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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치>가 모니터 안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법

디지털 시대의 마음

누군가는 파운드 푸티지가 생명력이 다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최근 <곤지암>(2017)에 이르기까지 파운드 푸티지는 끝없이 생산되고 있다. 물론 저예산으로 만들기 쉽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지만, 파운드 푸티지가 불안과 공포를 창출하는 데 탁월하다는 이유도 무시할 수 없다. ‘푸티지’라는 말은 아직 편집되지 않은 영상을 의미하며, 파운드 푸티지는 이런 영상들로 구성되어 있다. 많은 영화에서 설정숏과 시점숏을, 롱숏과 미디엄, 클로즈업숏을 혼합해서 편집하는데, 이런 편집을 통해서 관객은 상황을 모두 파악했다고 느낀다. 그러나 시점숏으로만 진행되거나 CCTV로만 사건을 보여주는 경우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 화면의 사각지대가 생긴다. 많은 파운드 푸티지들이 보이지 않는 부분, 외화면을 활용하며 관객에게 공포의 실체를 정면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공포를 가중한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무엇은 언제나 인간을 불안과 공포에 떨게 하는 좋은 요소다.

그러나 파운드 푸티지가 단지 공포 장르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파운드 푸티지 안에서도 여러 가지 변용들이 있었다. <블레어 윗치>(1999)보다 10년 일찍 만들어진 <84 찰리 모픽>(1989)은 베트남전쟁을 사실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모큐멘터리 기법을 활용했다. <클로버필드>(2008)는 재난, 괴수 영화에 파운드 푸티지를 적용한 사례이며, <크로니클>(2012)은 액션영화지만 청소년의 불안과 공포를 표현한 드라마이기도 하다. 한편 위 영화들이 핸드헬드를 썼다면 <파라노말 액티비티>(2009)는 CCTV처럼 고정된 카메라를 활용해서 파운드 푸티지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인물이 들고 다니는 설정의 핸드헬드는 인물의 시점에서 촬영되는 점, 그리고 인물의 심리와 신체 상태가 카메라의 흔들림을 통해 표현된다는 점에서 주관성이 두드러지는 촬영기법이다. 이와는 반대로 CCTV는 인물들의 상황에 관심이 없는 무심하고 차가운 기계일 뿐이다. 이 차가운 카메라의 시선은 섬뜩한 공포를 유발하는 데도 효과적이지만, 관객과 영화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게 하며 관객을 사유하게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봉준호의 단편 <인플루엔자>(2004)가 그런 작품이다. 이 영화는 객관적인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폭력의 근원을 사회학적으로 고찰한다.

<서치>(2017)의 감독 아니시 차간티가 만든 2분 남짓의 영상 <구글 글라스: 시드>는 구글 글라스를 끼고 어머니를 찾아간다는 내용이며, 구글 글라스를 통해 1인칭 시점숏만을 보여주는 파운드 푸티지다. 이 1인칭의 영상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구글 글라스를 낀, 촬영의 주체인 얼굴이 나오지 않는 주인공의 감정이다. 주인공의 시선과 손과 발의 움직임을 통해 웃음이나 눈물 같은 감정표현의 클리셰 없이도 주인공의 감정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 점은 <서치>도 마찬가지다. <서치>의 강점은 단지 새로운 형식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서치>는 OS 위에서 영화가 진행된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이긴 하지만, 그 근원에는 파운드 푸티지가 있다.

그럼에도 <서치>가 신선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 영화가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이 시적이기 때문이다. 쓰다 지워버린 메시지들, 머뭇거리는 커서, 끝내 휴지통에 넣어버린 동영상. 수많은 감정들이 사소한 행위들 속에 담겨 있고, 카메라는 이 감정들을 포착한다. 아빠가 최고라고 말하는 어린 마고의 동영상을 휴지통에 넣을 때 데이빗(존 조)의 얼굴은 나오지 않는다. 데이빗의 눈물을 보여주며 더욱 슬프게 연출할 수 있었음에도 감독은 그런 쉬운 방법을 선택하지 않는다. 감정표현의 클리셰를 거부하는 것이다. 데이빗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눈물이 아니다. 그가 눈물을 흘렸든, 흘리지 않았든 우리는 그의 감정을 알 수 있다. <서치>는 파운드 푸티지로 섬세한 감정을 표현해낼 수 있다는 점을 입증했다.

데이빗이 찾는 것은 증거가 아니다

물론 <서치>가 단지 감정을 드러내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준다는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서치>는 스릴러의 측면에서도 훌륭하다. 스릴러영화를 보는 관객의 머릿속에서는 밝혀진 정보를 바탕으로 밝혀지지 않은 정보를 추측하는 복잡한 추론 과정이 일어나는데, 이를 위해서는 적당한 양의 정보를 관객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너무 적은 정보만을 알려준다면 결말의 작위성이 두드러지고, 너무 많은 정보를 알려준다면 추론의 재미가 사라진다. <서치>는 많은 정보들을 텍스트로 직접 제공한다. 텍스트의 효율성 덕분에 제공되는 정보의 양은 엄청나게 많아진다. 그러나 관객과, 관객과 같은 위치에 있는 데이빗은 이 정보들을 다 받아들이지 못한다. 정보가 너무 많기에 중요한 정보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은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 <도둑맞은 편지>의 트릭과도 유사하다. 이 소설은 비밀 편지를 훔친 범인이 편지들이 담긴 편지꽂이에 비밀 편지를 숨겨둠으로써 비밀 편지를 눈에 띄지 않게 은폐한다는 내용이다. <서치> 또한 정보를 정보의 바다 속에 던져둠으로써 정보를 숨긴다. 작위성을 배제하는 동시에 추론의 재미까지 살리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런 <서치>의 형식이 스릴러의 재미를 위해서만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서치>는 현대인들의 소통의 부재, 단절, 고독을 다루고 있는데, 이 점은 SNS라는 수취인이 특정되지 않은 편지들을 통해 드러난다. SNS를 통해 발신되는 수많은 편지들은 그저 타임라인들 속에서 흘러가버리기에 대부분의 평범한 편지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데이빗이 중요한 단서가 담긴 마고(미셸 라)의 SNS를 처음에는 흘깃 보고 흘려보내는 것처럼. 편지를 눈에 띄게 하기 위해서는 자극적이고 과잉의 스펙터클을 연출해야 한다. 말과 스펙터클의 과잉 속에서 진솔한 감정과 마음은 ‘도둑맞은 편지’처럼 눈에 띄지 않게 된다. 마고는 이 과잉의 시대와 융화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다. <서치>가 찾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실종된 날, 딸의 행방이지만 결국 발견하게 되는 것은 딸의 마음이다. 그리고 데이빗 자신의 마음이기도 하다. 데이빗은 딸의 유캐스트를 자세히 보고 나서야 데이빗이 봐야 했던 마고의 표정은 고개를 돌린 얼굴 속에 있었다는 걸 알게 되고, 딸의 슬픔을 이해한다. 어쩌면 데이빗 또한 마음 깊은 곳에서는 마고처럼 아내 파멜라(사라 손)의 부재를 견디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내의 영상을 검색 결과에서 숨기듯이 파멜라에 대한 생각들을 마음 깊은 곳에 숨겨버린 것이다.

마고가 SNS를 통해서 찾고자 했던 것은 인간적 교감이었다. 왜냐하면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SNS가 병들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그만큼 현실이 병들어 있기 때문이다. <서치>의 현란한 기술이 보여주는 것은 결국 인간의 마음이다. 그 마음은 나약하기도 하고, 때로는 잔인하기도 하지만, 선의를 가진 마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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