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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석의 씨네콜라주] 씨네 링

“너 그 이야기 들어봤니? 얼마 전에 우리 학교 애들 셋이서 땡땡이 치고 섬에 놀러갔는데, 심심해서 여관방에서 잡지를 봤대.” “웃기네, 여관까지 들어가서 잡지는 뭔 잡지냐? 비디오를 보든지, 아니면 직접 만들든지.”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잡지를 다 보고 나니까 전화가 울리더란 거야. 그리고 음침한 여자 목소리로 ‘너희들은 일주일 뒤에 죽는다’고 하더래.” “무슨 미친 소리야?” “그래, 걔들도 딱 그렇게 말했대. 그래서 막 낄낄거리고 돌아왔는데, 글쎄 걔들 셋 다 일주일 뒤에 죽어버렸대. 그런데 그 얼굴이….”

편의점에서 물건을 고르던 링은 선글래스를 추켜세우고 급히 바깥쪽으로 걸어나왔다. 그리고 옆구리에 끼고 있던 종이봉투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려고 하는데, 다시 여자 아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저기, 링 아냐? 영화배우말야.” “뭐, 어 정말 닮았네.” “옛날에 잘 나가다가 음주 운전으로 사고내서 잡혀갔을 텐데.” “금방 나왔잖아. 그때 옆자리에 있던 남자가 재벌 누구라던데, 그 ‘빽’으로 나왔겠지.” 링은 봉투를 다시 옆구리에 끼고 황급히 밖으로 나왔다.

“엄마, 엄마.” 초인종을 누르니 벌컥 문이 열리고, 아들 돌이가 뛰쳐나왔다. 링은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다. “얘는, 누군지도 안 물어보고 문을 열면 어떻게 하니?” 링은 아들을 감싸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음을 굳게 먹고 슬픈 소식을 전하기로 했다. “있잖아. 엄마가 순이 누나네 갔다왔어요.” “응, 알아.” 아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순이 누나가 아주 먼 나라로 공부를 하러 갔단다. 그래서 이제 볼 수가 없게 되었어.” 돌이는 고개를 좌우로 도리질을 쳤다. “아니야. 아니야.” 링은 아직 죽음이라는 것을 모르는 돌이를 측은하게 여기며 품에 꼬옥 안았다. 그러자 돌이가 키득거리며 소리를 쳤다. “엄만, 바보야. 누나가 엄마한테 업혀 왔는데도 몰라? 그치, 누나!”

링은 이상한 소리를 하는 돌이를 재우고 안방으로 왔다. 그리고 봉투에서 문제의 잡지를 꺼냈다. ‘글쎄, 이모. 순이가 이걸 가지고 왔더라고. 여관방에서 우연히 주웠는데, 이모 옛날 사진이 있어서 가져왔다며.’ 순이 어머니는 자기 딸이 마지막으로 남긴 유품이라며 그 잡지를 전해주었던 것이다. 그 잡지는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너무나 선명히 기억이 났다. 전성기의 자신이 표지를 장식한 <씨네21>. 링은 조심스레 잡지를 넘겼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눈에 익은 장면의 사진이 펼쳐졌다. 그때 자신이 주연을 맡은 영화, <우물에 빠진 섬>의 촬영장소였던 우물가. 그녀는 그 물을 길어 머리를 감는 고혹적인 모습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사진 속에 자신은 없고 우물만 덩그러니 찍혀 있는 게 아닌가? 링은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런데 무언가 우물 위로 솟아올라왔다. 기다란 머리카락의 여인. 그녀는 천천히 우물 밖으로 나오더니, 가까이 가까이, 드디어는 잡지 밖으로 기어나왔다.

“역시 당신이었군요.” 링은 무릎을 꿇고 침착하게 말했다. “오년이나 되었지. 당신이 나를 우물에 빠뜨린 지.” “어쩔 수 없었어요. 당신이 촬영현장을 찾아온 돌이 아빠를 보았고, 그 스캔들이 터지면 나는 끝장이었으니까요.” “이것 봐. 우리 잡지는 그런 기사는 안 다룬다고 몇번을 말했어? 우리는 품격 있는 영화 잡지라고.” “이제 죄값을 달게 받겠어요. 저를 데려가세요.” “후후, 저주란 그렇게 풀리는 게 아니야. 이 잡지를 본 사람은 일주일 뒤에 죽게 되어 있다고. 저 예쁜 아이도 말이야.” 화들짝 놀란 링이 뒤를 돌아보니, 돌이가 또랑또랑한 눈을 하고 서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을 때 여자는 사라지고 잡지는 다시 덮여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절규하는 링의 눈물이 잡지 위로 똑 떨어졌다. 그러자 <씨네21>에서 ‘21’이라고 쓰여진 글자가 붉게 번지고, 그 아래 동그라미가 맺혔다. “씨네… 링! 일주일 동안 당신의 영화 인생을 책임진다. 죽고 싶지 않다면, 다음주에 또 사라. 정기구독 10명이면, 저주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등장인물

링: 한때 잘 나가는 신세대 여배우였으나, 음주운전사고로 퇴출. 재벌과의 혼외정사로 낳은 아들을 키우고 있다.

순: 링의 조카. 친구들과 섬마을에 놀러갔다가 저주가 깃들인 잡지를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