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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체를 향한 적나라한 시선
2001-02-23

로제 바딤 감독의 <위험한 관계>

Les Liaisons Dangereuses 1959년,

감독 로제 바딤

출연 잔 모로, 제라르 필립

EBS 2월17일(토) 밤 9시

“여자가 섹스를 한 뒤 돈을 원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왜 그녀를 매춘부라고 생각하겠는가?” 로제 바딤 감독이 필모그래피보다 브리지트 바르도, 카트린 드뇌브, 제인 폰다 등으로 이어진 여배우들과의 추문으로 더 명성을 얻었다는 사실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데뷔작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에서 화면을 꽉 채우는 브리지트 바르도의 육체의 스펙터클을 과시했던 바딤 감독은 앙드레 바쟁 같은 평론가로부터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치졸한 영화”라는 험담을 들었음에도 그의 필모그래피는 이후 큰 변화가 없었다. 로제 바딤 감독의 1959년작 <위험한 관계>는 18세기 프랑스 작가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소설을 영화로 각색한 것이다. 중세시대 유럽 귀족의 퇴폐적인 성생활을 묘사한 이 원작은 이후 스티븐 프리어즈 감독이 동명의 영화를 만들었으며 최근 청춘영화로 개작된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변형된 바 있다.

<위험한 관계>는 배경을 스위스의 한 스키장으로 옮겨놓는다. 줄리에트와 발몽의 관계 역시 혼외정사를 일삼는 부부로 바뀌었다. 줄리에트와 발몽은 항상 쾌락을 찾아다닌다. 둘은 각각 다른 파트너와 불륜관계를 맺고 있으며 서로의 경험을 번갈아 들려주기도 한다. 여기엔 한 가지 규칙이 있다. 결코 파트너와 사랑에 빠져선 안 된다는 것. 줄리에트는 신앙심 싶은 마리안을 발견한 뒤 발몽에게 그녀의 순결을 짓밟으라고 부추긴다. 마리안에게 접근한 발몽이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서 사태는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줄거리에서 짐작할 수 있듯, <위험한 관계>는 그리 훌륭한 각색을 거친 영화라고는 할 수 없다. 원작소설에서 빛을 발했던 쾌락에 대한 찬탄의 태도는 그대로 빌려오고 있되, 사랑에 대한 비유라든가 도덕적 감정교육에 대한 통찰력은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로제 바딤은 여성을 고혹적이고 아름다운 ‘정물’로서 포착하곤 했던 재주를 여전히 과시하고 있다. 잔 모로 등의 여배우가 반라와 전라의 모습으로 출연하고 있는데 그녀들의 가슴, 그리고 손과 발에 이르는 신체 부분에 대한 카메라의 집요한 관찰은 가히 페티시즘의 절정이라는 수식어를 달기에 부족함이 없다.

<위험한 관계>는 개봉 당시 프랑스 비평가들로부터 “형편없는 실패작”이라는 만장일치에 가까운 평을 들었다. 문학과 영화 사이의 관계, 즉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의 창의적 충실성에 명백하게 위반된다는 것이다. 하기사 원작을 어느 바람둥이의 극히 평범한(!) 처녀성 훔치기의 내용으로 뒤바꿔놓은 것은 로제 바딤 감독의 패착이긴 하지만 영화는 의외의 부분에서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스키장이 자본주의적인 쾌락을 가장 잘 상징하는 공간으로서 설정된다는 것, 그리고 재즈피아니스트 시로니어스 몽크의 명쾌하게 귀를 두드리는 영화음악 등이 좋은 사례다. 무엇보다 <위험한 관계>는 어쩌면 프랑스라는 국가의 표층적 이미지일 수 있는, 다시 말해서 낭만성과 향락의 외투를 걸친 영화감독 로제 바딤의 은근한 자기고백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실패작이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nuage01@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