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Culture > Enjoy TV > TV 가이드
한없이 불투명에 가까운 순위
2001-02-23

왜 가요순위 프로그램 폐지운동이 일어나는가

판에 한참 열이 오르고, 손에 땀을 쥐는 긴장과 희비의 순간이 교차하면 누군가는 얻고, 누군가는 잃는다. 이것이 게임이다. 결과적으로야 돈이나 점수를 따는 것이 게임의 궁극적 목표겠지만, 사실 진정한 게임의 맛이란 그 ‘똥줄타게’ 초조하고 흥미진진한 과정 속에 있다. 그래서 과거 우리의 아버지들은 집안 무너지는 줄도 모르고 노름방의 유혹에 마약처럼 빠져들었던 걸까? 주말 프라임 시간대에 내보내는 가요순위프로그램 KBS <뮤직뱅크>, MBC <뮤직캠프>, SBS <인기가요>는 누가 봐도 게임이라는 형식을 표방하고 있다. 시작과 함께 오늘의 1, 2위를 경합하는 노래가 무엇인지를 공지하면 무대에 서서히 열이 오르기 시작한다. 끝날 때가 돼서야 1위 트로피의 주인공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그사이 50위권 안의 노래를 즐기는(?) 과정을 겪고 중간중간 ARS투표를 부추기는 MC들의 합창소리를 들어야 한다. “A가수를 원하면 1번!, B가수를 원하면 2번!” 마치 이 프로그램은 경쟁(Competition)프로그램입니다를 쉬지 않고 재확인시키듯이.

출연횟수와 음반판매량은 비례관계

요사이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와 국회위원 정범구, 심재권 의원이 “가요순위프로그램을 폐지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지난 2월8일엔 국회에서 ‘대중음악개혁을 위한 정책포럼’ 중 처음으로 ‘가요순위프로그램 폐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포럼을 열기도 했다. 하지만 방송사에서는 쉽게 폐지할 의사를 내비치지 않는다. 순위프로그램은 그 옛날 <가요톱10>부터 방송사가 가장 애용하는 포맷이며 시청자들을 단시간에 프로그램에 집중시키는 가장 편하고 검증된 형태다. PD들은 “그 시간대가 어차피 10대 시간대이고 청소년용 프로그램인데” 여러 가수를 동시에 볼 수 있고 별다른 구성고민도 필요없는 만만한 프로그램을 굳이 없앨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NGO에 국회의원까지 나서서 가요순위프로그램을 교수형시키려는 의도는 무얼까? 그 죄값이 얼마나 크기에 ‘변화모색’ 정도가 아니라 ‘폐지’라는 말이 나오는 걸까. 방송사에서 순위프로그램이 가지는 권력은 파시즘에 가깝다. 순위프로그램 출연횟수가 음반판매를 좌지우지하다보니 가수들의 출연 섭외는 아예 통고가 되어버린다. “내일 몇시 녹화다, 몇시까지 나와라.” 가수들이 3개월쯤 활동하고 ‘아듀’니 ‘컴백’무대를 갖는 요즘은 어느 방송사 순위프로그램에서 ‘컴백’무대를 가졌는가가 가수들의 그 분기 활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일종의 괘씸죄를 적용하는 거죠.” 순위프로그램의 한 작가에 따르면 만약 한 가수가 MBC <음악캠프>에서 컴백무대를 가졌다면 그 주에 다른 방송사의 <뮤직뱅크>나 <인기가요>에는 자연적으로 출연이 어렵고 한주 건너서야 출연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니 매니저는 매니저대로 어디에서 컴백을 하는 것이 손해를 덜 볼 것인가 머리를 굴리고, PD는 PD대로 “요것들이 어디에 나오는지 두고보자”며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가수들이 오락프로그램의 ‘개인기’ 코미디언으로까지 소비되는 실정에서 순위프로그램은 희귀성 가요프로그램이 되어버렸다. 웬만한 오락프로그램에서 매번 볼 수 있는 듀크의 한 멤버는 “10번 웃기면 한번 노래부르게 해준다.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말을 방송에서 농담처럼 했지만 그 말은 결코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현실이다. 다시, 순위프로그램에서 찍히면 그 방송사의 여타 프로그램에서 활동하기가 쉽지 않으니, 이건 악순환이다.

서태지의 반란,어쩌면 자승자박

이런 방송사와 가수들간의 헤게모니의 전복을 가져온 것이 서태지였다. 그는 새롭게 활동을 시작하며 무슨 이유에서인지 MBC <음악캠프>에만 스페셜 형식으로 자신의 무대를 허용했다. 그리고 100만장의 음반판매고를 올린 서태지는 MBC를 제외한 두 방송사의 순위에서 아예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현재 KBS <뮤직뱅크>의 CP이자 <이소라의 프로포즈>를 만들었던 박해선 PD는 서태지를 방송쪽에서 배제한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서태지 매니지먼트쪽에서 컴백하고 방송출연하는데 10억원을 내라고 했다. 그러자고 했다. 우리 프로그램에서 (다른 가수들은) 보통 1곡을 부르는데 3곡을 하자고 하더라. 그래서 또 그러자고 했다. 하지만 서태지쪽에서 방송사 장비로 내 사운드를 잡아내려면 10시간도 넘게 걸릴 거다, 그러니 사전녹화를 해서 편집도 직접 해서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는 못한다고 했다. 그러자 서태지쪽에서는 그렇다면 순위프로에서 빼달라고 해서 빼게 되었다” 서태지 팬클럽 관계자는 출연료와 관련해 “이번 매니지먼트를 담당한 양군기획에서 이미 사실과 다르다는 해명을 들었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출연료 액수를 떠나 박 PD의 발언에는 순위프로그램 자체의 모순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음악평론가 신현준씨는 “내거 빼주시오 하면 빼준다는 건 순위프로그램의 순위가 이미 그 공정성을 잃었다는 얘기다. 서태지같이 방송사의 파시즘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가수가 나와 방송사를 선택하는 식으로 헤게모니가 이동한 것도 어쩌면 순위프로그램이 자승자박한 꼴이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게임의 규칙을 지켜라

‘경쟁’이나 ‘순위’ 자체는 죄가 없다. 일부에서 제기하는 “댄스 위주의 노래가 가요를 망친다”는 주장 역시 그것을 소구하는 층이 방송의 큰 고객임을 감안할 때 댄스음악시간에 ‘트롯 4인방’만 나오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사실 순위프로그램의 시청률이 다른 프로그램에 비해 월등히 높은 것도 아닌데 방송사에서 이 포맷에 집착하는 부분도 순위프로그램을 통해 주요 소비층인 10대를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묶어놓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 하지만 앞서 얘기한 대로 순위프로그램이 하나의 게임형식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을 즐길 수 있는 밑바탕은 게임의 규칙을 지키는 것이고 경쟁이라면 경쟁의 근거가 되는 자료의 투명성에 있다. 대중음악평론가 강헌씨는 “예술엔 순위가 없는 것이지만 상품엔 순위가 있다. 가요를 예술로 보느냐 상품으로 보느냐에 대한 논쟁을 뒤로 하고 순위프로그램에서 근간이 판매량이라면 공정한 집계를 통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지금, 당장 폐지돼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에 짜고 치는 고스톱만큼 김빠지는 건 없다. 짜고 치는 판이라는 걸 알았을 때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하고 명쾌한 결론은 하나다. 그냥 판을 엎는 거다.

백은하 기자 luci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