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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현역, 노병은 죽지 않는다
2001-03-16

심산의 충무로작가열전 9 지상학(1949∼)

열녀문이란 남편과의 사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정절을 지킨 여인들의 덕을

찬양하기 위하여 지어진 일종의 상징물이다. 언뜻 보기에는 대단히 훌륭한 미풍양속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극히 비인간적인 봉건적 가부장제의 장식물일

뿐이어서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썩은 악취가 진동하는 경우도 많다. 이 주제를 다룬 대표작으로는 흔히 신상옥의 <열녀문>(1962)을 꼽는다.

이 열녀문과 대척적인 위치에 서 있는 것이 자녀목이다. 자녀목은 봉건적 가부장제의 강요된 덕목을 벗어난 여인들을 목매달아 죽이던 나무다.

대학 시절에 본 정진우의 <자녀목>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멋진 몸매를 가진 원미경의 농염한 연기에 취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잔혹하기

그지없는 봉건사회의 제도적 폭력을 새삼스럽게 재확인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영화였다. 지상학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자녀목>은 국내에서도 흥행과 비평을 석권했을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크게 호평을 받아 제1회 도쿄영화제에서는 ‘세계영화 베스트30’에 선정되기도

한 자랑스러운 우리 영화다.

지상학은 본래 미술학도였다. 서울 미대 응용미술과에 재학중이던 지상학은

군복무 시절 습작삼아 쓴 시나리오 <광화문>이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자 아예 학업을 작파하고 충무로로 뛰어든 특이한 경력의

작가다. 시나리오 데뷔작은 이듬해에 만들어진 김청기의 애니메이션 <로보트 태권브이>. 지상학이 시나리오 작가로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김호선

감독과 함께 당대의 베스트셀러들을 각색하면서부터이다. 박범신의 <죽음보다 깊은 잠>, 한수산의 <밤의 찬가>, 이어령의 <세번은 길게 세번은

짧게> 등은 모두 이 시기의 수작들이다. 비슷한 시기에 그는 이외수의 <들개>를 각색한 시나리오로 백상예술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각색시나리오들 중 최고의 흥행성적을 기록한 작품은 단연 이현세 원작의 만화 <이장호의 외인구단>. 당시 침체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이장호

감독의 재기작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상학의 작가적 면모가 더욱 도드라지는 것은 오리지널 시나리오에서이다.

비록 <자녀목>만큼의 주목은 못받았지만 <박철수의 헬로 임꺽정>은 대단히 흥미로운 작품이다. 김명곤을 주연으로 내세운 이 작품은 스스로를

임꺽정의 부하라고 참칭하는 산적 똘마니의 좌충우돌 코미디를 그리고 있는데, 단역급 캐릭터를 과감히 주인공으로 내세워 흔히 알려져 있는 사건을

뒤집어보았다는 점에서 톰 스토파드의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1990)를 연상시키는 개성적인 소품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는 박철수 감독에게 연출을 맡긴 일련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들로 한국영화의 미답지였던 저예산영화의 가능성을 호기롭게 개척하고 있다. <학생부군신위>와

<산부인과> 등은 정통적인 드라마투르기 대신 에피소드의 짜깁기로 일관하면서도 관객의 흥미를 놓치지 않아 주제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새로운

형태의 시나리오였다. 언젠가 사석에서 지상학은 자신이 시나리오 작가로서 너무 외로운 세대에 속한다며 푸념섞인 한탄을 늘어놓은 적 있다.

동시대의 작가들이 모두 ‘배고픈’ 충무로를 떠나 ‘먹고 살 만한’ 방송사로 가버려 마땅히 술 한잔 나눌 동료도 없다는 것이다. 그 역시

<왕초> <만남> <은하수를 아시나요> 등을 통하여 일급 방송작가로 인정받고 있지만 지상학의 고향이자 회귀점은 언제나 충무로이다. 그는

1970년대 후반에 데뷔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매년 일정한 작품활동을 펼쳐보이고 있는 보기 드문 시나리오 작가다. 지상학이 후배작가 양성에

남다른 정열을 쏟아붓고 있는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인지 모른다. 1995년 그가 설립한 시나리오 공동창작집단 ‘창작시대’는 이 방면에서 가장

실험적이고 선구적인 업적으로 평가된다. 그는 또한 지난 몇년간 영상작가전문교육원에서 꾸준히 시나리오작법 강의를 하고 있는데, 경험에서 우러나온

현장성 강한 수업과 따뜻한 후배사랑으로 수강생들 사이에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심산|시나리오 작가 besmart@netsgo.com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76년 김청기의 <로보트 태권브이>

1979년 김호선의 <죽음보다 깊은 잠>

1980년 김호선의 <밤의 찬가> ⓥ

1981년 김호선의 <세번은 짧게 세번은 길게> ⓥ★

1982년 박철수의 <들개>

1984년 정진우의 <자녀목> ⓥ★

1986년 이장호의 <이장호의 외인구단> ⓥ

1987년 박철수의 <박철수의 헬로 임꺽정>

1988년 박광수의 <칠수와 만수> ⓥ

1991년 이석기의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

1992년 이석기의 <땅 끝에 선 연인> ⓥ

1996년 박철수의 <학생부군신위> ⓥ

1997년 박철수의 <산부인과> ⓥ★

1998년 신승수의 <엑스트라> ⓥ

ⓥ는 비디오출시작 ★는 자(타)선 대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