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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황인숙이 빌리와 주변 사람들을 보며 떠올린 8가지 단상
2001-03-21

남자가 분홍신을 신을때

1. <빌리 엘리어트>는 가난한 광부의 아들이 발레리노로 성공하는 이야기이다.

성장하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에서는 남성 발레의 힘찬 아름다움을 듬뿍 감상할 수 있다. ‘발레’라는 말만 보고 자기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남자들이 있을 것 같다. 그런 편견을 고집한다면 아까운 영화 한편을 놓치게 된다. 이 영화는 다른 사람들의 편견을 극복한 사람의 성공담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는 비굴한 사람이 단 한명도 나오지 않는다.

2. 그 탄광촌의 학부모들은 과외로 남자아이들에게는 권투를 여자아이들에게는

발레를 배우게 한다. 내가 어렸을 적, 서민 가정에서 흔히 남자아이들을 태권도 도장에 여자아이들을 한국무용 학원에 보냈듯이. 빌리는 열한살,

아버지와 형과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살고 있다. 빌리의 아버지와 형은 광부이다. 현재 파업중으로 마을에서는 극렬한 시위가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가뜩이나 넉넉지 않은 살림이 더욱 어렵다. 크리스마스에 땔감이 없어서 빌리 어머니의 유품인 낡은 피아노를 부숴 장작으로 쓸 정도이다.

그렇게 어려운 와중에도 아버지는 교습비를 들여 빌리에게 권투를 배우게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권투 도장 아래층에 있던 발레 교실이 파업

지도부에 장소를 빌려주고 권투 도장 옆으로 올라오게 된다. 빌리는 음악 소리만 들리면 자기도 모르게 몸을 흔드는 버릇이 있다. 피아노 연주와

발레 레슨 구령에 몸을 맡기고 샌드백과 더불어 춤을 추는 빌리. 빌리는 쭈뼛쭈뼛 발레하는 소녀들 틈에 끼어든다. 아직 어린 시절에 평생

추구할 그 무엇에 매혹되는 사람이 있다. 매혹된 사람을 보는 건 매혹적인 일이다. 빌리에게 재능보다도 먼저 드러난 것은 황홀과 매혹이었다.

3. 발레 레슨 구령의 감미로움, 그 감각적인 감흥. <빌리 엘리어트>에서

발레 선생 역을 맡은 여배우(줄리 월터스)의 구령소리는 마치 영혼에 대고 명령하고 속삭여, 주술에 걸린 듯 몸을 움직이게 하는 느낌이다.

시를 읊는 것 같다.

4. 빌리의 형은 격하고 살갑지 않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자기의 전축을

틀었다고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거리는가 하면 잠자리에서 “형, 죽음이란 건 뭘까?” 하는 애틋한 물음을 “시끄러워!” 하는 대꾸로 잘라버린다.

파업에 동참하지 않고 일하러 가는 광부들을 태운 버스를 향해 썩은 계란을 던지며 “배신자! 배신자!” 외치는 나날, 집안은 형과 아버지의

고함이 난무한다. 형한테 빌리는 ‘고작 열한 살짜리’다. 더불어 가난과 파업과 연애에 대해 대화할 상대가 아니다. 자기 전축의 음악을 듣다니

시건방지고 까진 짓이다. 형은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다. 빌리는 헤드폰에서 새어나오는 음악을 듣는다. <빌리 엘리어트>에는 빌리를 향한

친구들의 풋사랑이 슬쩍 비칠 뿐 연애담이 없다. 어른 남녀들의 연애가 낄 자리가 없다. 발레에도 파업에도.

5. 빌리는 가족들 모르게 권투 대신 발레를 배우다가 들통이 난다. 빌리

아버지 생각에 발레란 여자나 하는 것이며 발레를 하는 남자들은 다 게이다. 하지만 빌리는 거칠고 힘이 센 형과 아버지의 기세에도 소신이

꺾이지 않는다. 정작 게이 기질이 있는 친구 마이클이 정체를 드러낸 다음에 “내 얘기 비밀이야” 부탁할 때 싱긋 웃음으로 답하는 빌리의

얼굴은 이해심 깊고 의젓하다. 고집 세고 반항심 강하고 사내다운 남자애와 발레의 매치가 싱그럽다. 이 싱그러움만큼 내게도 발레에 대한 편견이

있을 것이다. 그건 옳거나 그르거나 틀리거나 맞거나, 편견임에 틀림없다.

6. 빌리의 발레에 대한 열망과 재능을 알아본 발레 선생은 교습비를 받지

않고 비밀리에 개인교습을 해주기로 한다. 개인교습 첫날, 선생님이 시킨 대로 빌리는 마음에 드는 물건들을 가지고 온다. 그중의 하나는 죽은

엄마가 빌리가 어른이 된 다음에 읽어보라고 남긴 편지였다. 편지를 읽는 장면에서 영화와는 상관없이 든 생각. 빌리는 여자 형제가 없으니

엄마 목소리 비슷한 목소리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 빌리 엄마가 녹음 테이프에 목소리를 남겼으면 좋았을 텐데. 반쯤 갖다붙여서 말하자면,

음악은 엄마의 목소리여서 음악소리를 들으면 분홍신을 신은 듯 빌리의 몸이 이끌리는 것이다. 어머니의 피아노.

7. “자네를 여기서 보다니”, “아직도 잘났수?” 등의 빈정거림을 들으며

빌리의 아버지는 일터로 가는 버스를 탄다. 빌리의 왕립발레학교 오디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차창 너머로 아버지를 발견한 큰아들이 미친

듯 달려간다. “아빠, 대체 이게 무슨 짓이에요?” <빌리 엘리어트>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이다. 가난한 집안의 재능있는 자식이란 불효자식이다.

8. 발레곡 <백조의 호수> 중 ‘정경’을 재음미하게 된 건 뜻밖의 소득이다.

그 음악은 그림같이 고운데다가 워낙에 흔해서 지루하다고 여겨왔었다. 그런데 그 음악을 처음 듣고 감동하는 빌리에게 발레 선생이 줄거리를

이야기해줄 때, 빌리 말마따나 그 ‘바보 같은’ 동화가 어렸을 때 최초로 읽었을 때처럼 살아나며, 그러자 음악도 같이 살아났다.

황인숙/ 시인·<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