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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석의 씨네콜라주] 다크 시티

“자네 다크 시티라고 들어봤나?” 오늘 아침, 편성국장이 기상 리포터 빌을 자기 사무실로 불러들였다. “처음 들어보는데요.” “아마 그럴 거야.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도시니까. 이 도시에서는 자정만 되면 빌딩들이 모두 사라지고 주민들이 잠에 빠져든다네. 그리고 밤 사이 전혀 다른 건물이 세워지고, 사람들은 새로운 기억을 주입받은 뒤 다음 하루를 살아가게 된다는군.” 빌리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노망이 들었나’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밥줄을 위해 참았다. “아무튼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이 도시에서 방송을 진행하게. 매일매일 뒤바뀌는 도시에도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오는가, 어때 낭만적이지 않아?”

빌은 지지리도 재수가 없다고 여겨졌다. ‘남들 다 노는 크리스마스에 출장이라니. 게다가 PD는 앤디라고, 왜 밥맛없게 여자야? 출장길에 재미보기도 글렀잖아.’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다크 시티로 가는 도로 노선은 알려진 바가 없어, 터키인들이 운영하는 장거리버스를 타야만 했다. 빌, 앤디, 카메라맨은 자정 무렵에야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매표소에는 오잘린이라는 이름표를 단 터키인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앤디가 주문했다. “다크 시티, 세장.” “다르크 시티?” 오잘린이 퉁명스럽게 되묻자, 앤디가 빌에게 물었다. “다르크 시티라는 데도 있나요?” 빌은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터키식으로 읽은 거야. 다르으으크 시티.”

버스에 타자마자 곯아떨어진 세 사람은 다음날 아침 하얀 눈송이가 뿌려지는 다크 시티에 도착했다. 앤디와 카메라맨은 신이 나서 소리질렀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다!” 하지만 빌은 시큰둥했다. “강아지처럼 좋아하는군. 빨리 찍고 가자고. 다크 시티라고 해서 뭔가 그로테스크할 줄 알았더니, 그냥 시골 마을 아냐?” 일행은 빌의 성화로 30분 만에 촬영을 마쳤다. “너무 아름답고 평화로운 도시예요. 사람들은 아무 걱정도 없어 보이고.” 앤디는 아쉽다는 듯 거리를 돌아보았지만, 빌은 카메라맨에게 빨리 버스표를 사오라고 보챘다. 얼마 후 카메라맨이 즐거운 얼굴로 돌아왔다. “헤헤, 버스는 내일 아침에나 있대요.”

다음날 아침에도 여전히 탐스러운 눈이 내리고 있었다. 빌은 서둘러 버스 정류장으로 가, 개찰구에서 차표를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이건 내일 차표인데요? 오늘은 버스가 없어요.” “뭐라구요? 분명히 26일 차표를 샀는데.” “그러니까요. 오늘은 25일이잖아요.” 대관절 무슨 일인가 싶어 신문을 샀더니, 25일. 텔레비전 뉴스도, 25일. 모든 게 어제 그대로였다. 빌은 몸서리치며 소리질렀다. “맙소사, 정말 다크 시티로 왔구나.” 그때 어떤 노인이 빌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봐. 여긴 다크 시티가 아니라, 닭 시티라고. 여기 사람들은 전부 닭처럼 기억력이 나빠서 하룻밤 자고 나면 뭐든지 다 잊어먹지…. 엥,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었지?”

다음날도, 아니나 다를까, 똑같은 날이 계속되었다. “이 바보 같은 닭대가리들! 하루가 지났단 말이야, 하루가!” 빌은 버스 정류장에서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분에 겨워 술을 마시고 곤드레만드레가 되었다. “그래, 외상이야. 내일 갚으면 되잖아. 어차피 다 까먹을 텐데, 뭐.” 며칠째 횡패를 부리던 빌은 급기야 술집 사람들에게 두들겨맞고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돌아갈 곳도 없이 또 똑같은 하루를 마감해야 하는 빌. 그렇게 측은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는 빌에게 누군가 따스한 손을 내밀어주었다. 앤디였다. “미안해요. 앤디. 나 같은 것에게 이렇게 신경을 써주다니.” “아니에요. 저는 당신 마음을 알아요.” “그렇지만, 흑흑. 아 미안해요. 콧물이 당신 손에 묻었네요.” “괜찮아요. 당신은 사실은 따뜻한 사람. 그래서 콧물도 이렇게 따뜻하네요.” “그것은 당신의 보석 같은 손에 닿아서지요.” 얼어붙은 빌의 마음이 열리고, 둘 사이에 닭살 돋는 대사가 오고갈 때. 아 하늘도 이들의 마음을 알았던 것일까? 둘의 몸에 오소소 닭살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의 뇌도 닭대가리로 바뀌어, 그들은 과거를 잊고 행복하게 닭 시티에서 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등장인물

빌 머레이: 자기 중심적이고 냉소적인 기상 리포터. 다크 시티에서 운명의 시험에 빠진다.

앤디 맥도웰: 상냥하지만 내성적인 프로듀서. 내심 빌을 동정 반, 사랑 반으로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