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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 그리고 마지막 한 마디
2001-03-13

고희 기념 <말미잘>을 찍다

“팔을 꺾어줄까, 발을 뭉개줄까?”

이 말은 도시 재개발지구에서 싼값에 못 나가겠다고 버티고 있는 가구들을 철거용역회사의 깡패들이 ‘대통령령’이라며 무자비하게 철거시킬 때 흔히 나오는 말이라 한다.

마포구 현석동에 살고 있는 나의 단독주택도 시가의 절반 수준으로 내쫓겠다고 하니 늘그막에 기가 차서, 또한 공포분위기에 이 글을 계속할 수 없어 미진하지만 이 글을 마감할까 한다.

<사람의 아들>(이문열 원작)을 꼭 해야겠다는 결심은 <순교자>의 기독교인들의 반란의 오해를 메워보겠다는 간절한 소망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강원용 목사는 욕먹는 내편에 서서 “<순교자>는 예술이며 창작물이다. 변역된 소설이 문제작으로 부상하면서 베스트셀러가 됐는데 그때는 아무 소리 못하다가 왜 영화에만 화살을 던지느냐. 이 작품의 주제는 ‘참사랑’이다”라고 하였다.

<사람의 아들>의 아주 간략한 뼈대는 이러하다. 신학대학 재학생인 요섭(하명중)은 이 고난의 시대에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자퇴하고 실천신학, 해방신학에 심취하다가, 끝내는 천막교회를 세워 영험이 없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새로운 신을 만들어, 즉 우리의 신은 선악을 가리지 않고 벌과 상을 내리지 않는다는 등의 설교를 하면서 맹종하는 젊은 제자를 시켜 살인강도로 얻은 재물로 가난한 사람들과 장애인들을 합숙시켜간다. 그렇게 이단종교의 창립자가 되어 계속해서 살인강도를 자행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요섭이 아끼고 사랑했지만 어린 시절 문둥병에 걸려 나환자촌에 보낸 소녀 한나를 오랜만에 찾아간다. 이제는 성숙해진 한나는 무척 반기며 저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교회로 끌고가면서 나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한다. 요섭은 여기에서 진정한 사랑과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깨닫는다. 불행했던 한나의 행복에 넘친 맑은 얼굴을 보고난 뒤 요섭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기도원을 찾아간다.

참회의 눈물로 철야기도를 하던 중 천막교회에 홀로 지키고 있는 독실한 젊은 제자를 찾아가 이 천막을 떠나 나와 함께 교회로 돌아가자고 한다. 그러나 완강한 제자는 이를 거부한다. 며칠 뒤 이 제자는 한밤중에 기도원을 찾아가 요섭을 불러내어 칼을 들이대고 배신자라고 소리치며 찔러버린다. 요섭은 쓰러지는 순간 하늘을 향해 “하나님! 이것으로 죄를 용서해 주시렵니까…”라고 뇌까린다.

이 작품으로 <순교자>가 뿌렸던 기독교인들의 반란을 어느 정도 중화시켰다는 세론이 있었다.

어느새 벌써 칠순이 되어 ‘고희기념식’을 올린 1990년 나의 마지막작품이 될 수 있었던 <말미잘>은 어느 작은 섬이 무대였고 체력소모가 덜한 작품이었다. 연출의뢰를 받았을 때 몹시 주저했다.

미국의 어느 심리학자가 각종 직업 중에서 정신적·육체적 종합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는 직업 중 1위가 영화감독이고, 2위가 강대국의 대통령, 3위가 전쟁중의 작전 총책임자라고 했다. 이 통계순위는 부유한 할리우드를 기준으로 했을 것이고 우리의 열악한 조건 속에서는 더욱 고통스러운 작업이기에 이 작품의 착수를 머뭇거려야 했다. 그러나 나의 체력을 테스트해 보겠다는 의지로 촬영에 착수했다. 요즘은 며칠씩 쉬어가며 촬영한다는데 그때는 비오는 날 하루이틀을 빼고는 계속 작업해야 하는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완성할 수가 있었다.

작품결과에 대해서는 대부분 유 감독의 마지막 작품이랄 수 있는 작품이 멜로여서 실망했다는 경향이었고 또 일부에서는 소품이긴 하지만 영화혼이 살아 있다는 호평도 있었다. 그 작품으로 대종상에서 ‘명예로운 감독상’, 영화평론가상에서는 ‘감독상’을 받았지만 아마도 칠순의 노장감독의 마지막 기회로 점수를 더 쳐준 것 같아 고마움을 느낀다.

올해 희수를 맞이하면서, 지난날들의 고통의 역정을 걸어온 나를 “팔을 꺾어드릴까요…”라며 ‘대통령령’으로 내쫓겠다고 하니, 문화예술가들을 돕지는 못할망정 ‘한’을 남겨주는가.

마지막으로 요즘 후배들이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룩해준 데 대해 떠나는 선배로써 크게 고마움을 느낀다. 더욱 정진하라는 뜻에서 권유하고 싶은 말은, 잔재주에만 안주하지 말고 좀더 철학적 접근에 전력해서 하루속히 세계무대에서 찬란하게 꽃피워주길 바란다.

그동안 미숙했던 글을 애독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유현목|영화감독·1925년생·<오발탄> <막차로 온 손님들> 등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