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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보다 아름다운 세계, 그 미지와의 조우
2001-02-07

설이 즐거워지는 걸작 애니메이션 14편

특집/ 설 비디오 가이드

해마다 최소한 3∼4일씩 놀 수 있는 설 연휴는 작심하고 비디오 가게를 섭렵하기 좋은 시기이다. 올해는 한번 애니메이션으로 설 연휴를 즐기면 어떨까? 애니메이션 비디오라고 하면 흔히 디즈니와 일본 애니메이션을 떠올리는데 살펴보면 그외에도 볼 만한 작품들이 많다. 그래서 이번에는 평소 극장에서 접하기 힘든 단편이나 유럽 애니메이션 비디오들을 골랐다. 모두 국내에 출시된 작품들. 그동안 지면으로만 소개된 단편들이 궁금했던 팬들이나,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이번 기회에 한번 아래 작품에 도전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장인의 손길, 작가의 숨결

<위대한 강> (Le Fleuve aux Grandes Euex)

(2000년 출시, 24분, 라바필름(02-765-8312))

현존하는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중 한명인 캐나다 프레데릭 벡의 93년 작품. 캐나다 퀘벡 지방을 흐르는 센트로렌스 강을 중심으로 그곳의 역사와 자연을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그려냈다. 이미 <크랙>(1981)과 <나무를 심는 사람>(1987)으로 명성을 얻은 이 노 작가는 이전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혼자 5년여 동안 수만장의 그림을 한장 한장 손으로 제작하는 정성을 보였다. 반투명 셀에 파스텔이나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그의 작품 스타일은 부드러우면서도 섬세한 필치가 매력이다. 하지만 비슷한 화풍의 레이먼드 브릭스가 비교적 온화한 이야기를 하는 데 반해(물론 <바람이 불 때>는 예외), 프레데릭 벡은 담담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환경보호와 반핵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24분의 짧은 시간 속에 수백년 세월을 담아낸 이야기 솜씨도 탁월하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강의 모습과 동물, 역사적 사건들은 현장을 수십 차례의 항공촬영과 자료조사를 통해 꼼꼼하게 재현한 것들이다. 깊은 밤 느긋한 마음으로 따스한 차 한잔과 함께 본다면 그동안 각종 대중매체의 현란한 시각적 자극에 찌들었던 심성을 해독할 수 있는 훈풍 같은 작품이다.

- 한마디 더: 프레데릭 벡의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은 음악을 맡은 노르만 로제. 퀘벡 지방의 민속음악을 적절히 사용하는 그의 음악은 깊이와 활기를 동시에 갖추고 있다. <위대한 강>의 영어판 성우는 배우 도널드 서덜런드가 맡았다.

<우리 할아버지>(Grandpa)

(99년 출시, 25분, 인피니스(02-2263-3233))

존 버닝햄의 동명 그림책을 소재로 제작된 작품. 레이먼드 브릭스 원작의 <스노우맨> <파더 크리스마스>와 마찬가지로 어린이를 위한 동의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사실 메마른 도시에 살고 있는 성인을 위한 작품이다. 89년 감독 다이앤 잭슨, 음악 하워드 블레이크 등 <스노우맨>의 제작진이 손을 잡고 유니세프의 지원하에 제작됐다. 종이와 색연필의 질감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영상이나 자유자재로 펼쳐지는 환상적인 이야기 세계는 <스노우맨>과 닮았다. 인생의 황혼기를 맞은 할아버지가 손녀의 방문을 맞아 잔잔하게 옛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두 ‘조손’은 환상적인 동화 속 세계를 여행한다. 시공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펼쳐지는 이야기는 특별한 줄거리를 지니고 있지 않지만, 하나하나 시적 정감이 넘친다. 급하지 않은 어조로 잔잔하게 이야기를 펼쳐나가다 마지막 인생의 의미를 곱씹게 하는 결말이 찡하다. 이 작품을 보고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다면 정말 심각하다.

- 한마디 더: <스노우맨> <산타 할아버지의 휴가> 등을 감독한 다이앤 잭슨의 매력은 애니메이션의 장점을 한껏 살린 현란한 카메라 워킹에 있다. 하지만 더 좋은 점은 그러한 테크닉이 단순히 시각적 잔재미를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야기에 훈훈한 습기와 여유를 준다는 점이다.

<스노우맨>(Snowman)

(99년 출시, 25분, 인피니스(02-2263-3233))

해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어느 채널이건 꼭 방송 전파를 타는 이 작품도 비디오숍에 가면 만날 수 있다. 굳이 성탄절이 아니더라도 겨울철에 보기 좋은 작품이다.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영국의 동화작가 레이먼드 브릭스의 동명 원작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는데 단편으로는 드물게 200만달러의 제작비가 든 ‘대작’이다. <스노우맨>의 탁월함은 음악과 영상의 절묘한 조화에서 찾을 수 있다. 화려한 원색을 배제하고 은은한 파스텔톤을 살린 그림은 만들어진 지 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신선하고 매력적이다. 시적 운율마저 느끼게 하는 눈사람의 움직임은 디즈니 작품에서도 볼 수 없는 <스노우맨>만의 매력이다. 그런 리듬감 넘친 움직임은 후반부 북극의 눈사람들이 단체로 춤을 추는 장면에서 돋보인다. 소년과 눈사람이 북극으로 날아가는 장면 역시 애니메이션 사상 손꼽는 명장면 중 하나. 미야자키 하야오가 공중 비행신의 대가라고 하지만, 이 작품의 감독 다이앤 잭슨 역시 하늘을 나는 자유로움을 그리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산타 할아버지의 휴가>에서도 느낄 수 있다).

- 한마디 더: <스노우맨>의 인기 요인 중 하나는 하워드 블레이크가 만든 음악. 최근 국내에 오리지널사운드트랙이 출시됐다. 주제곡 <워킹 인 디 에어>는 원작에서는 피터 오리라는 보이 소프라노의 청아한 음색으로 들을 수 있는데 조지 윈스턴의 앨범 <포레스트>에서도 이 곡을 피아노 연주로 들을 수 있다.

<산타 할아버지의 휴가>(Father Christmas)

(99년 출시, 26분, 인피니스(02-2263-3233))

<스노우맨> <바람이 불 때>와 함께 레이먼드 브릭스의 애니메이션 3부작으로 꼽히는 작품. 동화와 영화 속에서 스트레오타입화된 산타클로스를 새로운 시각에서 그린 유쾌한 소품. ‘산타 할아버지는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뭐 할까’라는 자연스럽고 천진스런 의문에서 출발한 이 작품은 그림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산타 할아버지의 묘사가 돋보인다. 크리스마스가 끝난 뒤 유럽의 나라를 돌아다니며 여행을 하고, 때로는 풀장에서 느긋하게 선탠을 하는 산타의 모습은 “귀엽다”는 표현이 알맞을 정도로 돋보인다. 특히 산타 할아버지가 라스베이거스에서 도박도 즐기고, 여자 무용수들의 화려한 레뷔쇼를 보면서 좋아하는 장면은 화장실도 가지 않는 것처럼 묘사되는 동화 속 모습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인간적인 산타’에 대한 묘사는 크리스마스 때 선물을 배달하면서 방풍용 고글을 쓰는 모습이라든가 굴뚝을 들어갈 때 쩔쩔매는 묘사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선물을 나눠주다가 사슴들과 함께 지붕에서 샌드위치와 차를 마시면서 잠시 휴식을 갖는 장면은 원작자와 감독의 삶에 대한 따스한 묘사 때문에 볼 때마다 가슴이 따스해진다.

<피리부는 목동>

(2000년 출시, 19분, 라바필름(02-765-8312))

대학의 애니메이션 영화제나 시네마테크에서 단골 상영작으로 인기가 높았던 작품. 중국 수묵 애니메이션의 걸작으로 불리는 작품으로 상하이 스튜디오의 테웨이 감독이 63년 제작한 19분21초짜리 작품. <피리부는 목동>이 가진 큰 의미는 서구적인 회화 기준에서 벗어나 동양화의 섬세한 ‘농담’과 여백의 미를 애니메이션에 재현했다는 데 있다. 발표 당시 서구 애니메이션이나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는 볼 수 없는 시적인 영상과 우아한 캐릭터의 움직임이 많은 평론가로부터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는 극찬을 받았다.

애니메이션 하면 일본이나 미국, 또는 유럽의 작품만을 생각하는 이들에게 “아니 그곳에도 애니메이션이 있었나?”라고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는 작품이다. 만들어진 지 40년이 다 됐지만 지금 봐도 늘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내용은 무척 단순하다. 아니 특별히 줄거리랄 것도 없다. 소치는 목동의 한나절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작품을 추천하는 것은 재미있는 사건과 줄거리를 능가하는 탁월한 ‘볼거리’ 때문이다. 초반부에 소가 강물을 건너는 장면은 테웨이 감독의 연출감각을 엿볼 수 있는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다. 기존 서구식 애니메이션 표현과는 확실하게 다른 영상은 서구 애니메이션 작가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어 70년대 중국 애니메이션 붐을 불게 했다.

아이들용? 철없는 어른용!

<만화의 세계1, 2> <희망으로 그리는 세계> <우리가 다시 그려요> <배고픈 애벌레> <피브 앤 퍼그>

<만화의 세계1, 2>

(99년 출시, 1편: 48분 2편: 90분, KJ엔터테인먼트(02-548-6191))

애니메이션의 넓은 세계를 접하고 싶다고 해도 국내에서 미국이나 일본이 아닌 나라의 단편을 구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찾아다니다 보면 이런 비디오도 만나게 된다. <만화의 세계>는 캐나다국립영화제작소(NFBC: National Film Board of Canada)에서 활동하는 애니메이션 작가들의 대표작 모음집이다. 이슈 파텔, 캐롤라인 리프, 코 회드만, 자크 드로앵, 조지 웅가, 게일 토마스 등 NFBC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접할 수 있다. NFBC의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꽤 많은 작품이 국내에 소개됐는데, 작가들의 지명도만 따진다면 단연 이 비디오가 최고이다. 현란한 색채의 향연인 이슈 파텔의 <파라다이스>, 페인트 온 그래스로 제작한 캐롤라인 리프의 <거리의 소년>, 컷아웃 기법으로 만든 코 회드만의 <찰스와 프랑수아>, 핀 스크린 기법을 이용한 자크 드로앵의 <밤의 요정> 등 셀애니메이션이 아닌 애니메이션의 다양한 기법을 접할 수 있다. 1편은 각 작가들의 제작과정을 담은 메이킹 필름, 2편은 작품을 담고 있다. ‘애니에는 뭔가 색다른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꼭 보는 것이 좋다.

- 한마디 더: 어쩌다가 이 단편 걸작집이 제목이 ‘만화의 세계’가 됐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희망으로 그리는 세계>

(99년 출시, 80분, KJ엔터테인먼트(02-548-6191))

유니세프가 어린이의 권리 선포를 기념해 NFBC와 공동으로 제작한 작품집. 피에르 M. 트뤼도, 미셸 쿠르노이에, 클로드 크롤디에, 유진 페도렌코 등이 참여했다. 전체적으로 10분 내외의 소품들로 구성됐다.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췄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만화의 세계>보다 부담없이 볼 수 있다. ‘코코의 산수’, ‘사랑의 띠’, ‘TV와 춤을’, ‘후나스와 리사’, ‘어린 예술가’ 등 모두 13편의 단편이 2개의 비디오에 수록돼 있다. 이중 부엌의 각종 기구를 통해 음악적 영감을 얻는 한 소녀를 그린 ‘어린 예술가’가 교육방송 등을 통해 비교적 많이 알려졌다. 이 단편집에서 작가들이 말하는 것은 어린이들은 결코 미성숙된 인격이 아닌 어른과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 어린이들에게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식의 훈계나 교훈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교육, 가족 등 그들이 당연히 누려야할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이 단편집은 ‘철없는’ 어른들을 일깨우는 성인들의 교훈서이다.

- 한마디 더: 여기에 수록된 ‘어린이를 위하여’를 제작한 유진 페도렌코는 2000년 <백치들의 마을>을 발표해 안시와 히로시마에서 수상한 스타급 작가이다.

<우리가 다시 그려요>

(2000년 출시, 108분, 라바필름(02-765-8312))

단편 애니메이션을 찾을 때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쪽도 한번 눈여겨봐야 한다. 제목만 보면 아이들의 그림 그리기 교재 같은 <우리가 다시 그려요>도 그런 점에서 ‘숨은 보석’과 같은 비디오이다. 원래 이 비디오는 어린이를 위한 교육용으로 제작한 것이다. 2개로 구성된 비디오에 각각 6편씩, 12편의 단편 애니메이션이 수록돼 있다. 이름만 본다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중견 작가 폴 드리센을 비롯해 재닛 펄만, 브제니슬라브 포아르 등의 작품 중에서 어린이들과 삶과 사회의 다양한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들로 골랐다. ‘하늘의 제왕’, ‘너만 먹니?’, ‘행복했던 가족’, ‘존 베일리의 불장난’, ‘도둑맞은 꿈’, ‘5분 남으셨습니다’, ‘제발 그만’, ‘맛있게 드세요’, ‘파블로프의 쥐’ 등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토론용으로 선정돼 주제가 선명하다. 삶의 의미를 묻는 작품에서 사회에서 언론이 가진 기능, 인간의 사회성, 생존의 의미, 흡연 등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다.

- 한마디 더: 이 단편집은 다른 비디오와 달리 특이하게도 작품을 보고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교재가 첨부돼 있다. 굳이 아이들이 없더라도 비디오와 책을 함께 보면 어른들도 공부가 된다.

<배고픈 애벌레>(The Very Hungry Caterpillar)

(99년 출시, 31분, 인피니스(02-2263-3233))

아이들과 함께 보기엔 딱 좋을 깜찍한 작품. 93년 더 일루미네이트 필름(The Illuminated Film)에서 제작한 ‘배고픈 애벌레’와 다른 단편들을 모은 작품이다. <배고픈 애벌레>는 원래 70년 에릭 카일이 발표한 동화책으로 전세계적으로 1천만부 이상이 팔린 베스트셀러. 자연 친화적인 내용과 풍부한 감수성을 지녀 영국에서는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앞서 소개한 단편집과 달리 아이들이 친근감을 느낄 수 있도록 캐릭터나 이야기에 멋을 부리지 않은 것이 특징. 화려한 작가적 완성도보다는 아이들의 시각에서 사물을 바라보았다. 그만큼 이야기 구조가 단순하고 천진스럽다. 기법면에서도 장인적인 현란한 테크닉의 구사를 자제했고, 색채나 배경도 단순화했다. ‘배고픈 애벌레’를 비롯해 ‘아빠 저 달 좀 따주세요’, ‘벙어리 귀뚜라미’, ‘샘많은 카멜레온’, ‘음악으로 세상을 그려요’ 등이 수록돼 있다.

<피브 앤 퍼그>

(97년 출시, 70분, 새롬엔터테인먼트(02-518-3373))

아드만 애니메이션은 미국과 일본을 제외하고 국내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애니메이션 ‘브랜드’이다. <피브 앤 퍼그>는 아드만의 팬이라면 꼭 챙겨볼 것을 권할 만한 작품이다. 이 비디오는 피터 로드와 닉 파크가 아드만 애니메이션을 세운 뒤 발표한 초기 작품들을 모은 작품집이다. 아드만에 첫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안겨준 ‘동물 인터뷰’(Creature Comforts)를 비롯해 ‘왕자와 거지’, ‘아담’, ‘사랑이란’ 등 9편의 단편이 수록돼 있다. 동물원 우리 속에 사는 고릴라, 사자, 북극곰 들을 통해 인터뷰 형식을 도입한 ‘동물 인터뷰’는 아드만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걸작. 애니메이션의 완성도가 꼭 많은 움직임과 액션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인터뷰를 할 때 동물들의 표정이나 동작들은 감독들의 재치를 엿볼 수 있는 부분. 안경을 닦거나 옆사람을 흘낏 보는 등 작은 동작이지만 그 타이밍과 추임새가 점토로 만든 인형인지 아니면 TV에서 보는 거리의 시민인지 혼동할 정도로 자연스럽다. 과격하지 않고 적당한 풍자와 재치, 평범한 삶에 대한 예찬을 담은 아드만의 작품 세계는 이 작품 외에 ‘사랑이란’과 ‘왕자와 거지’에서도 만날 수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아담’. 아주 작은 소품이지만, 아기자기한 익살이 그만이다.

- 한마디 더: 출시된 지 3년밖에 안 됐지만 비디오숍에서 찾기는 그리 쉽지 않을 듯.

애들은 가라. 뭔가 다른 애니메이션의 세계

<톰 섬의 비밀모험> <샌드맨> <이온 플럭스>

<톰 섬의 비밀모험>(The Secrect Adventure of Tom Thumb)

(2000년 출시, 70분, 새롬엔터테인먼트(02-518-3373))

<톰 섬의 비밀모험>은 클레이 애니메이션과 오브제, 픽실레이션 등 다양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기법들이 사용된 작품이다. 이야기는 누구나 잘 알고 있듯 엄지손가락만한 크기로 태어나 ‘톰 섬’이라 이름이 붙은 아이가 세상에 나와 자신의 신체적 특징을 활용해 펼치는 무용담을 그린 영국 동화이다. 그러나 극본, 디자인, 연출, 편집 등 1인4역을 한 데이브 보스윅은 작품의 배경을 시대가 불분명한 어둡고 음침한 마을로 바꾸었다. 주인공 ‘톰 섬’은 민머리에 툭 튀어나온 눈을 가진 그로테스크한 모습이다. 픽실레이션(사진과 같은 정지된 영상을 이용한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처리한 ‘톰 섬’의 부모를 비롯해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땀이 번들번들한 얼굴에 피곤하고 옹색한 몰골을 하고 있다. 어느 한 구석, 동화적인 안온하고 푸근한 분위기가 없는 이 작품의 매력은 이런 기본 틀 속에서 역설적으로 가족의 사랑과 생명의 존귀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외모만 봐서는 자식에 대한 애정과는 담을 쌓은 것 같은 ‘톰 섬’의 부모들이 자식에게 보여주는 무조건적인 애정과 헌신은 ‘위악적인’ 영상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동화의 틀을 빌려 현실과 잘 구별이 안 되는 ‘악몽’을 그리고 있는 보스윅의 작품 세계는 같은 영국의 선배 작가인 퀘이 브러더즈의 세계관과 일맥상통함을 느낄 수 있다.

- 한마디 더: 작품에서 픽실레이션으로 등장하는 배우들 중 상당수는 이 애니메이션의 제작 스탭이다.

<샌드맨>(Sand Man)

(2000년 출시, 새롬엔터테인먼트(02-518-3373))

<톰 섬의 비밀모험>이 동화 속 세계를 현대적인 분위기로 비틀었다면, <샌드맨>은 중세 유럽의 괴담에서 느낄 수 있는 으스스한 분위기를 환상적으로 펼친 작품이다. 서구 전설에 등장하는 샌드맨은 잠을 재우는 귀신. 우리의 ‘삼신할미’처럼 친근한 대상이다.

그런데 사뭇 낭만적인 존재인 ‘샌드맨’을 감독 폴 베리는 그로테스크하고 공포스런 존재로 바꾸었다. 팀 버튼 영화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세트로 작품의 음산하고 몽환적인 세계를 강조하고 있다. 기형적으로 일그러진 문, 딥 포커스로 촬영해 원근감이 왜곡된 집안, 그리고 앙각으로 촬영해 등장인물이 주는 중압감을 강조한 카메라 앵글 등은 <노스페라투> <칼리가리 박사의 정원> 같은 무성영화 시대 작품을 연상케 한다.

섬세한 칼 맛을 느끼게 하는 인형의 모습과 간결하지만 어색함이 거의 없는 동작은 전통을 가진 유럽 인형 애니메이션의 힘을 느끼게 한다. <톰 섬의 비밀모험>과 함께 한 비디오로 출시됐다.

- 한마디 더: 많은 애니메이션들이 대개 캐릭터에 관객의 시선을 모으는데, 이 작품은 세트의 양식미를 보는 것도 감상법의 하나이다.

<이온 플럭스>(Aeon Flux)(1996년, 미국, 120분)

(99년 출시, 120분, CIC)

이온 플럭스라는 미래사회의 여자 테러리스트가 등장하는 독특한 양식의 SF애니메이션. 감독과 캐릭터 디자인을 맡은 피터 정은 한국 출신의 세계적인 애니메이터이다. 월트 디즈니가 세운 ‘캘리포니아 아트스쿨’에서 애니메이션을 공부한 그는, 디즈니, 한나 바버라 등의 프로덕션을 거쳤는데 우리에게는 마이클 조던이 등장하는 나이키의 애니메이션 CF로 알려졌다. 이후 <팬텀>(국내에서도 방영)의 원화 디자인을 맡은 뒤 미국 음악전문 케이블 채널 MTV의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인 <리퀴드 텔레비전>에 <이온 플럭스> 시리즈를 발표했다. 여기 소개하는 것은 7편의 단편을 모은 작품집.

SF양식을 빌렸지만 <이온 플럭스>는 쉽게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작품이다. 독특한 메커닉 디자인과 마치 오슨 웰스를 연상케 하는 딥포커스의 카메라, 인체를 극단적으로 묘사한 그의 캐릭터는 잘 정제된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나 미소녀류의 일본 애니메이션과는 또다른 느낌을 준다. 이야기의 전후도 모호하고 인과관계도 뚜렷하게 설명하지는 않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늘 강박관념과 과도한 섹스어필, 미래의 희망과 꿈도 없고, 그렇다고 절망도 없는 마치 무기질 같은 세계가 백일몽처럼 펼쳐진다. 보면서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려고 하다가는 오히려 다 놓칠 수 있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구도와 역동적인 주인공의 움직임, 기발한 아이디어의 메커닉 디자인을 감상하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

- 한마디 더: 우리말 자막이 있지만 워낙 줄거리의 인과관계가 모호해 이해하는 데 무척 힘들다. 자막내용 고민하느니 차라리 그림만 보는 게 오히려 작품의 진가를 파악하는 데 더 쉽다.

비디오 하나 더!

<요괴인간>

‘난데없이 웬 <요괴인간>’ 하겠지만 정확히 국내에 94년에 출시됐다. 요즘 엽기나 공포물이 유행이지만 애니메이션에서 엽기로 따진다면 이 작품이 선조이다. 67년 지금은 없어진 동양방송(TBC)이 일본에 합작으로 세운 애니메이션 제작사 ‘제일동화’에서 만든 TV시리즈이다. 70년대 TBC를 통해 국내에 소개되면서 정말 ‘한 인기’를 모았던 작품.

‘구하지도 못할 케케묵은 작품을 왜 소개하느냐’고 말할 수 있지만, 의외로 중고 비디오숍에 꽤 있다. 물론 유려하고 화려한 애니메이션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찾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30대 이상 애니메이션 마니아 중 “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후렴구가 인상적인 음산한 분위기의 주제가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색다른 추억에 잠길 수 있다.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키기 위해 연구하던 한 과학자의 손에 의해 태어난 세 요괴. 벰, 베라, 베로. 비록 모습은 흉측하지만 심성만은 바르고 올바른 그들이 권선징악의 길에 나선다. 언젠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그림이나 전개는 엉성하지만 지금 봐도 기가 막힌 것은 60년대에 어떻게 애니메이션에서 이런 ‘엽기적인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에피소드마다 독특하다. 특히 유럽의 괴담을 일본적인 상황에 맞게 적당히 각색한 것과 좀비, 해골, 귀신, 유령, 늑대인간 등 괴기물의 각종 주인공들을 아이들 대상의 애니메이션에 등장시킨 점이 놀랍다. 물론 지금 이런 내용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면 영락없이 언론에서 집중 성토를 당하기 쉽다.

김재범/ 동아닷컴 기자oldfie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