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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의 지지자, 세태풍자의 달인
2001-02-23

심산의 충무로작가열전 - 오영진 (1916∼74)

맹진사는 세도가가 되려는 야심에 판사집 아들을 사위로 맞으려 한다.그러나 겨우 혼약을 받아놨더니 그 집 아들이 절름발이라는 소문이 나돈다. 진퇴양난에 빠진 맹진사는 결국 잔꾀를 낸답시고 딸의 몸종을 대신 시집보내는데 막상 결혼식 당일날 확인해보니 상대는 늠름한 청년이었다. 1943년에 집필된 오영진의 오리지널 시나리오 <맹진사댁 경사>의 스토리라인이다. 흥겨운 전통문화 속에 배꼽잡는 세태풍자를 솜씨좋게 버무려넣은 이 작품은 1956년 이병일 감독에 의하여 <시집가는 날>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면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베를린영화제와 시드니영화제에 출품되었으며, 아시아영화제에서 각본상과 희극상을 수상하는 등 각계의 상찬을 한몸에 받은 당대의 수작이다. 1962년과 1977년에는 각각 이용민과 김응천에 의해 리메이크되었으며, 현재까지도 각종 연극무대나 방송사의 마당극으로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명실공히 우리 시대의 고전으로 자리잡고 있다.

오영진 작품세계의 핵을 이루고 있는 것은 전통문화의 영상화와 통렬한 세태풍자이다. <시집가는 날>에서 행복하게 결합돼 있던 이 양대 축은 이후의 작품에서 각기 다른 식으로 변주된다. 전통문화의 탐구와 영상화는 <배뱅이굿>과 <대심청전> 그리고 <한네의 승천>으로 이어지며, 통렬한 세태풍자는 오리지널 희곡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를 영화화한 <인생차압>에서 그 정점을 보여준다. 사기와 횡령 그리고 탈세를 일삼던 악덕기업주 이중생이 위장자살쇼를 벌이려다 일이 꼬이는 바람에 예기치 못했던 최후를 맞게 되는 과정을 그린 것이 김승호 주연의 <인생차압>인데, 이중생이 김우중으로 바뀌었을 뿐 지겹게도 반복되는 이 나라의 파렴치한 천민자본주의의 속성을 코미디 형식에 담은 세태풍자극이다. 역시 당시 혼란스러웠던 1950년대의 세태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이 작품에는 코미디의 요소가 전혀 없다. 악질두목에게 착취당하고 있는 10대의 소매치기집단을 다루고 있는데, 당시 7살의 안성기가 화면의 한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어 이채롭다.

오영진은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헤쳐온 사람이다. 평양에서 출생한 그는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하는 바람에 양정사립보통학교에서 평양고등학교로 전학가게 된다. 경성제국대학(현재의 서울대) 문과에 재학중일 때부터 단편소설들을 발표하며 문재를 날리던 그는 졸업 직후인 193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발성영화제작소에 입사하여 도요다 시로오(豊田四郞) 감독의 연출부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조선일보>나 <조광> 등에 선진영화이론의 소개와 영화평들을 발표한다. 1945년 해방 당시 평양에 있는 그의 집에는 조만식이 기거하고 있었다. 그의 부친인 오윤선 장로가 평양숭인상업학교를 운영하고 있던 민족운동가였던 인연이다. 지식인 청년 오영진은 조만식을 도와 평남건준위를 건설하고 그해 겨울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중앙위원에 임명된다. 그러나 소군정하의 북한정치현실은 그에게 고통만을 안겨주었다. 오영진은 북한내무성으로부터 발탁되나 이를 거절하고 월남한다. 1948년에는 남파된 테러리스트로부터 3발의 총탄을 맞는 끔찍한 사고를 당하나 구사일생으로 목숨만은 건진다. 이후 그가 열렬한 반공주의자가 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오영진은 살아 생전 10편의 시나리오와 14편의 희곡 그리고 110편에 이르는 영화평론을 남겼다. 일찌감치 영화에 뜻을 둔 그가 그토록 과작의 시나리오만을 남긴 데에는 또다른 일화가 있다. 1959년 그의 원작 <청년>을 제작자 임화수가 제멋대로 왜곡하여 이승만을 미화시킨 <독립협회와 이승만>으로 만들었다. 오영진은 거액의 원작료를 돌려주며 개봉불허를 고집했으나 당시의 정권과 유착된 큰 주먹이었던 임화수를 당해낼 재간은 없었다. 결국 영화는 개봉되고 오영진은 그런 영화현실에 염증을 느껴 충무로와 거의 인연을 끊다시피했다고 한다. 그의 사후 15년 만에 범한서적에서 6권짜리 <오영진 전집>을 출간하였는데 이중 제3권과 제4권에 그의 시나리오들이 실려 있다.

심산 | 시나리오 작가 besmart@netsgo.com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56년 이병일의 <시집가는 날> ⓥ ★

1957년 양주남의 <배뱅이굿>

1958년 유현목의 <인생차압>

1959년 김기영의 ★

1962년 이용민의 <맹진사댁 경사>

이형표의 <대심청전>

1965년 정창화의 <살인명령>

1977년 하길종의 <한네의 승천> ★

김응천의 <시집가는 날>

ⓥ는 비디오출시작

★는 자(타)선 대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