지만 이날부터 <춘향뎐> 촬영은 본론에 접어들었다. 판소리의 적성가 대목이며, 백면 서생과 한량의 두 얼굴을 가진 몽룡이 광한루에 나가 그네 타는 춘향을 목격하는 운명적 장면. “정말 잘못 접어든 길이 아닐까.” 스탭들에게 내색은 못했지만 임 감독은 불안감이 떠나지 않는다. 준비가 부족했던 것 같지는 않은데, 스탭들 움직임도 연기자 동작도 전혀 성에 차지 않는다. 소리의 감흥을 영상으로 전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이기나 한 걸까. 정말 준비의 문제는 아니었다.

<춘향뎐> 촬영현장에는 다른 곳엔 없는 특이한 것이 몇 가지 있다. ‘난수표’라 불리는 책자도 그 중의 하나. 영화에 들어가는 판소리를 어절별로 끊어서 0.1초 단위까지 시간을 계산해놓은 이 책자는 현장에서 시나리오와 동등하게 중요한 책이다. 이만큼 세밀하게 계산하지 않으면 영상과 소리의 리듬을 일치시킬 수 없다. 대형 스피커도 눈에 띠는 현장 장비. 녹음부는 녹음장비보다 스피커를 먼저 챙겨야 하는 처지가 됐다. 촬영하는 시간 내내 판소리가 울려나오고 소리에 맞춰 또 난수표의 숫자에 맞춰 연기자들과 스탭은 자로 잰 듯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아직은 손발이 맞지 않는다. 하긴 0.1초 단위로 계산된 소리에 따라 카메라를 움직이는 전대미문의 작업을 누가 해봤겠는가. 정일성 촬영감독 외엔 아직 촬영부 스탭들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은 듯한 표정. 힘겨운 날이 이어진다. 5월21일엔 춘향의 그네 장면을 찍다. 높이 차야 하지만 어린 효정이 힘으론 만족할 만한 높이가 나오지 않아, 서커스단원도 부르고 여장남자도 시켜본다. 여러 앵글로 찍어두는 도리밖에.

1999. 6.5

방자가 춘향 부르러 뛰어가는 장면 촬영. 방자 역의 김학용은 창극계의 방자 전문 배우. 갖가지 종류의 <춘향전>에서 최고의 방자로 군림해왔다. 그러니, 소리에 귀도 몸도 트인 인물이라, 걸음걸이부터 소리와 척척 맞아들어간다. 그러나 아직 임 감독은 어떤 리듬으로 가야 할 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한박자 한박자까지 나눠서 리듬감을 살릴 것인가. 아니면 길게 잡아 동선의 흐름을 살릴 것인가. 임 감독이 먼저 선택한 길은 갖가지 앵글과 길이로 다양하게 찍어두는 것. 시험 편집에서 해답이 찾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방자 장면도 잘게 나누어 가능하면 많은 찍기로 했다. 그래서, 방자는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뛰어야 했다. 물론 소리의 장단과 리듬에 맞춰. 촬영현장은 거의 소리판이다. 밤낮으로 쉼없이 소리를 듣던 스탭들은 얼마간 싫증도 내다가 점차 중독이 돼간다. 한 스탭은 꿈에서 적성가를 불렀다고도 하고, ‘와락 뛰어’라는 판소리의 한 구절은 모두의 감탄사가 된다. 조상현의 명창에 묻혀 살며 거의 1년에 걸쳐 ‘난수표’를 만든 스크립터 정경진씨는 귀명창이 되어, 웬만한 창은 우습게 본다. 임 감독 영화이력에선 기록할 만한 또 한 가지 사건이 있다. 방자 장면 찍으면서 최초로 스테디캠이란 걸 써봤다. 물론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간 현란한 카메라 워킹을 즐기지 않았던 임 감독의 연출 스타일 때문. <창> 찍을 때 슈퍼크레인이란 걸 처음 봤다는 임 감독의 고정 스탭들은 스테디캠을 보고 매우 신기해했다. <춘향뎐>은 여러모로 임 감독에겐 도전적이다. 그러나 스테디캠으로 찍은 필름은 리듬감이 살지 않아, 결국 버려야 했다.

1999. 6.13

우울한 날. 편집을 해보니, 판소리의 흥이랑 영상이랑 전혀 맞지 않는다. 현장에선 정교하게 찍는다고 애를 썼는데, 편집본은 딴판이다. 임 감독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결론은 이랬다. “길게 찍자. 굳이 가사 하나하나에 맞출 게 아니라 판소리의 흥을 전체적으로 살리는 쪽으로 가자.” 대신 지금까지 찍었던 건 대부분 다시 찍어야 한다. 현장엔 얼마간 허탈한 기운과 함께, 이젠 소리의 리듬을 탈 수 있다는 자신감도 붙었다. 무엇보다 임 감독이 “이제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됐다”고 했다. 장마철도 닥쳐 한달간의 휴식이 6월17일 결정됐다. 한달 동안 시나리오 수정 작업, 세트 보완작업이 쉴 새 없이 이뤄지고 이효정은 거문고를 꽤 그럴 듯한 자세로 탈 만큼 배웠다. 이효정의 또다른 과제는 살빼기. 얼굴에 붙은 아기살을 빼기 위해 휴대전화기에 목표 kg까지 적어 둘 정도로 열성을 보였다. 조승우는 붓글씨 자세를 열심히 배웠다. 앞으론 이 어린 배우들의 짐이 상상 이상으로 무거워질 것이리라.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