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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뚝뚝한 떡갈나무의 가지를 흔드는 산들바람, <애나 앤드 킹>
김혜리 1999-12-28

냉정한 역사가들은 뮤지컬과 네편의 영화에 원안을 제공한 애나 레노웬스의 회상록을 한 고독한 여인의 분홍빛 몽상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다고 이미 감정한 바 있다. 그러니 이 로맨스가 실화인가는 따로 묻기로 하자. 무엇보다 <애나 앤드 킹>은 두 사람의 강한 인간, 온 세상을 짊어진 남자와 자기 안에 하나의 세계를 가꾸어 온 여자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다. 무뚝뚝한 떡갈나무의 가지를 흔드는 산들바람. 우리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도 그런 커플을 보았다. 마리아가 폰 트랩 가에 노래를 가져다 주었다면, 시암의 왕궁에 당도한 애나의 트렁크에 들어 있었던 것은 자애와 용기다.

말레이시아 로케이션과 런던 스튜디오를 오가며 촬영된 2시간이 훌쩍 넘는 <애나 앤드 킹>은 호화 양장본의 증보판이다. 앤디 테넌트 감독이 생각한 이 리메이크의 존재이유는 무엇보다 미장센과 색채의 보강이었던 모양. 첫 그림부터 스크린은 데이비드 린의 <인도로 가는 길>을 상기시키고, 머천트 아이보리 프로덕션의 ‘전속 재단사’로 유명한 제니 비반이 지은 옷가지들은 평범한 블라우스부터 궁중 복식까지 시각적 포만감을 안긴다. 하지만 구경거리가 많은 관광 열차가 그렇듯, 영화의 속도는 굼뜨다. 종반에 삽입된 후궁 텁팀의 비련에 관한 하부 플롯도 거치적거린다.

56년작 <왕과 나>에서 분격을 샀던 인종주의와 성 차별주의는 신중히 수정됐다. 강골 조디 포스터의 애나는 왕의 임종 침상을 지키던 과거의 애나들과 달리, <삼국지>식 지략을 구사해 반도들을 퇴치하는 용맹까지 발휘한다. 하지만 율 브린너와 데보라 커의 리드미컬한 티격태격을 들어낸 자리에는 마땅한 대체 연료가 채워지지 못했다. 앤디 테넌트 감독은 이 육중한 ‘코끼리’에 호화로운 안장을 얹기는 했으나 어디로 몰고 가야 할지 몰라 허둥대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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