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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패닉과 바이오펑크
2001-02-15

신현준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몇년 전만 해도 컴퓨터 관련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은 은하수 건너 외계에서 온 생명체로 보였다. ‘인간의 언어’로 들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단어처리기’로 문서 텍스트나 작성하여 인쇄하고 이메일보내는 게 전부인 초급 사용자로서 CPU의 헤르츠와 램의 클럭수와 하드디스크의 FAT 정도만 아는 것도 대단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놈은 생명없는 기계니까.

생각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컴퓨터가 먹통이 돼서 하늘이 노래지는 일을 경험하면서부터다. A/S를 불렀을 때 “오늘은 힘들고 내일 오겠다”는 답변을 들으면 “오늘 내로 와 주실 수 없느냐”라고 생떼를 부리기도 하고, 마음이 급해지면 딸래미가 홍역이라도 걸린 것처럼 컴퓨터를 들쳐업고 이리저리 헤매다니기도 했다. 데이터를 날려버리는 일은 주기적 사고가 되었다. 그나마 수리가 빨리 되고 비용이 많지 않으면 병을 고친 것처럼 기뻤다. 반면 “수리하느니 새걸로 하나 사시죠”라든가 “정 안 되면 업그레이드라도 하시죠”라는 말을 들으면, 상대방의 상술을 의심하기 앞서 멀쩡했던 놈이 불의의 사고를 당해 유명을 달리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무렵부터 그놈이 혹시 인간 같은 생명체일지도 모른다는 망상이 들었다.

결국 생각을 바꿨다. 운영체제와 소프트웨어를 설치하고, 데이터를 안전하게 관리하고, 웬만한 하드웨어를 장착하는 일 등을 독학했다. 누군가 “디지털 문명도 연인처럼 자주 만져야 한다”(정과리, <문학과 사회>, 1999 가을, p.1134)고 했던 말이 인상에 남아서 가끔씩 케이스를 열고 스프레이로 청소하고 나사도 조이곤 했다. 쓸 만한 부품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규격을 바꿔버리는 하드웨어 업체, 프로그램을 이상하게 짜놓은 소프트웨어 업체들은 “나뿐 놈들”이라는 호통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OK Computer!

문제는 예전에는 그냥 넘어갈 사소한 것도 괜히 고치려고 덤비는 습성이 생겼다는 점이다. 겨우 컴맹 수준으로(을???) 넘은 주제에 괜히 이것저것 만지작댔고 그러다가 최근 긁어부스럼으로 대형사고를 치고 말았다. 이번에는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저지른 실수였고, 게다가 다른 사람의 데이터까지 날려버려서 민망하기 그지없다. 순간의 실수가 엄청난 결과를 저지르는 시스템에 한탄하는 건 못난 이의 하소연일 뿐이다. Oh, No Computer!

그러던 차에 바이오펑크를 특집 기획으로 한다는 잡지사로부터 영국의 록밴드 라디오헤드의 음악을 바이오펑크의 관점에서 평해 달라는 원고를 청탁받았다. 소설가 윌리엄 깁슨의 말을 (재)인용하면 바이오펑크의 주체성은 “살인적 분노와 유아적 욕망이 극도에 달해도 말로 발설하지 못하고 리모컨으로 채널을 바꾸거나 대통령 선거 때 투표를 할 따름인 존재”로 표현된다. 나는 이 말을 ‘비관론’으로 해석하고 글을 썼다. 그런데 몇 시간 뒤 편집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다른 분들은 낙관적인데 신현준씨만 비관적인 것 같다”는 것이었다. 하긴 특집으로 다루는 주제에 대해 비관론을 피력하는 인간이 이상한 생물체다. 그렇지만 낙관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가진 윤리가 어떤 것인지도 무척 궁금하다.

* 추기

라디오헤드는 1997년 발표한 앨범 에 수록된 라는 곡에서 컴퓨터에 대해 “여피 네트워킹”이고 “돼지가죽이 우지직거리는 소리”, “먼지, 고함… 공황, 구토”라고 진절머리를 냈다. 그러면서도 “나는 편집증 환자일지 모르지만 안드로이드(인조인간)는 아니야”라는 자의식을 잃지는 않았다. 역설적인 것은 이 앨범이 라디오헤드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본격적으로 활용한 작품이라는 점. 지난해 발표된 앨범 는 한발 더 나아가 사람의 목소리까지도 전자음향을 통해 변조하고 있다. 노래를 부르는 주체는 자의식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정보기술을 통해 복제된 생명체 같다. 윌리엄 깁슨이 소설 <이도루>(Idoru)에서 묘사한 “새끼 하마만한 크기에 일주일쯤 된 삶은 감자 색깔의 생물체”가 노래 부른다면 이럴까. 라디오헤드의 지향은 ‘How to disappear completely’라는 곡 제목에 표현된다. 신체를 소멸시키는 것? 물론 상상 속에서. 이런 유형의 상상력을 바이오펑크라고 부르는 게 요즘의 트렌드인 모양이다. 10여년 전 사이버펑크가 가졌던 인간의 신체에 대한 반감은 유전공학의 언어를 통해 더욱 증폭된다는 점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고, 그게 ‘건강과 효율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여피의 윤리에 대한 반감’이라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고 있다. 물론 대중음악이나 대중소설에서 ‘심오한’ 의미를 찾든 말든 그건 각자의 ‘상상의 자유’라는 전제하에서 하는 말이다.

신현준/ 문화수필가 http://shinhyunjoon.com.n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