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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호 [37] - 한국영화가 담지 못하는 현실, <바람불어 좋은날>
1999-12-21

<바람 불어 좋은날> 기획 시절, 남대문 인간시장을 가다

농촌 출신의 세 청년이 무작정 상경했다.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다가 마침내 자리잡은 곳은 서울 변두리, 새로운 개발 지역. 중국음식점, 여관, 이발소에서, 기술이랄 것도 없는 하찮은 일거리로 삶을 유지해야 하는 세 청년은 각기 고향은 다르지만 우연히 객지에서 만나 동병상련의 우정을 나눈다. 그들이 공통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은 농촌에서 태어나 농촌에서 자란 우리의 정서와 뚝심이다. 심은 만큼 기르고 가꾼 만큼만 거두는 흙과 농사의 정직함을 조상 대대로의 삶에 이어온 그들이다. 눈속임으로 한탕 잘하면 떼돈 번다는 요사스러운 서울에서 그들은 당연히 시행착오의 혼란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끝내 좌절하지 않고 그들이 지니고 있는 소중한 우정을 조금도 잃지 않는 뚝심의 이야기가 내 영화 <바람불어 좋은 날>의 기둥 줄거리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만 자란 내가 농촌의 세련되지 않은 청년들 이야기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4년 동안의 값진 휴식기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염무웅씨의 평론집 민족문학을 뒤늦게 정독하면서 이제껏 내가 모르고 있었던 왜곡된 역사와 농어촌 현실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엿볼 수 있게 되었다.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딴엔 큰 충격을 받았다. 내 여동생이 군사 독재에 왜 그렇게 격렬하게 항거했고 독한 최루탄 속에서 무엇 때문에 죽기 살기로 시위를 했는지 이해가 됐다. 때마침 내가 좋아하는 <관촌수필>의 작가 이문구형, 시인이며 소설을 쓰는 송기원씨, 두 사람이 경기도 화성에 집을 마련해 생생한 시골 생활을 막 시작하던 참이어서 시간에 자유로운 나는 자주 내려가 이제껏 맛보지 못한 경이로운 농촌의 실상과 농민들의 살아 있는 모습을 직접 보고 들었다. 또 대대로 그 마을에서 살아온 내 또래의 청장년들과도 가까이 지냈다. 그렇게 새롭게 눈뜨는 동안 공연히 화려하고 덧없이 사치했던 60년대 말기와 70년대 한국영화에서 도저히 담아낼 수 없었던 우리 주변의 삶과 현실이 내 속에서 엄청난 감동의 영화적 욕구로 변하고 있었다. 거기엔 호화로운 인테리어도, 느닷없이 등장하는 비싼 스포츠카도 없었다. 누구나 한결같이 배부르고, 치정 외에는 딴 걱정이 없는 그런 부류의 저능아들이 등장하는 영화적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엇보다도 현실에 뿌리를 깊이 박고 있는 질퍽한 삶이었다. 최일남 선생의 중편소설 <우리들의 넝쿨>은 이런 감각과 생각의 변화를 겪고 있는 나에게 아주 적당한 줄거리를 제공했다. 때마침 내 안팎으로 불고 있는 새로운 바람을 영화 제목으로 응용했다. 휴식기간 내내 함께 했던 고등학교 후배, 배창호가 이 기획에 적극 가담했다. 나와 배창호는 각색을 위해 여러 사례를 수집하고 무작정 상경한 청소년들을 실제로 만나 열심히 취재하는 동안 번번이 등장하는 남대문의 새벽 인간시장이 궁금했다.

어느 날 마침내 그곳을 찾았다. 당시엔 서울시 경찰국이 바로 그 남대문시장 건너편에 있었는데 바로 엎어지면 코 닿는 큰길에서 사람을 사고 파는 행위가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내가 수상하게 서성거리는 한 청년에게 다가서는 순간 “홀뽀이나싸∼ 완있스”라는 알 수 없는 말이 그의 입에서 은근히 흘러나왔다. 나는 잘 알아듣지 못해 그에게 반문했다. “뭐라구요?” 그는 다시 “홀뽀이나싸∼ 완있스”라고 습관적으로 우물거리면서 자리를 떴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의 말은 “홀보이나 사환 있습니다”라는 말을 수없이 반복하는 동안 자기 입에 편리하게 굳어진 직업적인 말씨였다. 우리는 다시 시장 안으로 파고들었다. 큰길과 달라 뒷골목에는 더 많은 청소년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큰길쪽에는 사고 파는 사람들이었고 뒷골목 안에는 팔릴 대상인 청소년들이었다. 그때 나는 정말 참담한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뒷골목 안 어느 건물 이층으로 올라가는 어두컴컴한 계단이었다. 그곳엔 이제 겨우 초등학교나 다닐 듯싶은 어린것에서부터 기껏해야 열댓밖에 안 보이는, 내 아들처럼 앳된 모습의 소년들이 빼곡이 들어앉아 음울한 눈으로 팔려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알 수 없는 분노로 눈물이 왈칵 솟아나왔다. “이런 무서울 데가!” “이런 천벌을 받을 데가!” 나는 부들부들 떨면서 더이상 구경하지 못하고 큰길로 뛰어나왔다. 기관총이라도 있다면 눈앞에 뻔뻔히 서 있는 시경찰국을 향해 무차별 난사하고 싶었다. 나는 흥분한 상태로 방금 내가 본 무서운 모습을 배창호에게 이야기하면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어디 빨리 화려한 장소로 도피하고 싶었다. 잠시 후 우리는 플라자호텔 커피숍에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대형 유리창 너머 시청이 바라보이는 자리였다. 시청의 둥근 돔 위엔 비둘기의 평화로운 모습과 무심히 펄럭이는 태극기가 유난히 한가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더 가증스럽고 무책임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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