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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는 단성사를 애도하며
2001-02-14

정윤수의 이창

단성사는 그 자체로 역사다. 1907년에 세워졌으며 서울 토박이 북촌사람들의 공간이었고 <의리적 구토>에 <아리랑>을 시작으로 <겨울여자> <장군의 아들> <서편제>를 상영했던 곳이다. 이제 단성사가 물러가면 옛 국립극장, 스카라, 인천과 대구의 애관, 만경관만이 추억의 극장문화를 유지하게 되었다.

가족의 애경사(哀慶事)에는 간혹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등장한다. 그는 갑자기 나타나 하객과 조문객, 혼주와 상주를 난처하게 만들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깽판’을 친다. 진혼의 슬픔으로 고즈넉한 상가에 느닷없이 등장하는 사람들. 어릴 적 집나간 삼촌과 불길한 소식만 들려오던 사촌누이. 전상국의 <아베의 가족>에 대하여 김윤식이 표현한 바 있는 이들 ‘악종(惡種) 인간’은 맏상주보다 더 서럽게 곡을 하고 술상을 뒤엎고 인연도 없는 다른 집 문상객들과 시비를 걸다가는 이윽고 출상의 새벽, 찾아보면 말 한마디 없이 사라져버린다. 그들 때문에 곤혹스럽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들이 없다면 영안실은 얼마나 쓸쓸할 것인가. 또한 그들이 없다면 ‘핏줄’이라는 이 신비스런 인연의 파국과 절실함을 어떻게 되새길 수 있을까.

안타까운 몇 마디 전언(電言)을 듣고 서둘러 영안실을 찾아보면, 그러나 이제 악종 인간을 더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사람이 물론 영영 없어진 것은 아니고 다만 그들이 맘놓고 깽판을 쳤던 공간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서울대병원 영안실의 경우, 몇년 전 장인어른을 모실 때와 달리 지난해 이맘 때 할아버지를 모실 때는 흡사 1급 호텔 수준으로 달라져 있어서 함부로 곡을 하고 실신을 해도 좋을지 망설여야 할 정도였다. 고스톱에 술추렴은 여전하지만 그것도 자정이 다가오면 전통이 아니라 추태처럼 여겨졌으니 문상객들은 엉거주춤, 지하철 끊길지 모른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일어서곤 했다. 그때 음악평론하는 선배가 자정이 넘어 소식을 듣고 왔는데, 깔끔한 아주 깔끔한, 그리고 텅 빈 영안실 풍경을 보면서 “씨바, 그 나라에는 그 나름의 고유한 장례문화가 있는 거 아냐” 하고 투덜거리는 기억이 난다. 실로 그 공간은 시편 23장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하는 기도만이 보이스-오버되어야 적절한 곳이었다.

물론 나는 전통에 대하여 유보적이다. 때로는 그것에 대하여 완강한 태도를 갖곤 한다.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향수, 그 추억이란 종종 터무니없는 근본주의와 손잡을 때가 있으며 시계사정거리는 좁아지고 시야는 그만큼 흐려진다. 전통이란 그 자체로 권위적인 것이어서 특별히 그것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것은 파시즘으로 흐를 우려가 있다는 기든스의 말도 유익한 편이다. 그러나 내 개인의 감정과는 별개로 우리의 상황, 특히 전통적 삶의 부재로 요약되는 파편화된 모더니티의 조건을 볼 때 과연 우리가 사라져가는 것에 대하여, ‘그것은 사라질 이유가 있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이라고 손쉽게 말해도 되는지 의문이다. 백두산족 운운하는 위선과 위악이 착종된 민족주의의 과잉이야 가볍게 뿌리칠 수 있는 것이지만 우리 일상의 근거 자체가 아무렇지도 않게 과거와 결별하는 모습은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 조공례 할머니의 진도 상여소리만이 우리의 장례여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고스톱에 가벼운 소란도 허락하지 않는 ‘근엄한’ 영안실은 영 낯설다.

그렇다면 단성사는 어떨까. 이제 거길 허문다고 한다. 그 자리에 17층의 복합 극장이 들어선다고 하니 강남 일대로부터 고전하던 종로가 한국 극장문화의 적손인 단성사의 변신을 통해 예전의 영화를 되살릴 수 있을 것인가. 하긴 단성사는 그 자체로 역사다. 1907년에 세워졌으며 서울 토박이 북촌사람들의 공간이었고 <의리적 구토>에 <아리랑>을 시작으로 <겨울여자> <장군의 아들> <서편제>를 상영했던 곳이다.

도시공학과 건축전문가들의 한탄대로 6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서울이 왕조의 유산 몇개를 빼고는 모조리 거덜나버리는 과속의 모더니티를 질주한 터이므로 ‘고작’ 100년도 안 되는 극장 하나가 17층짜리 ‘초호화’로 거듭나는 광경을 씁쓸하게 여기는 것은 어쩌면 낡고 닳은 향수병에 지나지 않을는지 모른다. 작금에 이르러 누가 골목과 다락방을 회억하는 즐거움을 알겠는가. 주차장으로 변해버린 국도극장은 썩 효율적이지 않은가(?).

나중에 좀더 목적의식적인 일로 끌려다닌 것말고 내가 경찰과 인연을 맺은 첫 장소가 단성사다. 종로를 관통하는 23번 버스를 타고 한일극장에서 국제극장까지 이르는 드라이브를 즐기던 중1 때, 나는 피카디리 앞 건널목에서 단성사 영화스틸 구경하러 신호를 기다리다가 어떤 여자가 손에 든 책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제목도 생생한데 한수산의 <부초>, 당시로서는 조금 철지난, 정병규 디자인의 베스트셀러였는데 어느 행인이 소매치기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금세 파출소로 ‘연행’되었다. 알고보니 그 여자가 실수로 가방의 지퍼를 닫지 않았을 뿐이어서 곧 ‘훈방’되었는데 나는 피카디리 앞에 주질러 앉아서 심각하게 교란된 정신착란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선을 되도록 멀리 주고 있었다. 아마 그렇게 1시간 가까이 나는 ‘團成社’ 간판을 보고 있었을 게다.

정윤수/ 문화평론가pragu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