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씨네클래식
“폭스사 직원을 구워삶아 토키를 처음 구경했지”
2001-08-08

이영일이 만난 한국영화의 선각자들 3 - 이필우(3)

한국영화사 최초로 발성영화 제작기법을 배우려려고 일본, 상해를 전전하다

상해에 가보니 좋은 것은, 영화 하기가 참 좋았다. 첫째 육합공사라는 것이 있어서 시나리오를 갖다 보이면 여기서 돈을 대준다. 돈을 대주는 원리는, 중국이라는 데가 ‘만주강이 몇폭이냐’ 하면 ‘열 폭이다’ 할 정도로 크기 때문에, 거지 같은 필름이라도 한동안 만들기만 하면 돈이 돌게 되어 있었다. 시설에 있어서도 “너는 어느 스타디오나 써라” 허가가 나면 몸만 가고 일체 시설은 거기서 다 대주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상해도 역시 아직은 무성영화시대였지만 기계에 대해서는 놀랐다. 카메라는 바르보와 베른호엘(벨 앤드 호엘- 필자)을 쓰고 있었는데 제임스 왕(제임스 웡 호우이,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중국 출신 촬영감독- 필자)이 일년마다 와서 전부 코치를 해준다. 자기네 기술을 팔아보자 그런 뜻이 있었겠지만 참 쓰기 편하게 만든 것들이 많았다.

그래 대중화백합영편공사(당시 국제적인 영화 도시이던 상해의 메이저급 스튜디오- 필자)에 있으면서 경손이하고 둘이서 사진을 백이는데, 이 말이 통해야지. 그때 통역을 해준 것이 나중에 <자유만세>를 찍게 되는 전창근이다. 암만 해도 한국 일이 궁굼해서 상해에는 한 이년 못 미쳐 있었다. 돌아와서 처음 맞은 것은 소위 찬영회 사건이다. 와서 보니 운규가 어디 가고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동생 명우도 얘기를 안 해주고, 단성사에서도 쉬쉬했다. “모두 있는 데서 운규를 찾으면 어떡허느냐”고 조용히 가르쳐줘서 찾아가보는데, 운규가 훈정동 쪼꼬만 초가집에 숨어 앉아서 파랗게 질려 있었다.

“너는 의리부동한 놈이야” 하며 나운규와 절연

찬영회라는 것은 신문사 문화부에 있는 기자들이 주도해서 만드는 모임이다. 일년에 한번씩 사람들을 모아놓고 ‘어느 사진은 좋았다, 어느 사진은 나빴다, 한국영화는 이렇게 되면 되겠다’ 그런 걸 의논하는 자리다. 이때 싸움이 난 것은, 기자들의 행실이 부당하다 하여 영화인들이 화가 난 때문이었다. 신문기자들이 한국영화를 위해서 좋은 세력으로 역할은 못해줄 망정, 도리어 수입이나 뺏고 여배우들이나 불러다 앉히고. 괴롭힘이 도에 넘치니, 팔팔한 친구들이 전부 일어선 것이었다. 신문사 들어가서 때려부수고, 기자들 집으로 찾아다니고. 난리 속에 김영호라고 기자 하나가 경찰에 찔러넣은 것이 계기가 되어 그때서야 수습이 되었다. 그 통에 운규는 초가집에 들어가 숨어 있고 복혜숙이, 이원용이(<낙화유수>(1927) 등에 출연했던 배우이자 제작자- 필자), 몇 사람이 종로서에 잡혀 들어갔다.

다들 풀려나오자 운규는 <아리랑 후편>을 만들기 시작했다. 촬영은 명우가 했고, 나는 현상을 부탁받았는데, 이때 서양사진이 하나 들어왔다. 레코드와 필름을 동시에 돌리는 식의 발성영화였다. 저런 것 같으면 우리도 못 쓸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규하고 명우를 모아놓고, “나는 일본에 들어가서 가능성을 타진해볼 테니, 필요하다거든 돈을 보내라”고 뒤를 봐두고 일본으로 들어갔다. 가서 ‘미나토키’의 미나가와를 찾아갔다. 앞으로 레코드를 많이 살 테니 한장 레코딩에 십 원만 받자고 떡 계약을 해놨는데, 한국에서 돈이 오지 않았다. 일주일을 여관에서 참다가 할 수 없이 시계를 저당잡히고 나오고 말았다.

들어와 보니 이놈들이 평양에서 사진을 백이고 있었다. 그 사진을 백여놔야지만 돈이 나온다는 계산이었다. 이때 백인 것이 <철인도>다. 이 영화는 줄거리랄 것도 없고 그냥 오락활극인데, 그걸 해놓고도 돈은 되지 않았다. 그래 이번에는 배구자 남편 홍순언하고 얘기를 했다(배구자는 무용가, 홍순언은 경영자로서 이들 부부가 훗날 ‘동양극장’을 개관, 운영하였다- 필자). “발성영화를 하려는 의욕인데, 자금이 없다. 배구자 공연에 운규를 무대 출연시켜주는 대신 돈이 되거든 영화를 백이게 해달라”고 협의가 돼서 배구자 일행을 따라 흥행을 다녔다. 원산을 돌아서 성진, 옹진, 횡성을 돌았다. 기억에 남는 것은 배구자 동생하고 배구자가 연극하는 <윌리암 텔>의 사과 쏘는 장면, 그게 좋다고 손님이 많이 들었다.

하루는 운규가 배구자를 어떻게 헐려고 한 모양이었다. 흥행은 엉망이 되고, 서울로 올라와 버렸는데 운규가 따라 올라왔다. “넌 의리부동한 놈이다. 너 같은 놈이 영화를 백이면 영화가 썩은 영화밖에 안 나와. 너하고 나하고 헤어지자. 십년 후에 다시 만나자.” 그 길로 단성사 문간에서 절연해버렸다. 자금은 자금대로 안 되고, 운규하고도 틀어지고 금천으로 내려가버렸다. 얼마 후에 홍순언씨가 다시 찾아왔다. 배구자 극단의 일본 공연에 동행해달라는 제안이었다. 자금이 모이거든 영화를 백이자는 그 조건으로 일본에 들어가게 됐다. 가는 곳마다 어찌나 손님이 많은지, 거기서 번 돈으로 바르보 카메라를 하나 샀다. 또 조금 벌며는 아이몬(벨 앤드 호엘사의 아이모 카메라- 필자)을 하나 사고, 그리고 사진은 <춘향전>을 백이자고 일을 진행시켜놓고 나는 나대로 계획이 있었다.

일본인들과 함께 발성영화 기술을 연구하다

일본에 온 목적이 발성영화고, 발성영화라고 하는 것은 테레비의 부산물이니 그걸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일행과 헤어졌다. 나서긴 나섰는데, 마땅히 수업을 받을 사람도 없고, 있다고 한들 어떻게 줄을 타서 들어가는가? 궁리중에 일본전신전화주식회사 사장을 찾아갔다. 이 양반은 독일에서 손기정씨가 마라톤을 할 때 그 전송사진을 보내기 위해서 처음으로 기계장치를 했던 분이다. 송신장치로는 일본도 초기단계에 있을 때였다. 명함을 내밀었더니, 시험단계에 있는 시설을 맘 좋게 보여주어서 익힌 일이 있다.

일본에서 맺은 더 중한 인연은 이 양반의 소개로 만난 쓰치하시(土橋)다. 쓰치하시는 무성영화 때 상설관 악사로, 바이링(바이올린- 필자)을 하던 사람이지만, 자신의 집에 기계를 들여놓고 토키를 연구중이었다. 가서 보니 기계는 엉터리였고 이 방면으로 더 잘하는 사람이 있다 해서 나까가와(中川)를 소개받았다. 세 사람이 비용을 모으고 머리를 짜내면 일이 되지 않겠는가. 그래 쓰치하시와 나까가와는 암푸(앰프)를 맡기로 하고 나는 레코다(레코더)를 맡았다.

발성을 실현하자면 쓰치하시가 연구하던 장치의 고민을 해결하는 것이 문젠데, 마침 상해에 있을 때 폭스의 기계를 본 일이 생각났다. 그때는 폭스의 뉴스 촬영반이 상해에 와 있었다. 건너가서 힌트를 얻어오기로 하고 상해로 떠났다. 토키의 실물을 좀 보여달라고 서양놈한테 사정을 했는데, 특허품이라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거절당하고 대신 뉴스반을 따라다니는 짜이나(차이나- 필자) 놈을 구워삶아서 몰래 보고 나왔다. 그 원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넓은 걸 좁힌 건데, 이 식이라면 RCA(미국의 전기방송회사. 1920년대 후반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들의 사운드 체계는 상당부분 RCA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필자)에서 먼저 사용하고 있었다.

일본으로 돌아와 보니 두 사람이 암푸를 만들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광선이 필름으로 나오는 그 원리를 소개하기 전에 조건부터 걸었다. 일본에 있는 것은 너희 둘의 권리가 분명하되, 한국에 나가서 내가 무슨 일이 있든 와서 봐주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계약서를 썼다. “인제 얘기하마. 렌즈가 끝이 뾰족하고 납작하게 되어 있드라. 큰 불이 들어가는 이것이 좁아져서 나온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속았다고 야단이 났다. 그 원리대로 쓰치하시의 기계를 손본 뒤에 실험해보니 제대로 되었다. 그 장치로써 일본의 발성영화로 처음 나온 것이 <마담과 아내>다(<마담과 아내>(1931)는 일본영화사에서도 완벽한 토키 제작의 효시로 기록하고 있다- 필자).

일본에서 성공하는 것을 보고 나는 나대로 발성을 실현할 생각으로 한국에 나왔다. 단성사 박정현씨를 찾아가 투자를 허락받아놓고, 우선 암푸만 만들어서 테스트해 보였다. “암푸에 깜빡깜빡 하는 것을 필름에 갖다가 반사만 시키면 되는 것이다.” 설명을 듣고 감탄은 하고서도 돈을 대주지 않았다. 그러면, 돈을 벌어다주면 이걸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럼 그럭하라고.

일본에 편지를 해서 서양사진을 하나 가지고 나오게 했다. <에무>(프리츠 랑의 - 필자)라는 사진이 왔다. 참 생각이 없는 노릇이지, 발성영화를 보냈으니, 영사기계가 있어야 영사를 하지. 울화통이 치밀어서 아예 보통영사기를 하나 뜯어서 만들었다. 그걸 메고 내가 직접 흥행을 다녔는데 신통치 않았다. 문예영화들은 통 보지를 않는다. 문화영화배급소(이필우는 1923년 그리피스의 <동도>를 시작으로 이곳을 통해 외국영화를 수입, 배급하였다- 필자) 때도 <파우스트> <카리가리 박사> 모두 들여와 봤지만 천명도 안 들었다. <에무>가 손님이 안 든 이유는 말을 모르기 때문에, 발성영화 그거 시끄럽기만 하다 그거지. 자금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 흥행도 실패했고, 만든 영사기계를 어디다 팔려고 해도 팔리지 않고, 한국에서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일본으로 들어갔다.

정리 이기림/ 동국대학교 영화과 석사과정·이영일 출판 프로젝트 연구원 marie32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