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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한국영화 결산 [1] - 올해의 영화
1999-12-28

한국영화, 인정사정 없이 몰아치다

한국영화 제작편수 50편, 관객 점유율 36.7%(12월22일 현재). 한 세기가 저물어가는 1999년 세밑의 한국영화 결산표의 차변과 대변이다. 지난해보다 제작편수는 불과 3편 늘었지만 점유율은 무려 95% 이상 성장했다. 이런 수치에는 <쉬리>의 폭발적인 흥행 등으로 약간의 거품과 허수가 묻어 있을지도 모르지만, 영화와 영화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새 천년으로 질주하는 한국영화의 내일에 기대를 가져도 될 법 하다.

1999-2000 네 번째 특집은 ‘한국영화 폭발’이다. 90년대 한국영화계 10대 사건과 올해 한국영화계 10대 사건을 짚어보고 올해의 영화·영화인을 뽑았다.

올해의 영화·영화인 선정위원은 <씨네21> 20자평 필자·영화전문 필자, <씨네21> 객원기자와 기자로 구성했다. 선정부문은 ‘올해의 영화 베스트5’와 감독, 프로듀서, 시나리오, 촬영, 남자배우, 여자배우 ‘올해의 영화인’ 6개 부문을 나눠 뽑았다. 선정위원들에게 제시한 ‘올해의 영화 베스트5’ 선정기준은 ? 같낳의?장편영화 중에서 일반적인 의미의 완성도를 중심에 놓되, 상업적인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공헌도도 감안한다”는 것이었다.

<씨네21> 올해의 영화 베스트 5

1위-인정사정 볼 것 없다

화제작이 만발한 대신 걸출한 작품이 드물었다는 총평 속에서도,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17명의 선정위원 가운데 9명의 첫 손가락에 꼽히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느긋하게 최고의 영화 자리에 올랐다. 시사회장에서 갈채를 이끌어낸 <인정사정…>의 미학적 완성도는 한 재능있는 감독에 대한 신뢰의 흐뭇한 재확인이었다. 그러나 정작 드라마틱한 사건은 그 다음. <인정사정…>은 흥행 못하리라는 만장일치에 가까웠던 영화계의 예상을 뒤엎고, 같은 날 개봉한 <유령>을 저만치 추월하는 성적(서울관객 68만7천)을 올렸다. ‘박중훈표 코미디’가 관객에게 발휘한 괴력도 컸지만, 암표를 사서 이명세 감독의 영화를 관람한다는 것은 분명 자못 감격스런 경험이었다. 선정위원들이 든 <인정사정…>의 미덕은 형식미. ‘스타일을 밀어붙인 치열함’(이상용), ‘알몸에 감기는 비단의 감촉’(박평식)을 연상시키는 정밀한 묘사력이 선정 이유로 언급됐다.

2위-해피엔드

행복한 결말이 마련돼 있지 않은 영화 <해피엔드>는 차분한 치정극이며 피투성이 가족영화다. 그 안에는 애정과 살의라는 양 극단의 감정이 등을 맞대고 있고, 여성과 남성의 관습적 역할은 뒤집혀 있다. 수목 드라마를 보며 눈물짓고 빈 우유팩을 꼼꼼히 분리수거하는 남편과 돈을 버는 아내가 나오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멜로드라마에서 흔적없는 정사를 원하고 그러다 적당히 가정으로 돌아올 궁리를 하는 쪽은 여자고, 사랑 때문에 인생을 망가뜨리는 것은 그녀의 남편과 연인이다. 정지우 감독은 줄곧 아주 미세한 움직임들로 드라마의 파동을 만들어내다가 돌연 영화를 폭발시킨다. 불륜 커플의 격렬한 섹스와 오쟁이진 남편의 격렬한 복수. 이 두번의 폭발은 개봉 둘째 주 현재 <해피엔드>가 30만명에 육박하는 서울관객을 끌어들이며 행복한 결말을 향해 행진하게 한 큰 힘이기도 하다. “스타일 유행에서 벗어나 영화의 냉철함을 보여준 용기. 그 가상함”(김의찬)이라는 추천사가 있었다.

3위-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한국영화의 20세기가 10대들의 이야기를 담은 두 젊은 신인 감독의 수작으로 문을 닫았다는 점에서 희망을 보아도 좋을까. 씨네2000의 98년 히트작의 속편으로 태어난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는 교육제도의 포악 대신 성장의 슬픈 섭리를 포착한 맑고 투명한 공포영화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단편의 스타였던 정지우 감독이 심리와 상황을 섬세하게 다루는 단편영화의 미덕을 장편에서 꽃피웠다면, <여고괴담 두번째…>의 민규동-김태용 감독은 단편 시절의 문제 의식과 작업 시스템을 넓은 스크린에 옮겨 심화하고 확장했다. 민-김 공동감독을 올해 최고의 감독 부문에서 지지한 선정위원 유지나 교수는 “중앙집중형 내러티브를 해체한 N세대식 네트워킹 이미지 내러티브를 창조”했다는 평을 덧붙였다.

4위-간첩 리철진

28살 신세대 감독이 만든 간첩 이야기. 간첩을 이만큼 순박하게 인간적으로 묘사한 작품은 일찍이 없었다는 점만으로도 대단한 화제가 됐다. 고정간첩은 서울의 소시민과 다를 바 없는 소박한 욕구의 주인공이며, 남파간첩은 멍청하게 택시강도를 당해 가진 걸 다 잃고 만다. 이데올로기의 중압을 깃털처럼 털어내고, 눈길 주기도 두려웠던 대상에서 경쾌한 웃음과 은근한 슬픔을 끄집어낸 장진 감독은 어쨌든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캐릭터의 톤을 잃지 않으면서도 기상천외한 유머를 자유자재로 구사함으로써 <간철 리철진>은 한국 코미디영화의 새 영역을 열었다. 흥행성적도 짭짤했다. 다만 이야기의 리듬은 아직도 거칠다는 평가가 있다. 간첩 같은 외모의 유오성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영화.

5위-태양은 없다

이정재와 정우성이 빈티나는 건달이 되어 압구정 거리를 질주한다. 그들의 멋진 육체는 여성 관객의 넋을 빼놓을 만큼 매력적이지만, 영화 속 그들의 현실은 우중충하기 짝이 없다. 이야기도 때로 툭툭 끊기듯 진행되고, 비장하고 감상적인 최후도 없다. 두 건달은 결국 동네의 한 옥상에서 날밤을 새고 아주 소박하게 새 태양을 맞는다. <비트>의 김성수 감독이 2년 만에 내놓은 이 영화는 <비트>의 대중적 호소력을 계승하면서도, 전과 다른 작가적 태도를 불어넣으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이 점 때문에 평론가들 사이에선 의견이 갈렸지만, 관객은 높은 지지를 보냈다. 얄팍하고 수다스런 사기꾼 홍기로 나온 이정재는 이 영화를 통해 비로소 연기자로 인정받았다. 김성수·김형구(촬영)·이강산(조명)·정우성 등으로 이어진 <비트>의 팀워크가 여전히 막강함을 보여준 영화.

"내 식으로영화찍기에 대한 격려, 아닐까"

이명세 감독 인터뷰

-지금 뉴욕에 머물고 있는데, 어떻게 지내나.

=오래 전부터 영화 한편 마치면 긴 여행 떠나는 것이 소원이었다. 하지만 한번도 그렇게 못했다. 돈도 없고, 마음도 복잡하고. 이번에는 작정하고 왔다. 여기 온 지 두달쯤 됐고, 내년 봄까지 있을 생각이다. 갤러리, 뮤지컬 구경도 다니고, 내년 초에 열릴 크고 작은 영화제에도 들를 생각이다.

-작품 구상차 떠난 여행인가.

=꼭 그런 건 아니다. 다만 내가 미국서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막연하게 둘러보고는 있다. 곧 멕시코에도 갈 예정이다. 계시를 받았거든. (웃음) 옥타비오 파스의 <태양의 돌>이라는 시를 읽고, 멕시코 아즈텍 문명 탐방을 꼭 하고 싶어졌다.

-올해의 감독, 올해의 영화, 2개 부문에서 베스트로 꼽혔다. 소감 한말씀.

=고맙고 기쁘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어떤 점이 높이 평가됐다고 생각하나.

=그거야 알 수 없지. 불쌍해서 그런가. 그동안 흥행도 잘 안 되고 했으니까, 밀어주느라고 그런 것 같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얘기하는 ‘내 식으로 영화찍기’에 대한 격려 차원이 아닐까.

-너무 겸손한 거 아닌가.

=한 작업 한 작업 연결돼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다르게 찍은 영화도 아니고. 어떤 점이 특별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올 한해가 어느 누구보다 의미깊었을 것인데.

=좋다. 잘돼서. 한국 감독들이 다 그렇듯 계속 작업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 가장 기쁘다. 다음 작품을 수월하게 찍을 수 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기쁘다.

-지금 구상중이거나 촬영 준비중인 작품이 있나.

=연말까지는 아무 생각 안 하고 살기로 했다. 아직은 구체화된 것이 없어, 꼬집어서 말할 것이 없다.

-내년쯤 차기작 <영자야 내 동생아>에 들어갈 예정 아니었나.

=획기적인 다른 스토리가 떠오른다면 모를까, 일단은 <영자야 내 동생아>를 찍게 될 것 같다. 하지만 언제쯤일지는 알 수 없다. 시나리오는 써 둔 것이 있지만 다듬어야 할 것이고. <가족>도 욕심은 있지만 시대물이라 제작비 마련이 힘들 것 같아 일단은 보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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