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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정치적 냉소의 생산양식

모 방송사의 TV 시사토론 프로그램을 봤다. 사회자가 스승으로 모시고 싶었던 몇 안 되는 분이지만 ‘토론’이라는 문화에 질려서인지 즐겨 보지는 못했다. 시사 프로그램 진행을 맡은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정치계에 입문하는 모습을 봐왔기 때문에 부러 피했는지도 모르겠다(선생님, 무례와 망발을 용서하시옵소서). 낯익은 얼굴은 토론자 중에도 있었는데 유독 한 인물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순진하던 시절 만인의 선망 대상인 ‘대학입시 전국 수석’이라는 영예를 차지했던 인물이자 지금은 ‘스타급 변호사’로 잘 나가고 있는 인물이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걸쳤다’는 찬란한 이력도 붙어다닌다. 그와 함께 아주 잠깐 ‘세미나’라는 것을 했던 아스라한 기억도 떠올랐다. 물론 그때의 꾀죄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말쑥한 정장 차림에 무스를 발라 머리에 힘도 주었다.

그의 모습을 주목한 이유는 며칠 전 그를 ‘젊은 철새’라고 묘사한 일간지의 시사만평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름의 이유는 있겠지’하는 마음으로 그의 주장을 경청했다. 하지만 아무리 유심히 들어도 그의 주장은 ‘낡은 정치구조의 개혁… 3김 정치 청산… 어쩌고저쩌고’ 이상이 아니었다. 희한한 것은 상투적 메시지라도 적당한 볼륨의 리듬감 있는 달변에 용해되니 그럴듯하게 들려 왔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인물의 생김새를 다시 보게 되고 입모양, 표정, 손짓 등에도 주목하게 됐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왜 이렇게 됐지’하다가 깨달은 점이 있다. 영상매체에서 중요한 것은 메시지에 담겨 있는 내용이 아니라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라는 점을, 메시지보다는 사운드가, 문자적 내용보다는 물리적 효과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후로는 내가 TV를 보는 건지, TV가 나를 보는 건지 헷갈리는 상황, 듣는 둥 마는 둥한 상황이 나를 맞이했고, 그때부터 생각이 샛길로 빠졌다. 만약 이번 총선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젊은 피’가 대거 당선된다면 ‘386 세대’가 정치 권력에 좀더 근접하겠지. 이제까지는 뒤가 구리고 아는 것도 없는 인간들이 이것저것 다해먹으니까 열불이 났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거야. 젊은 피들이야 머리도 좋고 말도 잘하니까 높은 자리에 앉아 있어도 불만 표하기 힘들 걸. 예전에 탄압받았던 경험을 통해 오버하지 않고 예봉을 피하는 재주도 습득했고, 게다가 요즘 강남 룸살롱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벤처 기업인들도 ‘광의의’ 386들이니까 돈줄도 빵빵하겠지(그러고 보니 청량리와 미아리는 작살내도 강남 룸살롱과 호스트바 단속한다는 말은 없네. 거기가 진짜라던데. 대처 총리 닮은 용모에 이름도 ‘강자’인 분이 힘 좀 더 써야할 텐데. 아이구 또 샜다). 386 이하의 애들이야 DDR, 스타크래프트, <접속>, <쉬리>, 핑클 같은 것만 제때제때 공급해주면 대체로 만족하는 애들이니까 특별히 반발도 없을 거야…. 이런 것들도 즐기는 건 젊은애들이지만 만드는 건 386들이지 아마. 수구세력이 만만치는 않지만 좃선운동도 가열차게 전개되고 있으니 대세를 거스를 순 없을 거야. 386 만세!

다음날 음악 공연에 가서 ‘정치’라는 단어는 외국어 취급하는 젊은애들의 열광을 본 뒤 전철을 타러 승강장에 내려왔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라서 다음 차가 오려면 적잖은 시간이 남아 있어서 멀리 있는 신문 가판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유리창 속에 놓인 주간신문 1면에 “낙선운동 배후에 청와대 수석 모씨가 있다”는 타이틀이 보였다. 설마. 하지만 당연히 지지했던 낙선운동에 대해 묘한 호기심이 작동했다. 그 주간지가 유언비어를 양산하는 옐로저널리즘의 상징임을 알면서도 왜 이러지? 못된 놈. 허나 한국정치의 오묘한 조화 속을 내 어찌 알리오. 이래봤자 냉소주의 이상이 아니겠지만 나로선 정말 역부족이다. 포기하자.

집에 돌아오니 집사람(아니 바깥사람)이 “아버님께서 전화하셨다”고 말문을 연다. “애비의 고등학교 후배인 김아무개한테 연락해서 공천 하나 따봐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는 아내가 “아버님은 아들을 그렇게 모르세요?”라고 반문했더니 “그러니까 너한테 전화하는 거 아니냐”고 하셨단다. “이번 총선에서 나이든 것들은 다 떨어진다”는 것이 아버지의 ‘정세분석’이었다. 명색이 ‘자민련 당원’인 분이 저런 말씀을 하시는 걸 보면 낙선운동의 효과가 없지는 않나 보다. 설날에 세배 드리러 갈 때쯤이면 생각 바뀌셨겠지. 아니면, 전셋값도 왕창 올랐는데 눈 딱 감고 연락해서 팔자 한번 고쳐봐,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