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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로드> <블랙미러> 존 힐코트 감독, <부산행> 연상호 감독이 만나다
이화정 사진 최성열 2018-09-20

“발전하는 기술을 연출자로서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중요해진 시점이다”

연상호 감독, 존 힐코트 감독(왼쪽부터).

연상호 감독이 <부산행>(2016)을 인터뷰하던 당시, 인터뷰 때마다 빠지지 않고 참고했다며 언급한 영화가 <더 로드>(2009)였다. 호주 출신으로 LA에서 활동하는 존 힐코트 감독은 <더 로드> 외에도 <로우리스: 나쁜 영웅들>(2012), <트리플9>(2016) 등으로 한국 영화팬들에게도 익숙한 감독이다. 존 힐코트 감독이 마침 넷플릭스 드라마 <블랙미러> 중 한편인 <악어>로 서울드라마어워즈에서 단편TV무비 부문 우수상인 ‘실버 버드 프라이즈’를 수상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연상호 감독에게 연락을 취했다. <부산행>의 시퀄인 <반도>의 시나리오 작업으로 한창 바쁘다는 말에 요즘은 연락을 자제하던 중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우리 시나리오 작가랑 지금 <블랙미러> 보고 있었는데…”라는 연 감독의 답변이 돌아왔다. 한국영화를 관심 있게 찾아본다는 존 힐코트 감독에게도 연상호 감독은, <부산행>의 팬인 아들과 함께 평소 흥미롭게 지켜보던 감독이었다. 두 감독의 만남은 이렇게 한달음에 성사됐다. 지난 9월 3일, 수상에 앞서 가진 두 감독의 대담을 전한다.

=연상호_ 요즘 <블랙미러>를 너무 재밌게 보고 있는데, 마침 존 힐코트 감독을 만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은 것도 시나리오 작업하면서 <블랙미러>를 보고 있을 때였다. 시즌4는 너무 재밌어서, ‘정말 더럽게 재밌구나’ (웃음) 하면서 감탄하고 있었다. <블랙미러>는 <환상특급>(1959년 <CBS>에서 처음 시작된 SF시리즈물. 한국에서는 80년대 KBS에서 방영됐다.-편집자) 시리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지금 이 세계가 직면한 당대성을 잘 담은 시리즈라고 생각한다. 미국에도 그런 기획이 많았지만 아류작에 그쳤다면, <블랙미러>는 그걸 뛰어넘어 제대로 역할을 한 거 같다. 특히 좋아하는 에피소드가 감독님이 만드신 <악어>였다.

=존 힐코트_ 좀비나 식인 악어를 넣지 못해서 아쉽다. (웃음)

연상호_ 무엇보다 <부산행>을 만들 때 가장 많이 참고한 영화가 두편 있었다. 한편이 프랭크 다라본트의 <미스트>(2007)였고, 또 한편이 감독님이 연출한 <더 로드>였는데 이렇게 뵙게 돼 반갑다. <더 로드>는 개봉 때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한국에서 출간된 원작 표지를 보면 배경에 조그맣게 아버지와 아들이 손을 잡고 있다. <부산행>의 엔딩 신에서 성경(정유미)과 수안(김수안) 그림자 장면의 비주얼이 거기서 영감을 받은 거다.

존 힐코트 감독

존 힐코트_ 코맥 매카시의 훌륭한 원작과 좋은 각본으로 작업하게 돼서 행운이었는데, 또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부산행>에 영감을 주었다니 나로서는 너무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아들 루이가 <부산행>을 너무 좋아해 6번을 봤다. 볼 때마다 루이는 울더라. 오늘 이 자리에 함께 온 것도 <부산행>을 만든 감독님을 꼭 뵙고 싶다는 이유였다. (웃음) 루이는 <부산행> 프리퀄인 애니메이션 <서울역>(2016)과 <염력>(2017)도 다 봤다. 나 또한 <부산행>과 <더 로드> 사이에 오버랩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더 로드>는 대재앙 이후 아포칼립스를, <부산행>은 좀비로 세계가 초토화된 상황을 가정한다. 극한상황에 내몰린 인간 본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상황에서는 최선의 모습도 나오지만, 반대로 최악의 모습도 나오게 된다. <부산행>은 이 모든 본성을 기차라는 공간 안에 담았다는 점에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용석(김의성)이 인간성을 상실하고 바닥까지 치면서 모든 본성을 드러내는 걸 묘사한다. 어린아이인 수안을 통해 어른을 반추한다는 점도 훌륭하다.

연상호_ <더 로드>는 외계지성과 인류의 최초의 접촉과 인류 진화의 비밀을 다룬 아서 C. 클라크의 소설 <유년기의 끝>처럼 장르의 원형 같은 느낌이 있다. <부산행>을 만들 때 어떤 주제를 다룰까 고민이 많았는데 <더 로드>가 아포칼립스 영화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세대론을 다루는 것의 원형이 아닐까 싶더라. 실제로 그런 이유로 석우(공유)와 딸 수안을 처음엔 아버지-아들로 설정했었다. 캐스팅 과정에서 바뀌긴 했지만.

존 힐코트_ 자연스러운 설정인 것 같다. 연 감독님은 딸이 있고, 나는 아들이 있으니. (웃음) 사실 내가 <부산행>에서 주목한 것 중 하나가 영화에 사용된 기술이었다. 재난 상황에서 휴대폰을 사용함으로써 영화 속의 급박한 상황이 배가된다. 현대사회에서 정보가 어떻게 전달되며, 그렇게 전달된 정보로 인해 사회가 와해되는 것까지 보여준다. 기술과 현대사회의 관계를 잘 접목했다는 점에서 연출자의 생각을 듣고 싶더라.

연상호_ 폐쇄된 공간을 그리다보니 영화에서 통신이 가능하게 할까 말까를 고민했다. 통신이 두절되면 밀실이라는 공간이 주는 느낌을 더 살린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정보가 너무 많은 사회에서 무엇이 진짜 정보인지 모르게 하는 것이 더 폐쇄적이겠다 생각했다.

존 힐코트_ 연 감독의 그 말이 현대사회의 모순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정보가 많을수록 이해도가 높아지는 게 아니라 떨어지는 시대다. 현대사회에서 기술은 기하급수적으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 기술이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치는지 충분히 숙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용한다. 요즘 문제가 되는 페이크 뉴스의 빠른 전파를 보면 결국 실제 생활에 피해를 주고 있는 게 아닌가. 특히 전세계 기술력의 중심이라고 불리는, ‘테크(Tech)의 나라’ 한국에서 활동하는 감독으로서 이 부분을 어떻게 영화에 담을지 고민이 클 것 같다.

연상호_ 한국에서 사는 건 그래서 좀 무서운 지점이 있다.

존 힐코트_ 미국에서 사는 게 여러 면에서 조금 더 무섭긴 하지만. (웃음)

연상호_ 통신이 발달하면서 아주 작은 이슈가 순식간에 퍼져나간다. 그로 인해 어떤 일이 발생하기도 하고. 좋은 의미로는 다이내믹한 건데 최근 들어 과연 그것에 대한 균형과 견제가 잘 이루어지고 있나 하는 우려도 크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스럽게 <블랙미러>를 떠올리게 되는데, 정부가 환경부와 결탁해 로봇 벌에 안면인식 기능을 탑재한 ‘꿀벌 드론’을 개발해 국민을 감시하는 에피소드(<블랙미러> 시즌3 중 6화 <미움받는 자>)가 있다. 통신기술이 발달하면서 벌어지는 디스토피아적인 상상력을 영화로 옮긴 경우다.

<더 로드>

존 힐코트_ 나도 <블랙미러>의 각본을 받았을 때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는 게 책임감도 들고 좋더라. 발전하는 기술을 연출자로서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중요해진 시점이다. 현실적인 사안을 재료로, 근미래라는 상황을 설정해 조금은 과장된 스토리로 표현하는 거다. 기술 발전이 가져올 수 있는 최악의 극단적인 상황에서 인간이 가지는 두려움을 잘 표현하는 프로젝트다. 이 시리즈의 총괄 제작자인 찰리 브루커는 기술이 가진 위협적인 속성에 대해 심도 깊은 사고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기술이 인류를 구할 거라는, 기술에 대한 과도한 신뢰가 있다. 나는 최근 경향 중 하나인 알고리즘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에 문제제기를 하고 싶다. 데이터에 기반해 모든 걸 일반화 하는 건데, 그 데이터가 다른 무엇이 아닌, 사람으로부터 온다. 각각의 경우를 통계낸 것인데, 그게 마치 전체인 것처럼 일반화하다보니 오류를 내포한 편협한 방향으로 결론지어져 버린다. 그래서 ‘빅브러더’가 사회에 관여하는 가운데, 내 안의 악이라 부를 수 있는 ‘리틀브러더’를 표현해낸 <부산행>이 다시 한번 좋은 영화란 생각이 든다. (웃음)

연상호_ 자꾸 <부산행> 이야기로 돌아오는데, 굳이 <부산행> 이야기를 안 하셔도…. (웃음)

<더 로드>

존 힐코트_ 그만큼 한국영화를 좋아하고, 한국영화를 꽤 많이 보고 있다. 처음 본 영화가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이었고, 지금까지 내가 본 최고의 엔딩 중 한 장면이었다. 그의 <괴물>(2006) 또한 무척 좋아하는 영화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2003)는 말할 것도 없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고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2003), <달콤한 인생>(2005), <악마를 보았다>(2010)도 좋아한다.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2008)도 정말 흥미진진하게 봤다. 사실 더 많이 봤는데, 지금 제목이 생각나지 않을 뿐이다. 물론 <악마를 보았다>나 <추격자>는 루이에게 보여주기에는 아직은 힘들 것 같다. <더 로드>도 아직 보여주지 않았다. 모르지, 몰래 봤을지도. (웃음) 개인적으로 한국영화를 보면서 존경심이 드는 부분은 어두운 주제를 정말 두려움 없이 탐험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주제를 바탕으로 캐릭터가 가진 어둠을 심도 깊게 표현한다는 점에서 경의를 표한다. 그러자면 연출뿐만 아니라 배우의 연기도 중요하다. 연 감독이 어떻게 배우의 연기를 지도하는지도 궁금했다. 특히 아이의 감성이 뛰어나서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된다.

연상호_ 그 친구(김수안)가 한국영화계에서 정말 천재 연기자라는 수식을 받을 만큼 연기를 잘한다. 영화를 찍으면서 리허설을 거의 안 했다. 어린 연기자다보니 리허설할 때 연기가 더 좋더라. 첫 테이크가 제일 좋고, 하면 할수록 지치더라. 그래서 스탭들이 긴장을 많이 했다. 첫 테이크에서 모든 걸 건져내야 하니. (웃음)

존 힐코트_ 나도 배우들과 그런 유사한 경험을 한다. 배우의 타고난 재능은 영화에 큰 도움이 된다.

연상호_ <악어>에서 미아 역을 맡은 주연배우 앤드리아 라이즈버러도 뛰어나더라. 배우의 재능이 정말 중요하다. 나는 <더 로드>를 통해 <부산행>의 엔딩에 영감을 얻기도 했는데, <악어>를 보면서 또 한번 그런 감흥이 들더라. ‘언젠가 내 영화에 활용해야겠다’ 그랬다. (웃음) 혹시 이후 내 영화에 비슷한 장면이 나와도 너무 놀라지 말기를 바란다. 미아가 약간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에서 엔딩이 나오는데 그 느낌이 굉장히 좋았다. 마지막까지 굉장한 긴장감을 유지하다가 궁지에 몰리는 순간 그 표정에서 끝을 맺는 게, 그 잔상이 무척 컸다. 규격화되지 않은 좋은 연기였다.

존 힐코트_ 좋은 배우다. 나 역시 그 배우의 활동이 기대된다. 그리고 <악어>의 엔딩을 언급해줘서 정말 감사하다. <살인의 추억>의 엔딩 장면을 좋아하는 것도, 인물의 클로즈업으로 맺는 엔딩컷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사실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었는데 그렇게 갔고, 감독님이 좋게 봐주신 거다. 나는 <부산행>에서 아버지가 기차에서 그림자로 떨어지는 그 장면을 제일 좋아해서, 나 역시 언젠가 내 영화의 엔딩에 참고할지 모른다. (웃음) 그 장면이 실질적으로 영화의 엔딩 같더라.

연상호_ 나도 그 장면을 다른 감독의 작품에서 참고한 거다. (웃음) 어릴 때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1997)를 감명 깊게 봤다. 야쿠자끼리 대결하는 장면에서 카메라가 그림자를 잡고, 그림자에서 사람이 쓰러지는 걸 잡는다. 당시 일본영화를 보면 그런 기법을 많이 썼다.

존 힐코트_ 다시 <부산행>으로 돌아와서 좀비들을 리얼하게 그린 것도 이 영화의 강점이다. <렛미인>(2010)의 뱀파이어들의 움직임에 영감을 받았는지, 좀비의 움직임이 궁금하더라.

연상호 감독

연상호_ 사실 동양 좀비를 만든다는 게 생각보다 힘들었다. <워킹 데드> 같은 좀비 시리즈에는 익숙해졌지만 한국적인 장르가 아니다보니 기본적으로 거부감이 있었던 것 같다. 분장도 과하고 특수분장까지 하고보니 리얼한 느낌이 아니라 탈을 쓴 억지스러운 느낌이더라. 이건 분장으로 해결하면 안 되겠다 해서 착안한 게 ‘움직임’이었다. 안무 설계한 분이 다양한 레퍼런스를 가져왔는데, 그중에는 브레이크 댄스도 있었고 부토(일본 전통 춤)의 동작도 있었다. 그외에도 많은 것들을 참고했다. 인트로 장면에 고라니를 쓴 것도 이 움직임과 관련된 거였다. 원래는 한국에서 더 친숙한 돼지를 쓰려고 했는데, 고라니가 일어날 때 다리가 길어서 더 브레이크 댄스 같은 움직임을 줄 수 있겠더라.

존 힐코트_ 정말 판타스틱한 연출이었다. 터널의 암흑을 통과한 후 좀비들의 행태가 변한 게 중요한 포인트였다. 스토리와 연관될뿐더러 이 장면으로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할리우드 좀비들은 너무 제한적인 움직임만 보이고 있지 않나 싶더라.

연상호_ 처음에는 기차 안에만 있으려고 했는데, 그것만으로는 스토리 전개가 어려웠다. 결국 이렇게 하다가는 장편을 못 만드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순간 터널을 생각했다. 한국은 터널이 많다는 점에 더해 그 안에서 좀비의 움직임을 표현할 때, 어릴 적 홍콩영화에서 본 강시의 움직임을 떠올렸다. 강시는 얼어죽은 좀비인데, 상대가 숨을 참으면 보지 못한다. 그런 설정을 떠올리면서 영화에 접목시켰다.

존 힐코트_ 루이와 내가 이 영화를 이렇게까지 좋아하게 된 데도 그런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웃음) 브라이턴이라는 해변가에 살아서 런던을 갈 때면 매일 기차(유로스타)를 타고 왔다 갔다 하는데, 그런 경험과 연결하니 이 영화가 더 와닿더라. 영화를 만들면서 항상 생각하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기획은 어떤 제한 안에서 피어난다는 것이다. 연 감독님의 그 선택이 그래서 재밌기도 하고, 창작자들에게 중요한 답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더불어 지금 할리우드의 문제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점점 리스크 테이킹(Risk Taking, 위험을 지각한 뒤에 행동하는 위험 감행)을 피하고 있고 안전 위주로만 기획을 한다. 한국 영화산업을 좋아하는 이유가 이런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획하는 작품들이 많아서다.

연상호_ 감독님이 한국영화에 큰 관심을 가지면서 그런 지점들을 잘 파악해주는 것 같다. 그런데 미국에서도 자막이 있는 비영어권 영화들을 많이 보는 추세인가.

존 힐코트_ 루이가 지금 17살인데, 루이와 또래 친구들은 정말 한국영화를 많이 본다. 미국은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살고, 그래서 정말 많은 영화들이 소비된다. 특히 넷플릭스가 보급되면서 더 많은 영화, 드라마 작품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르코스> 같은 시리즈물도 스페인 사람들은 스페인어 자막으로 보면 되니까. 그런데 LA같이 다양한 문화권이 공존하는 해안가 지역과 달리 백인들이 모여 사는 중부 지역은 영어영화가 우세다. 이 역시 미국이 안고 있는 문제 중 하나인데, 중부 지역에는 여권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자기들만의 영역에 머물고, 타 문화와 교류가 전혀 없다. 가까운 미래에는이 풍경도 바뀌지 않을까. 아니, 이 문제는 극복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산행>

연상호_ 차기작이 그래서 더 고민되는 시기다. 한동안은 차기작 준비로 바쁠 것 같다. <부산행>의 시퀄인 <반도>를 쓰고 있다. (루이가 옆에서 물개박수를 침.) 대본을 쓴다는 건 그냥 너무 괴로운 일인 것 같다. (웃음) 다음 혹은 그다음에는 팬심으로 만들 수 있는 영화를 기획하고 싶다. 좋아하는 아티스트들과 협업한다든지 하는 걸 생각 중이다. 예를 들면 영화가 나오면 영화 캐릭터 피겨도 만들어 달라거나 그런 제안도 한다. (웃음) 물론 이런 것들을 아주 안정된 예산 안에서 만들면 좋겠지만 굳이 그렇지 않더라도 재밌는 작업이 될 것 같다. 과거 웨타 스튜디오만 해도 피터 잭슨 감독과 <배드 테이스트>(1987)를 만들 때부터 같이 협업했고, 2000년대 초반 들어 그 당시 작업이 그리워서 좀비 양이 등장하는 조너선 킹의 <블랙 쉽>(2006) 같은 작품을 만들었다. 그렇게 팬심이 발동해서 하는 영화, 오타쿠적인 프로젝트를 만들고 싶다. 샘 레이블의 <이블 데드>(1981)같이 예산이 적어도 크리피(creepy, 오싹한)한 호러 코미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얼마 전에도 몇몇 회사와 미팅해보니 한국 투자사 중에도 이런 기획에 열려 있는 곳들이 있더라.

존 힐코트_ 나도 여러 작품 중에 고려하고 있다. 솔직히 어느 작품이 진행될지 아직 모르겠다. 다양한 플랫폼이 있어서 창작자에게 정말 기회가 더 많아진 거 같다. 나 역시 영화뿐만 아니라 뮤직비디오, 광고, 다큐멘터리 등을 작업하고 있는데 매체별 논리가 있어서 그들의 논리를 존중하고 각각의 장점을 살리는 작업을 해나가고 있다. 넷플릭스도 거기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고. (웃음) 이렇게 기회가 많을수록 창작자에게는 두가지 어려움이 있다. 하나는 양이 너무 많이 나오다보니 오히려 퀄리티가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다. 공동 제작하는 작품도 많아지고, 서구와 아시아가 협업하는 작품도 검토하고 있지만 콘텐츠가 많으면 많을수록 양질의 프로젝트를 찾는 게 더 어려워지지 않나. 수용자로서는 그 많은 것 중 좋은 콘텐츠를 흡수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넷플릭스뿐만 아니라 다양한 플랫폼에서 콘텐츠가 쏟아진다. 결국은 경쟁이 사람의 주의력을 누가 더 많이 주도하느냐의 문제, ‘어텐션 이코노미’(Attention Economy) 시대인데 그 싸움이 앞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또 하나는 경제적인 측면인데, 나나 연 감독님 같은 아티스트들은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고, 그 구조 안에서 지불구조도 확립되어야 하는데, 그게 잘될까 싶다. 이 부분에 대한 관심도 많다. 불법 다운로드나 무료 제공은 작품의 양은 늘릴 수 있지만, 결국 퀄리티 저하로 다시 영화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한때 음악산업에 몸담기도 했는데, 이런 문제로 지금의 음악산업이 완전히 무너졌다가 이제야 회복을 하고 있다.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우리 모두가 주력해야 한다. 오늘 연 감독님 티셔츠에 ‘Repair is Radical’(수리는 급진적이다)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는데, 그 단어가 더 중요하게 와닿는 시기인 것 같다.

연상호_ 오늘 루이가 입고 온 티셔츠가 ‘뱀파이어 와이프’인 것처럼, 사실 나도 아키라, 메탈 밴드 티셔츠 같은, 오타쿠용 티셔츠가 거의 대부분이다. (웃음) 그런데 아침에 나오면서 뭘 입을까 하다가 인터뷰니 새 옷으로 입자 해서 선물받은 이 티셔츠를 입었는데, 감독님 얘기를 들으니 제대로 입고 온 것 같다.

존 힐코트_ 오늘 정말 나를 비롯해서 아들 루이와 같이 사진도 찍어주고 만나줘서 너무 감사하다. 아들이 스튜디오 지브리를 좋아하는 일본 애니메이션 오타쿠다. 또 한국영화, 특히 연상호 감독을 너무 좋아하는데, 정말 오늘을 두고두고 기억할 것 같다.

연상호_ 제가 더 영광이다. <부산행>을 하고 나서 평소 좋아하던 오시이 마모루 감독님과 대담(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 엣나인필름이 공동 주최한 ‘21세기 재패니메이션 기획전-오시이 마모루 감독전’에서 열린 대담. <씨네21> 1133호에 대담 참관기가 수록되어 있다.-편집자)할 기회가 있었고, 이번엔 존 힐코트 감독을 만났다. 나도 <아키라>(1988)를 중학교 2학년 때 봤다. 장르소설을 비롯해 당대성을 가지고 있는 영화, 드라마, 소설, 만화, 애니메이션 등 모든 콘텐츠들이 성장기의 ‘보약’이 아닐까 싶다. 어릴 때 나는 공부하는 걸 싫어했는데 그나마 식견이 생긴 게 좋아하는 작품들을 보면서였다. 실제로 지금도 우리 집에는 만화책이 엄청 많다. 아이가 4살인데, 그 나이면 한국에서는 벌써 영어유치원을 다닌다. 요즘은 한국말보다 영어교육이 먼저다. 그런데 아내도 나도 영어를 못하기도 하고, 교육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편이다. 얼마 전 책장을 새로 사서 책들을 정리하면서, ‘애가 이 만화책만 다 읽으면 된다’ 그런 철학으로 임하고 있다. (웃음)

존 힐코트_ 나도 호주 출신이라 아직 미국 영어를 잘 못 배워서 다른 언어는커녕 영어도 잘 못 배웠다. 한국영화를 보고, 한국 와서 놀란 게 한국 언어의 힘이었다. 결국 각 나라가 자신의 문화와 전통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감독님의 교육정책이 광활하게 퍼지기를 바란다. 물론 루이가 공부 안 하고 집에 가서 ‘만화나 볼래요’ 할까봐 좀 걱정되지만. (웃음)

<블랙미러>는 어떤 드라마?

<블랙미러>

‘디지털 시대의 <환상특급>’으로 수식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블랙미러>는 가까운 미래의 첨단 기술이 인간의 욕망을 실현해주면서 벌어지는 특별한 상황을 어두운 상상력으로 풀어낸 SF 옴니버스 드라마다. 지난 2011년 영국 방송 <채널4>에서 시작했으며 시즌3부터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제작된 후 시즌4에 이르렀다. 존 힐코트 감독이 연출한 <악어>는 과거 성공한 건축가로 명성을 얻으며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미아(앤드리아 라이즈버러)가 뺑소니 살인사건의 가해자였던 자신의 과거 행적이 폭로될 위기에 처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다. 기억을 엿보는 기계 ‘리콜러’를 가지고 자신을 찾은 보험 조사원 샤치아(키란 소냐 사와)를 저지하기 위한 미아의 잘못된 선택을 통해 인간의 욕망이 불러온 파장을 심도 깊게 그린 수작이다. 황량한 대지 속 덩그러니 존재하는 미아의 집. 피폐해져가는 인간의 내면을 대변해주는 듯한 미술과 촬영,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존 힐코트 감독은 “그간 스릴러영화에서 답습해오던 남성 캐릭터가 주도하는 스토리에서 탈피, 여성주인공과 또 그의 과거가 밝혀지는 계기를 만드는 인물 역시 이슬람계 여성으로 캐스팅했다”고 전했다. ‘여성’, ‘인종’을 배제하지 않는 편견 없는 시선이 결과적으로 극에 부여해 주는 신선함이 큰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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