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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옆 금발의 비너스들, 본드걸
김현정 1999-12-28

우르술라 안드레스에서 소피 마르소까지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

“일렉트라는 본드걸이 아니다.” 소피 마르소는 잘라 말한다. 한가닥 하는 여배우들은 007 시리즈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러나 소피의 단언과 상관없이 사람들은 그녀를 본드걸로 생각한다. 그녀가 제임스 본드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상복을 입은 단정한 모습으로 처음 스크린에 등장했다 해도 상관없다. 곧 그녀는 프랑스의 사진작가들이 “가장 섹시한 여배우”로 극찬하는 자신의 육체를 전시하듯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시리즈에 그녀가 존재하는 이유다. 그 이상이 되리라고 생각했다면, 소피 마르소는 007 시리즈의 힘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이다. 여배우들을 삼키는 007 시리즈의 괴력을.

그것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1962년, <닥터 노>. 흰 비키니를 입은 우르술라 안드레스가 해변에 나타났을 때, 그 조각 같은 금발의 비너스에게서 남성들은 스파이영화의 또다른, 어쩌면 최고의 묘미를 발견했다. 007 영화의 진정한 절정은 본드가 악의 세력을 파괴하는 순간이 아니라 본드걸을 품에 안는 마지막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언 플레밍의 원작에서 그녀가 완전한 알몸으로 물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관객은 분명 야유를 퍼부었을 것이다. 아직도 최고의 본드걸로 칭송받는 우르술라의 완벽한 몸을 가리다니. 그러나 완전히 벗은 몸을 보고 싶다는 욕구는 곧 <골드핑거>(1964)에서 불완전하게나마 충족된다. 본드와 하룻밤을 보낸 후 온 몸에 황금을 칠한 채 죽어 있던 질 매스터슨은 007 시리즈 사상 가장 유명한 시체가 되었다. 거의 누드처럼 보이는 그 장면을 비롯해서 본드걸들은 정말 가려야 할 곳만을 가까스로 가리면서 시리즈의 인기를 유지했다. 남성들이 선호하는 육체적인 매력의 변화를 재빨리 따라잡으면서 그 전형을 노골적으로 재현하던 이 법칙은 <007 죽느냐 사느냐>(1973)의 제인 세이무어에 이르러 약간의 곤란에 처한다. 타로트 카드로 운명을 읽어내는 신비한 여인이 속옷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드레스를 입고 점을 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머리를 풀어 헤치고 다니는 다른 본드걸들과 달리 긴 머리에 단정하게 머리핀을 꽂은 그녀는 치렁치렁한 가운으로 몸을 빈틈없이 감싼다. 대신 가슴 위 아슬아슬한 곳까지 깊게 팬 네크라인이 관능을 전해 주었다. 보일 리 없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관객은 혹시나 하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그녀의 네크라인을 따라갔다.

<닥터 노>

<유어 아이즈 온리>

앙탈을 부리면서도 결국은 다소곳해지는 본드걸, 죽은 남편의 복수마저 포기하고 본드의 품에 안겨드는 본드걸의 이미지는 시대가 변하면서 다소 수정이 가해진다. “인격을 가진 본드걸” 캐롤 부케가 등장하는 <유어 아이즈 온리>(1981). 본드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혼자 행동할 수 있는 차갑고 강인한 캐롤 부케 이후, 비키니를 입고 뛰어다니는 직업불명의 미인들보다 전문직업을 가진 본드걸이 더 많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90년대식 본드’ 피어스 브로스넌이 등장하는 시리즈에서 본드걸들은 유능한 과학자거나 첩보원이며 스스로 음모를 계획하고 본드에게 포섭되지 않는다. 심지어 30년 동안 본드에게 희롱당해온 가엾은 영국 첩보부 직원 머니페니조차 본드에게 면박을 준다. 그러나 직업이 바뀌었다고 해서 본드걸이 영화에서 수행하는 역할까지 변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두 여자 사이의 중심에 본드가 서 있는 <007언리미티드>의 포스터가 말해주듯, 본드걸들의 두뇌는 영화에서 쓸모없는 존재이다. 킴 베이싱어와 캐롤 부케(<욕망의 모호한 대상>), 제인 세이무어(<닥터퀸>)를 제외한 대부분의 본드걸들이 이름없이 사라진 것도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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