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영화읽기
엽기의 감옥에 갇힌 일탈
2001-08-08

재미없고 유해한 엽기문화, 삶을 심심하게 만들다

● <엽기적인 그녀>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고전적인 러브스토리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얌전하고 평범한 주인공이 다소 정신나간 행동을 하는 상대에게 말려들어 진이 다 빠질 정도의 고난을 겪다가 결국 그 사람과 맺어진다는 것이죠. 이런 커플들의 이야기는 끝도 없이 많습니다. <섬씽 와일드>의 룰루와 찰스, <솔로몬 가족은 외계인>의 딕 솔로몬과 메리 올브라이트, <브랜단 앤 트루디>의 브랜단과 트루디…. 애인 사이는 아니더라도 아마 <앨리의 사랑만들기>의 리처드 피시와 존 케이지도 비슷한 부류겠지요. 맘만 먹으면 전 이런 커플들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두 페이지를 채우고 원고료를 챙길 수도 있습니다. 사실 지금도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있는 중입니다.

막가파와 소심파의 평범한 이야기

왜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렇게 많을까요? 일단 스토리를 만들기가 쉽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세상에 정말 이런 사람들이 꽤 많기 때문입니다. 이건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당연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견우와 같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 적극적이고 눈치 안 보는 사람들이 삶에 뛰어들면 제대로 의견 개진도 못하고 그냥 말려들다 큰코를 다치는 경우가 많거든요. 반대로 거친 성격의 사람들은 자기 성격을 받아주고 희생자가 되어줄 얌전한 상대를 찾게 마련이고요. 수업시간에 결석 학생들 모두를 대출해주는 견우의 모습을 보세요. 그 친구는 타고난 희생자입니다. 언젠가 이 영화의 ‘그녀’처럼 험악한 사람과 자동적으로 얽히게 운명지어져 있어요.

그렇다고 세상이 견우와 같은 얌전한 사람들을 잡아먹는 무시무시한 괴물들로 가득 찬 건 아닙니다. 실제 세계에서 이런 거창한 상대방들은 대부분 그냥 평범한 사람들일 겁니다. 둘 사이의 성격차가 워낙 커서 한쪽의 성격이 과장되는 것뿐이죠. 문제는 얌전한 사람들은 글쟁이인 경우가 많고, 소재로는 막 나가는 사람들이 더 재미있는 편이라 영화나 소설 같은 예술 매체가 균형잡힌 시선을 유지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중에는 정말 재미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단지 막 나가는 사람과 소극적인 사람 콤비의 이야기라고 해서 당연히 그 범주에 들라는 법은 없죠.

흠…. 아직 영화 이야기를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대충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감이 잡히는 것 같군요. <엽기적인 그녀>가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평범한 이야기라는 거겠죠.

그게 잘못일까요?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들도 자기 이야기를 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 자체는 문제가 없어요. 문제는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그 평범함을 부인하고 자신이 새롭고 독창적인 무언가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기만하려고 할 때 발생하는 것입니다.

일단 논리전개를 위해 전제를 만들어봅시다. 훌륭한 괴물들은 늘 우리에게 무언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줍니다. 그건 괴물로서 그들이 해야 할 임무인 것입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습니다. <프렌즈>의 피비는 어때요? 그 사람이 그처럼 독특하게 비추어지는 것은 의식적으로 괴물처럼 행동해서가 아닙니다. 그 사람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이지만 자기한테는 당연한 가치관 속에서 일상적이고 논리적으로 행동합니다. 관객이 피비 뷔페라는 캐릭터를 즐기는 진짜 이유는 매번 저지르는 엉뚱한 행동 속에서 그런 자신만의 가치관을 노출시키며 우리에게 신선한 시선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우린 피비를 통해 식물들과 사물들이 살아 움직이며 전혀 다른 미의식이 지배하는 세계로 인도됩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그녀’는 우리에게 어떤 비전을 제공해주나요? 아무것도 제공해주지 않습니다. 대충 ‘그녀’가 영화 속에서 하는 일들을 보죠. 괜히 정의심은 좀 강해서 원조교제하는 중년 남자들이나 할아버지한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애들에겐 막 대듭니다. 술이 약하면서도 조절을 못해서 종종 사람 머리에 구토를 하고 아무 데서나 쓰러지네요. 발이 아프다며 남자친구에게 신발을 바꾸어 신자고 요구하고, 중절수술을 해야 한다고 거짓말을 한 뒤 남자친구를 밖으로 끌어내기도 합니다. 물이 얼마나 깊을까 궁금해서 수영도 못하는 남자친구를 빠트리기도 하고요. 가끔 말도 안 되는 내용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하는 모양이고요.

네, 제가 아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어느 정도 희소성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녀’가 우리가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사람들과 질적으로 다른 괴물일까요? 아, 그건 아닙니다. 원조교제를 하는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나무라는 건, 그 사람이 입이 걸고 성미가 급하며 낯짝이 두껍다는 증거에 불과합니다. 정도가 조금 심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대단하게 재미있는 것은 아닙니다. 술이 약하면서 그렇게 퍼마시는 건 어떨까요? 단순히 무책임하고 위험한 행동입니다. 어떤 비전도, 창의성도 찾을 수 없죠. 단지 우리가 전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흔한 주정꾼들의 모습이 조금 더 위험하게 과장된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순풍 산부인과>의 박영규처럼 현실적인 인물의 캐리커처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박영규의 쫀쫀한 행동을 보고 웃으면서 우리 자신과 이웃의 모습을 재발견할 수 있지만 ‘그녀’의 주정은 아무리 확대해봐도 ‘주정’ 이상의 무언가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물이 얼마나 깊을까 궁금해서 남자친구를 빠트리는 행동은 어떨까요?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제대로 된 자기 논리도 서 있지 않은 행동이죠. 남자친구를 빠트린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냥 가라앉는 것도 아니니까요. 만약 정말로 그게 물의 깊이를 잴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라면 우린 ‘그녀’의 독창성을 인정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건 그냥 재미도 없는 위험한 행동입니다. 이런 행동의 원인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녀’가 사리판단을 못하는 위험한 정신의 소유자거나, 아니면 별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작정한 진부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둘 다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죠.

어느 쪽이 맞을까요? 후자쪽이 가까울 겁니다. ‘그녀’가 쓰는 영화 시나리오를 보죠. 나중에 나오는 비천 어쩌고 하는 영화는 어때요? 이 각본에서는 세종대왕시대에 임진왜란이 나고 땡볕이 쏟아지는 대낮에 장대비가 내립니다. 아마 농담인 모양입니다. 하지만 왜요? 세종대왕시대에 임진왜란이 나온다고 해서 특별히 웃겨야 할 일은 없습니다. ‘그녀’가 터무니없이 무지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역사 지식을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정말 그 사람이 그걸 몰라서 그렇게 썼을 리는 없습니다. 땡볕과 장대비가 공존하는 장면은 더욱 재미가 없죠. <외계에서 온 계획9>에서처럼 실수로 낮과 밤이 공존한다면 모를까. 역시 뭔가 튀려고 작정하긴 했는데, 정작 능력이 없었던 것뿐입니다.

차라리 중간에 나오는 <소나기> 패러디는 그런 대로 괜찮습니다. 특별히 창의적인 내용은 아니지만 적당한 반전이 있고 전도된 가치관이 있으며 자기 논리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 대부분 동안 ‘그녀’는 이 정도의 수준도 유지하지 못합니다. 그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괴상함으로 튀려고 발버둥칠 뿐이에요. 영화가 터무니없이 작위적으로 흘러가는 것도 당연하다고 해야겠습니다.

주류가 된 ‘엽기’, 탈출구가 없다

이런 사람이 뭔가 굉장한 존재로 받아들여지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아마 여자라는 이유 때문일 겁니다. 이 나라에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여자들이 이런 짓을 하지 않는, 적어도 해서는 안 되는 동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남자들이 ‘까불면 죽어!’라고 말하면 그건 그냥 폭력적인 행동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죽어!’를 외치면 폭력성은 사라지고 그 ‘희귀함’ 때문에 ‘엽기적’인 존재가 됩니다. 웃기지도 않습니다. 그 정도의 친구들은 제 근처에도 얼마든지 있으니 말이에요. 언제나처럼 고정관념은 변하는 현실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합니다.

더욱더 슬픈 건 <엽기적인 그녀>가 그 정도의 과장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화가 후반에 접어들면 관객은 ‘그녀’의 ‘슬픈’ 과거를 알게 됩니다. 견우를 만나면서 당연하다는 듯 저질렀던 말도 안 되는 짓거리들의 원인도 연인의 죽음 때문입니다. 알고보면 그 이전에는 착하고 정상적인 애였다는군요. 뭐예요? 지금까지 한 일도 별게 없는데, 수십분을 질질 끌며 거기에 대한 변명까지 늘어놓는 것입니다! 앓느니 죽지….

이쯤해서 이놈의 ‘엽기문화’에 마구 책임을 떠넘기고 싶어집니다. 전 정말 요새 쓰이는 ‘엽기’라는 표현이 싫습니다. 재미도 없을 뿐만 아니라 유해하기까지 합니다. 그나마 간신히 살아남아 주변부에서 생명력을 유지하던 일탈적 행동과 문화들은 어느 순간부터 족쇄에 채워져 엽기의 감옥으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때까지만 해도 자유로웠던 존재들이 가졌던 독자적인 의미가 사라지는 건 당연하고요. 원래의 의미를 잃고 부서진 이 조각들은 대충 맛도 없는 ‘공장생산 엽기’ 감미료에 섞여 주류문화의 일부로 굳어버렸으니, 예전에는 그나마 가능했던 일탈적인 기능도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 미래의 역사가들은 21세기 한국문화가 이상할 정도로 갑작스럽게 심심해진 걸 발견하고 놀랄 겁니다.

남은 것은 이미 주류가 된 ‘엽기문화’에 어떻게든 끼어드는 게 튀는 거라고 착각하는 진부한 사람들의 발버둥뿐입니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도 어떻게 보면 그런 비참한 결과물입니다. 상상력도, 창의성도, 비전도 없는 사람이 순전히 빨간색 신호등을 무시하는 정도의 과격한 행동을 했다고 해서 특이한 존재가 되는 광경은 지루함을 넘어서 슬프기까지 합니다. 세상은 정말 심심하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듀나/ djuna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