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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회 뉴욕영화제, 오직 작품성이 선택의 기준

뚝심 있는 상영작 리스트가 빛난 뉴욕영화제 총정리

<프라이빗 라이프>의 출연진이 관객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Mettie Ostrowski)

시상식이 없으며, 메인 섹션에 월드 프리미어 상영작이 없고, 대신 상영시간 13시간이 넘는 영화를 메인 섹션에서 과감하게 상영하는 영화제. 뉴욕영화제는 여타의 영화제가 추구하는 기본적인 룰을 모두 부수는 영화제다. 뉴욕영화제 프로그램 디렉터 켄트 존스에 따르면 “뉴요커들이 봐야 할 가장 좋은 영화들을 선정하는 것”이 프로그래밍의 유일한 기준이라고. 제56회 뉴욕영화제가 지난 9월 28일부터 10월 14일까지 뉴욕 링컨센터에서 열렸다. 영화를 사랑하는 뉴요커들에게 50년 넘게 지극히 사적이고 은밀한 공간을 제공해온 뉴욕영화제는 올해 22개국 84편의 장편과 64편의 단편영화를 관객에게 선보였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더 페이버릿>(개막작)과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인터뷰 기사 참조), 코언 형제의 <카우보이의 노래>, 배리 젠킨스 감독의 <이프 빌 스트리트 쿠드 토크> 등이 화제작으로, 메인 섹션 상영작 30여편 중 월드프리미어는 단 한편도 없었지만 올해의 뉴욕영화제는 월드프리미어 레드카펫 행사가 담보하는 플래시와 명성 대신 오로지 작품성으로만 상영작 리스트를 꾸리는 뚝심 있는 프로그래밍을 보여줬다.

올해 뉴욕영화제의 메인 섹션을 통해 볼 수 있는 경향은 여성감독들의 약진이다. 메인 섹션의 상영작 중 4편이 여성감독의 작품이었으며, 이중 지난해에 이어 초청된 클레어 드니 감독의 <하이 라이프>와 영화제를 처음으로 찾은 타마라 젠킨스 감독의 <프라이빗 라이프>가 눈길을 끌었다. 특히 현재 넷플릭스에서도 시청 가능한 <프라이빗 라이프>는 2007년 <세비지스> 이후 젠킨스 감독이 오랜만에 내놓은 작품. 폴 지아마티캐서린 한이 뉴욕에서 아티스트로 활동하는 중년 부부로 출연해 아이를 갖기 위해 의학적인 도움과 입양까지 시도하는 커플을 설득력 있게 연기했다. 이들은 절절하지만 때로는 코믹한 모습을 선보여 영화제 관객의 큰 호응을 얻었다.

트럼프 시대의 고민

트럼프 정부하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듯 정치성이 짙은 영화들이 다수 포함되었다는 점도 올해 영화제의 특징이다. 상영작 중에는 트럼프 정부의 전 수석전략가 스티브 배논을 다룬 에롤 모리스 감독의 <아메리칸 다르마>, <폭스뉴스> 설립자인 고 로저 에일스를 다룬 알렉시스 블룸 감독의 <디바이드 앤드 컨큐어: 스토리 오브 로저 에일스>, 트럼프를 지지하는 미 중부의 작은 마을을 그린 프레더릭 와이즈먼 감독의 <몬로비아, 인디애나> 등 3편의 다큐멘터리가 눈에 띄었다.

올해의 상영작 중에는 뉴욕영화제 사상 처음으로 링컨센터 상영관을 벗어나 할렘 공연장인 아폴로 시어터에서 10월 9일 레드카펫 프리미어를 가진 작품도 있다. <문라이트>(2016)를 연출한 배리 젠킨스 감독의 신작 <이프 빌 스트리트 쿠드 토크>가 그 작품. 제임스 볼드윈의 소설이 원작으로, 뉴욕 할렘을 배경으로 부당한 사건에 휘말린 연인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이 작품에 잘 어울리는 상영 방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자세한 상영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 ‘시크리트 스크리닝’ 부문에서는 배우 조나 힐이 감독 데뷔작 <미드 90>을 들고 영화제를 찾아 관객을 놀라게 했다. 캐서린 워터스턴과 루카스 헤지스가 조연으로 출연한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1990년대 중반 LA 스케이트보드 문화를 그리고 있으며 힐이 연출과 각본을 맡았다. 그는 주연을 맡은 서니 설직부터 나켈 스미스, 올랜 프레냇 등 연기 경력이 없는 실제 스케이트보더를 캐스팅했으며, 이들에게서 자연스러운 연기를 끌어내 상영 후 기립박수를 받았다. 배우 출신의 감독들은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미국 배우 폴 다노와 프랑스 배우 루이 가렐이 각각 자신의 연출작을 들고 뉴욕영화제를 찾았는데, 폴 다노는 감독 데뷔작 <와일드라이프>를 통해 한 가족의 붕괴를 조명한 영화를 만들었는데, 배우 출신 감독답게 캐릭터와 배우들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는 평이 많았다. 루이 가렐은 두 번째 연출작 <페이스풀 맨>으로 영화제를 찾았다. 혈연과 치정이 얽힌 가족의 내밀한 욕망을 다룬 그의 작품은 루이 가렐이 종종 출연했던 아버지 필립 가렐의 영화를 떠오르게 하는 설정이 많다.

<더 페이버릿> 레드카펫 현장.(©Philip Ma)

환대받은 넷플릭스 영화들, 그리고 이창동의 <버닝>

최근 국제영화제에서 이슈와 논란을 한몸에 받고 있는 아마존과 넷플릭스 작품들도 뉴욕영화제를 찾았다. 다만 아마존의 경우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라스트 플래그 플라잉>과 토드 헤인즈의 <원더스트럭>, 우디 앨런의 <원더 휠> 등의 화제작을 들고 영화제를 찾았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 행사에서는 파벨 파블리코프스키 감독의 <콜드 워>만을 소개했다. 거금을 투자해 홍보와 각종 행사를 준비했던 지난해에 세 작품이 모두 흥행에 실패한 데에 따른 것으로 추측된다. 또 <원더 휠>을 연출한 우디 앨런 감독의 경우 지난해 영화제 기간에 미투(#MeToo) 운동이 부각되면서 성희롱 스캔들에 다시 휘말려 <원더 휠>의 흥행 참패는 물론이고 아마존 스튜디오가 제작한 차기작 <어 레이니 데이 인 뉴욕>까지 개봉을 기약할 수 없게 되었다.

반면 넷플릭스는 올해 총 6편의 상영작을 소개하며 영화제 프로그램 책자에 해당 영화의 초청을 자축하는 한 페이지 광고를 싣기도 했다. 넷플릭스가 투자·제작한 작품은 <로마>(12월 14일)와 <카우보이의 노래>(11월 16일), <프라이빗 라이프> 외에도 알리스 로르바허 감독의 <행복한 라자로>(11월 30일), 오슨 웰스 감독의 미완성 유작 <바람의 저편>(11월 2일), 그리고 웰스 감독이 사망하기 전 15년간 할리우드 컴백을 꿈꾸며 <바람의 저편>을 끝내려던 모습을 담은 모건 네빌 감독의 다큐멘터리 <데이 윌 러브 미 웬 아임 데드>(11월 2일) 등이 있다. 특히 <바람의 저편>은 오슨 웰스 감독의 유작이며, 40년간 이 작품을 기다려온 사람들이 많아 큰 관심을 모았으나 상영 후엔 상반된 반응이 오갔다.

한편 올해 뉴욕영화제의 화제작 중 유일한 월드 프리미어는 ‘스포트라이트 온 다큐멘터리’ 섹션에 포함된 마크 보젝 감독의 <타임스 오브 빌 커닝햄>이다. 빌 커닝햄은 <뉴욕타임스>의 유명 패션 사진기자로 2016년 향년 87살로 사망한 독보적인 뉴요커였다. 그의 커리어는 2010년 리처드 프레스 감독의 <빌 커닝햄 뉴욕>으로 이미 소개된 바 있으나, 이번 작품에서는 1993년 인터뷰를 바탕으로 <뉴욕타임스> 활동 전 여성 모자 디자이너로 활동했던 초창기부터 사진기자가 되기까지 커닝햄의 작품 세계를 자세히 다뤘다. 화려한 유명 인사나 패션쇼보다는 뉴욕 거리를 활보하는 뉴요커들의 길거리 패션을 선호했던 커닝햄의 진가를 알 수 있는 작품. 원리 원칙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가 뉴욕영화제와 많은 점을 공유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한편 한국에서는 이창동 감독의 <버닝>이 오는 11월 9일 웰 고 USA 배급으로 미국 내 상영을 앞두고 초청됐으며,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홍상수 감독이 <풀잎들>과 <강변호텔> 등 두편의 영화로 영화제에 초청됐다. 이로써 홍상수 감독은 2002년 <생활의 발견>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총 14편의 작품으로 뉴욕영화제에 참여했으며, 2013년부터는 매년 빠짐없이 초청되고 있다. 이 두 감독의 영화는 미국의 많은 언론이 영화제 기간동안 봐야 할 작품으로 추천하는 등 호평을 받았고, <버닝>의 상영이 끝난 뒤에는 배우 스티븐 연이 관객과의 질의응답에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놀랍다”, “용감하다”, “엘리트주의답다”, “결코 타협하지 않는 선택을 한다” 등 미국 언론이 뉴욕영화제에 붙인 수식어다. 분명한 건 이 영화제가 오스카 후보작들을 좇는 페스티벌은 아니라는 점이다. 작품성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영화제의 존재가 고맙다. 올해 뉴욕영화제의 상영작 중 일부는 넷플릭스를 통해 국내에서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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