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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만난 영화인들⑤] <애쉬: 감독판> 배우 자오타오 - 나와 캐릭터와 영화, 일기일회(一期一會)
송경원 사진 박종덕 2018-10-17

종종 영화와 캐릭터와 배우의 생이 분리 불가능할 때가 있다. 지아장커의 작품들을 보면 배우 자오타오를 위해 영화를 찍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전 작품을 한 배우가 관통하며 나아간다. 자오타오는 지아장커의 신작 <애쉬: 감독판>에서 강호의 의리를 지키는 여인 챠오챠오 역을 맡았다. 2000년 초부터 무려 17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표현한 이 영화는 온전히 자오타오에게 바쳐졌다 해도 좋을 정도로 배우와 캐릭터, 영화가 하나로 응축되어 있다. 직접 만난 자오타오는 극중 챠오챠오만큼이나 또렷한 시선으로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걷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올해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기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아쉽다.

=감사하다. 한편으론 올해 받지 못해서 다행스럽다. 아직 올라갈 곳이 더 남아 있다는 말이니까. 늘 다음이 더 궁금한 배우가 되고 싶다. 내 연기 인생의 정점은 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웃음)

-영화 속 남자들은 다들 시대에 영합해 비루하게 변해가는 데 반해 챠오챠오는 어떻게든 생존을 이어가면서도 전통적인 가치를 지켜낸다.

=챠오챠오는 조직의 보스 빈(리아오판)을 만나 17년간 사랑, 배신, 재회, 이별 등 긴 인연을 이어간다. 영화는 챠오챠오의 삶을 따라가는데 이는 고스란히 급격한 변화를 겪은 중국의 어제와 오늘로 겹쳐진다. 영화에서 말하는 강호는 1900년 초반 생긴 중국의 자경단 같은 집단이다. 처음에는 강호의 논리에 따라 챠오챠오의 행동방식을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점차 생각이 바뀌었다. 그보다는 여자로서의 행동방식, 그 시절을 관통하고 버텨냈던 여인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상상하며 인물을 그렸다. 최근 <애쉬: 감독판>을 소개하기 위해 전세계를 돌아다니고 많은 관객과 대화를 나누면서 강호에 대한 또 하나의 답을 찾았다. 강호는 곧 사람이다. 함께 부대끼고 세월의 풍파를 견뎌내며 오늘을 살아 내일로 나아가는 행위 그 자체다. 누구도 혼자 살 수 없다. 챠오챠오가 정과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도 거기 있다.

-챠오챠오의 강인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강약이라기보다는 상대적인 문제다. 빈이 가는 방향과 챠오챠오가 가는 방향은 정반대다. <애쉬: 감독판>은 강한 남자였던 빈은 점점 약해지고 빈의 그늘에 묻혀 살던 챠오챠오는 점점 강해지는 이야기다. 하지만 교차하는 두 인물의 운명은 서로 배척하고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빈이 없다면 챠오챠오도 없다. 하나의 끈처럼 엮여서 함께 간다는 것. 다른 존재로 대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 삶도 사랑도 그걸 잊지 않았으면 한다.

-영문 제목은 <Ash Is Purest White: Director’s Cut>(애시 이즈 퓨어리스트 화이트)이고 중국 원제는 <江湖儿女>(강호의 여인)이다.

=두 제목 모두 만족스럽다. 중국 관객이라면 <강호의 여인>이라는 제목을 듣자마자 직관적으로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고통과 어려움을 견디고 단단하게 제련된 존재, 모든 게 타고 나서 남는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상태라는 의미에서 <애쉬: 감독판>이라는 제목 역시 작품의 의도를 잘 함축하고 있다.

-지아장커와는 이젠 눈빛만 봐도 서로 원하는 걸 이해할 것 같은데. 연기에 대해 구체적인 지시를 하는 편인가.

=지아장커의 시나리오는 이미 완벽한 세계지만 디테일한 부분에선 유연한 즉흥 연기를 즐긴다. 5년 만에 출소한 챠오챠오가 빈을 찾아가는 시퀀스를 찍을 때 현장에 생수병을 하나 들고 갔다. 실은 그 지역이 너무 더워 들고 간 건데 허락을 받은 이후엔 내내 그걸 들고 돌아다녔다. 가령 빈의 사무실에 찾아갔을 때 매몰차게 문을 닫으려는 장면에서 챠오챠오는 문틈으로 다급하게 물병을 집어넣는다. 그 순간 우그러지는 물병은 마치 챠오챠오의 마음처럼 느껴진다. 배가 고파 남의 결혼식에서 몰래 밥을 얻어먹는 장면에선 생수병을 들고 뻔뻔하게 건배를 하기도 하고, 폭행을 당하는 여자를 구해주는 장면에선 생수병을 보검인 양 휘두르기도 한다. 결정적으로 기차에서 만난 낯선 남자(서쟁)와 미묘한 교감을 나누는 장면에서 차마 처음 만난 사람과 손을 잡진 못하고 서로 물병 끝을 잡고 있는 장면이 있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장면이다. 물병은 그렇게 챠오챠오 신체의 일부분이 되어간다. 캐릭터의 감정을 표현하기에 더없이 좋은 도구였다.

-챠오챠오의 여정을 따라 가다보면 문득 <임소요>(2001), <스틸 라이프>(2006)가 떠오른다.

=물론 이번 영화에서 전작들과 이어지는 이미지를 발견할 수도 있을 거다. 예를 들어 <임소요>에서의 붉은 의상은 당시 지역의 스타일을 반영한 상징적인 소품이었다. 이번에 그 옷을 다시 입으니 나도 17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스틸 라이프>에서 입었던 노란색 옷도 이번에 다시 입었는데 그렇다고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건 아니다. 배우로서 유일한 원칙은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각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완전히 독립된 세계라고 생각하고 접근한다. <스틸 라이프>가 끝났을 때 비슷한 역할의 시나리오가 쏟아져 들어왔지만 전부 거절한 적도 있었다. <스틸 라이프>라는 작품은 하나밖에 없고, 그 캐릭터도 유일하다. 모든 캐릭터와의 만남이 그렇다.

-<애쉬: 감독판>은 지아장커의 집대성이자 자오타오라는 배우의 탤런트가 만개한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7년 세월을 혼자 표현한다는 게 쉽진 않았다. 나는 새로운 캐릭터를 만날 때 혼자 자서전을 써보곤 하는데 젊은 시절부터 나이 든 역할까지 모두 소화해야 했던 이번 작품에서 각 연령대에 맞춘 심리 상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배우에게 중요한 건 상상력이다. 게다가 지아장커 감독의 시나리오는 워낙 치밀해서 입체적이고 디테일한 이미지를 그려나가기 수월하다. 덕분에 현장에서는 자오타오가 챠오챠오를 연기한 게 아니라 챠오챠오가 자오타오를 데리고 영화 속으로 들어갔다. 캐릭터와 만난다는 건 반복될 수 없는, 각각의 유일한 경험이다. 앞으로도 내게 상상력을 안겨주는 이야기,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캐릭터와의 만남을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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