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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준·정성일의 종횡4담 [6] - 문/답
2001-02-22

-현존 최고의 감독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김홍준 | 거장들의 세기가 저문 마당에, 현존 최고의 감독을 꼽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존 포드, 오즈 야스지로, 루이스 브뉘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로베르 브레송 중 한명이라도 살아 있다면, ‘현존’ 최고의 감독으로 주저없이 꼽았겠지만. 차라리 도박하는 심정으로, 데뷔를 앞둔 아시아(동쪽 끝 일본에서 서쪽 끝 이란까지)의 모든 감독 중 미지의 그 누군가가 현존 최고의 감독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정성일 | 허우샤오시엔. 자신의 인물들에 대한 예의, 이야기를 향한 시선, 역사에 관한 근심, 그 안에서 종종 영화의 이미지조차 넘어서는 작가의 자아,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창조의 경이. 내게서 타르코프스키 이후 ‘가장 심금을 울리는’ 예술가.

-무인도에 갇혀 10편의 영화밖에 볼 수 없다면.

=정성일 | 무인도에 가지고 가고 싶기 때문에 이 명단은 ‘내 삶의 걸작’ 리스트가 아닙니다. 가지고 가서 위로받고 싶은 명단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성냥팔이 소녀> (바리스 바르네트) 보쉬의 그림이 내 눈앞에서 살아서 움직인다. 눈 덮인 나라에서 한 소녀가 성냥을 팔기 위해 돌아다니는 그 걸음걸이를 따라 펼쳐지는 만화경.

<어셔가의 몰락> (장 엡스탕) 에드거 앨런 포의 고딕 상상력이 인상주의 흑백 수채화 안으로 걸어들어온다. 아무 말도 없이 무성영화의 침묵 안에서 그 무언가 웅성거린다. 상상력의 하염없이 깊은 우물 안으로의 추락.

<분노의 날> (칼 드레이어) 마녀사냥 속에서 한 여자의 운명이 결정된다. 그리고 그 운명은 거스를 수 없다. 화형식의 순간 영화사상 가장 아름다운 누드 장면이 등장한다. 잔인한 예술로서의 영화에 관한 가장 매혹적인 증명의 순간.

<사야트 노바>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이미지의 양탄자. 그 모든 영화문법을 무시하고 자유자재로 상상력에 따라 이끌리는 대로 구비문학과도 같은 세상을 만든다. 또는 이야기의 폴리포니.

<부운> (나루세 미키오) 일단 한번 시작하면 도무지 중간에 멈출 수 없이 서러운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슬픈 사랑의 영화.

<산타 할아버지는 푸른 눈을 가졌다> (장 외스타슈) 도시에서의 상상력, 또는 68년 5월을 기다리는 불가능한 동화.

<이탈리아 여행> (로베르토 로셀리니) 목적없는 여행에서의 길 잃기. 그럼으로써 비로소 자기가 서 있는 장소의 역사적 인과성이 빚어낸 현실에 눈뜨기, 또는 눈을 뜨는 것이 이끌어낸 불안의 의식. 더 없이 어울리는 무인도 영화.

<낯선 여인으로부터 온 편지> (막스 오퓔스) 아직 영화가 도착하지 않은 19세기적 산문의 글쓰기 안에서 기억과 추억, 후회, 연민의 사중주가 들려온다. 두번의 세기가 만들어낸 문턱을 넘어서서 이끄는 낭만주의 마지막 환영.

<따로 또 같이> (장 뤽 고다르) 물론 이 영화가 고다르의 최고 걸작은 아니다. 어떤 순간마다 고다르는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숨바꼭질을 벌이는데, 지금은 이 영화를 가장 좋아한다. 탭댄스를 추는 카페 장면은 내가 알고 있는 최상의 뮤지컬이다.

<남국재견> (허우샤오시엔) … 나는 이 영화가 정말 좋다.

-개인 아카이브를 만든다면, 필름으로 소장하고픈 영화 10편.

=김홍준 |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면, 현실을 무시하고 상상의 아카이브 목록을 만드는 쪽을 택하겠다. 무순.

멜리에스의 모든 영화. 특히, 손으로 채색한 ‘원초적 컬러’ 영화의 원본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스탠리 큐브릭), 70mm, ‘새로 뜬’ 프린트.

<아라비아의 로렌스> (데이비드 린), 70mm, 복원판, 역시 ‘새로 뜬’ 프린트

<버티고> (앨프리드 히치콕), 70mm, 복원판, 디지털 사운드 프린트.

<공산영우> (호금전), 35mm, 프린트.

<인지구> (관금붕), 35mm, 프린트.

<스토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정확하게 색보정된 35mm 프린트.

<현해탄은 알고 있다> (김수영), 35mm, 복원판(잃어버린 네거티브나 프린트를 찾아낼 수 있다면…).

<바보들의 행진> (하길종), 35mm, 감독판(검열에서 잘려나간 신들을 살려낼 수 있다면…).

<만다라> (임권택), 35mm, 복원판(훼손된 네거티브를 원래의 상태대로 완벽하게 되돌려놓을 수 있다면…).

-한편의 영화를 만들 기회가 생긴다면,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가.

=김홍준 | 질문 속의 ‘기회’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야말로 아무런 조건없이 마음대로 만들 수 있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영화의 본성에 어긋나는 의미없는 질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제한과 구속과 부족 속에서 만들어질 수밖에 없으며, 우연과 실수와 사고없이 만들어지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른바 차기작, 또는 언젠가 만들어보고 싶은 영화에 대하여 묻는 것이라면 간단하게 대답하겠다. 나의 소년 시절 또는 청년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내 주변 사람들이 살아가던 모습과 나의 ‘오래된 자화상’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야무진(?) 꿈이 있음을 고백한다고.

=정성일 | 나는 경험적으로 만들고 싶은 영화가 만들어지는 순간 이미 그 영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은 불가능한 프로젝트이다.

-이 한 마디 (내가 좋아하는 영화인의 어록)

=김홍준 | “영화는 꿈이지만, 관객은 꿈꾸어서는 안 된다.”(장 뤽 고다르)

“영화는 내가 세상을 대하는 예의입니다.”(허우샤오시엔. 2000년 2월 비오는 날 타이베이 그의 집에서)

=정성일 | “나는 번번이 여기서 마지막을 맞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영화는 나를 다시 시작하게 만듭니다.”(왕가위, 2000년 서울 청담동 2046 앞 골목에서 오후의 햇살을 맞으며)

“영화가 아니면 다른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지아장케, 1999년 베이징을 떠나기 전날 그의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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