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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상사가 아니꼽다구?
2001-02-23

<왓 위민 원트> 보며 떠오른 아줌마의 산전수전

일확천금의 꿈을 흘려보이며 닷컴사업의 눈먼 물결이 한국을 집어삼킬 듯하던 때가 있었다. 실은 그리 오래 전도 아니다. 정작 무엇을 통해 돈을 벌 것인가에 대한 묘안도 없이 누구나 다 인터넷 업계에 솔깃해 하던 시절, 그래서 하루에도 기백개의 신생회사들이 생겨나고 전체 사장 수와 사원 수가 비슷해지던 그 시절, 심지어는 나한테까지 제안이 들어왔다. 자그만 규모였고 비록 모든 실권은 오너가 쥐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명색이 CEO로 스카웃이 되니 처음 얼마 동안은 얼떨떨한 채로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사장이라는 자리는 지각해도 아무도 뭐라 그럴 사람 없다는 점 외에는 하나도 좋을 게 없는 자리였다. 누구랑 밥을 먹어도 내가 다 사야 하고 잠깐 땡땡이를 치고싶어도 꼬셔낼 사람이 없(모든 직원은 사장이 ‘늘’ 열심히 일한다고 믿어야 하므로)다는 등의 사소한 문제들부터, 일이 잘 안 풀릴 때도 도대체가 누구를 붙잡고 함께 걱정을 할 수가 없으며, 비전이 안 보일 때도 비전이 안보이는 내색을 할 수가 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수익이 별로 날 것 같지 않은데 투자자들 모아놓고 엄청나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약을 팔아야 하며, 다른 곳에서 잘나가고 있다가 내 유혹을 받고 옮겨온 직원들의 앞날을 내가 과연 책임질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머리를 싸매야 하는 등 정말 첩첩산중이었다. 물론 대충은 각오했던 터였지만.

그런데 정말이지 눈곱만치도 예측 못한 난관도 하나 있었다. 개발을 맡은 남자팀장이 나를 대놓고 거부하는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 내가 여자라서였다. 슬슬 약올리고 물먹이는 수준의 희롱이나 차별이라면 나도 10년 가까이 직장다니면서 산전수전 다 겪어본 사람이다. 나뿐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여자 직장생활의 역사란 성희롱 및 성차별과의 투쟁의 역사다. 직장생활 오래한 여자치고 무용담 한보따리 없는 사람 없을 것이다. 최말단 시절 나는 내 다리를 더듬던 상사 손가락에 걸려 스타킹이 찢긴 적도 있고 여자동료를 인정할 수 없던 남자동기에게 가파른 계단 꼭대기에서 걷어차여 입원한 적도 있으며 너 같은 새끼 내 손으로 죽이고 개값을 물겠다며 칼을 들고 대로를 질주한 경험도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렇게 나를 대놓고 거부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냉랭하면서도 형식적인 예절은 지켰다. 이용하려 들지도 않았고 능글거리는 일도 전혀 없었다. 그는 그저 오너를 찾아가 말했을 뿐이다. 나는 동갑내기 여자를 내 상사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저 여자가 사장으로 있어야 한다면 내가 나가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한 사실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나를 당황시킴으로써 쾌감을 느끼려는 것이 아니었다. 굳이 나를 몰아내자는 것조차도 아니었다. 그저, 여자를 상사로 두고는 숨조차 쉴 수 없다는 절박한 ‘사실 그 자체’를 보고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상사가 여자라면 자기는 멀쩡히 해오던 일조차 못하겠다는 것, 세상에 이렇게나 지독한 성차별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왓 위민 원트>는 그저, 안 그래도 여자 킬러였던 멜 깁슨이 심지어는 다정함과 이해심까지 겸비해 더욱 끝내주는 매력남이 됐다는 얘기에 그친 영화였다. 여자들의 숨은 다양한 생각들이 더 많이 드러나고 그래서 엄청 마초인 주인공이 훨씬 더 당황했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나는 헬렌 헌트 덕분에 영화가 즐거웠다. 우와, 멋있다…. 똑똑하고 창의적이고 깔끔하고 세련되고 돈도 잘 벌고 저렇게 따뜻하기까지…. 만약 멜 깁슨이 여자생각을 엿듣는 능력이 생기지만 않았다면 헬렌의 활약이 정말 볼 만했을 텐데. 취임 제일성(第一聲)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회사와 시장에 대해 칼같이 파악하고는 직원들 허를 찌르는 제안으로 취임연설을 마무리한 것이다. 저렇게 해야 했는데…. 내가 너무 능력이 부족했던 걸까. 물론 저렇게 압도적인 실력차로 제압할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인 거겠지. 그 팀장을 몇번 불러서 얘기해 봐도 전혀 나아지는 것이 없자 나는 마침내 그를 다른 계열사 프로젝트로 보내버렸는데, 결국 또다른 여자가 그 팀장의 직속상관이 되던 날 그는 회사를 아예 그만두었다.

물론 그냥 즐겁자고 만든 로맨틱코미디지만, 그리고 여자 상사와 남자 직원과의 갈등은 그저 영화 줄거리를 빚기 위한 잔재료 중 하나였겠지만, 그래도 난 묻고 싶었다. 성적 매력이 부족한 여자 상사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더구나 모든 남자 직원이 매력적인 것도 아니잖아. 사랑에 빠지는 것 빼고, 또 어떤 해결책이 있나요? 남자 상사는 대충의 실력만 있어도 직원들을 부릴 수 있는데 여자 상사는 반드시 탁월한 실력차를 보여주어야만 그 자리를 보전할 수 있다. 남자 대부분이 맡을 수 있는 자리를 여자는 빼어난 극소수만이 차지할 수 있다. 빼어난 극소수에 속하지 못했던 나는 결국 몇달 뒤 짧았던 사장 생활을 접었다. 능력에 부쳐 사직한 것이니 그가 나를 무시했던 것은 일리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내가 그때 어떻게 행동했어야 좋았던 것인지를 알 수가 없다.

오은하/ 대중문화평론가 oheunha@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