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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②] 우수상 김병규 작품비평 요약 - 멈춤과 움직임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샤오쓰가 주사를 맞기 위해 양호실에 도착하면 실내에는 대여섯 명 정도의 소년이 프레임 여기저기에 놓여 있다. 누군가는 의자에 앉아서, 누군가는 창문이나 시력검사표 옆에 멈춰 서 있다. 왜 이들이 이런 자세로 화면에 자리 잡고 있는 걸까. 개연성의 맥락으로는 단순히 샤오쓰와 마찬가지로 주사를 맞으려고 기다리는 학생들이라고 생각하면 충분하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기보다는 회화나 조각의 구도를 보는 것처럼 뻣뻣하고 어색한 몸짓과 배치를 의식하는 순간 장면의 시각적 형식이 무척이나 이상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 버린다.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정연하게 줄을 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도 아닌, 멈춤과 움직임의 경계선을 주시하는 듯한 인물들의 형태가 이 장면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중 한 아이가 몸을 움직여 물건을 건드리려 하자 화면 밖에서 “손대지마”라는 말이 들려온다. 움직임을 중단하고 정지 상태에 머물 것을 요구하는 강력한 주문이다. 이 장면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흡사 정물처럼 화면에 귀속된 대상이 사물이 아니라 인물이라는 점이다.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서 사물은 쉽게 손에서 사라져버리고 화면의 시야로부터 이탈하기 일쑤지만 인물은 이처럼 고정된 풍경의 일부로 무기력하게 속박되어 있다.

그러니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드라마를 이끄는 것은 인물의 심리나 서사적 사건이 아니라 이동하고 중첩되고 변모하는 사물의 양태이다. 영화가 지속될수록 인간의 감각은 서서히 흐릿해지지만 사물의 장력은 더욱 선명해진다. 샤오쓰는 전등을 켰다 끄기를 반복하면서 시력을 잃어가고, 아버지는 고문을 받고 돌아온 뒤로 트라우마를 호소한다. 인물들은 물건을 잃어버리고 이따금 그것을 망각하기도 하지만 사물은 매번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든다. 가령, 의사의 미국식 서부모자는 샤오쓰와 샤오밍이 서로 다른 자리에서 번갈아 착용하면서 소년과 소녀와 의사가 의도치 않게 맺는 관계의 복잡성을 우아한 자리바꿈으로 지시한다. 인물이 곤경으로부터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할 때, 사물은 세계의 관계망을 관통하는 연쇄적 흐름을 마술적인 위치의 변모로 통찰한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사물의 엄중한 힘이 영화 전반을 아우르며 화면 곳곳에 영향을 미치는 히치콕적인 누아르의 한 사례다.

잃어버린 것은 되찾을 수 없다. 되찾는다고 해도 전과 같을 수 없다. ‘없음’에 대한 자각은 영화에 근본적인 결핍을 드리운다. 빼앗긴 야구배트는 교무실에 놓인 뒤 시간이 지나 전구를 깨는 샤오쓰의 손에 쥐어진다. 어둠을 비추던 손전등은 불이 꺼지고 촬영소로 되돌아간다. 샤오쓰는 그 손전등으로 살해된 시체를 비추어보았다. 희미한 눈의 응시와 선명한 불빛의 시선 사이의 간극이 샤오쓰의 추락을 불러일으킨다. 샤오쓰의 손에 들린 빛이 어둠을 밝히는 순간 오작동이 발생하고 파국이 생성된다. 그러고 보면 샤오쓰를 둘러싼 관계의 오해가 촉발되는 것도 샤오쓰가 어두운 교실의 불을 켰을 때, 거기에 있던 소녀가 뛰어나가면서이다. 교실 밖으로 뛰어나간 소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원인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기에 영화의 미스터리는 단선적으로 봉합될 수 없다. 샤오밍이 샤오쓰를 향해 겨냥한 총이 우발적으로 발사된 것처럼, 에드워드 양은 사물과 인간의 사이에서 오발과 오인으로 작동하는 세계의 역학을 발견한다.

양호실의 학생들이 부동 상태로 멈춰 있던 것처럼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사람들은 모두 움직임을 박탈당한다. 이런 장면들에 대한 손쉬운 해석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근대국가의 압력이 개인의 신체에 물리적으로 작용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움직임을 중단하는 사태는 한 차례 더 벌어진다. 샤오쓰가 샤오밍을 살해하는 순간이다. 두 주인공의 후경에 배치된 사람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지도, 일상적 행동을 지속하지도 않으며 우두커니 선 채로 풍경 속에 박제되어 있다. 이 장면이 섬뜩한 까닭은 타인의 죽음에 무관심한 군중의 비인간적인 행태와는 무관하다. 영화가 응시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살인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에드워드 양은 지금 그럴 듯한 리얼리티를 무시하면서라도 영화의 운동을 총체적으로 중단하려는 것이 아닐까. 씻어낼 수 없는 어둠에 물든 영화라는 물질 자체의 죽음을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이 장면에서 죽는 것은 샤오밍만이 아니다. 이것은 움직임을 멈춘 피사체 모두의 죽음이며, 장장 4시간을 달려온 거대한 세계의 정지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카메라는 샤오쓰의 어머니의 신체를 뒷면에서 포착한다. 그 뒷모습은 빨래를 개다 말고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국가시험의 결과발표를 들으며 천천히 동작을 멈춘다.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는 사물적인 몸이다. 더는 어떤 활동도 화면에 주어질 수 없으므로 영상은 여기서 멈춘다. 사무적으로 결과를 알리는 목소리만이 빛이 사라진 스크린을 공허하게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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