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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나는 달을, 달은 나를
김혜리 2018-10-31

<퍼스트맨>

<퍼스트맨>은 우주탐사 영화로서는 드물게 폐소공포의 감각을 부른다. 1960년대의 달 탐사선 내부는 극히 협소하고, 닐 암스트롱(라이언 고슬링) 가족이 거주하는 공동체는 외부 미국 사회로부터 단절된 캡슐처럼 느껴진다. 무엇보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좁은 숏을 자주 쓴다. 이 영화의 많은 클로즈업에는 배우의 얼굴과 함께 다른 요소가 포함돼 있다. <퍼스트맨>에서 가장 중요한 이미지는 닐 암스트롱의 얼굴- 특히 눈- 과 거기에 비친 반영들이다. 바이저 위에 떨어진 태양빛과 지평선의 반영, 우주의 암흑과 마침내 착륙한 달의 광야까지. 이 영화의 풍경은 닐 암스트롱이라는 고독한 개인의 얼굴과 자주 포개진다. 셔젤 감독은 아폴로 11호가 찍은 영상을 LED 패널에 구현해 라이언 고슬링이 실제로 바라보며 연기하도록 했다.

10/09

<스타 이즈 본>은 운이 상승하는 한 사람과 하강하는 한 사람의 궤적이 교차하는 러브 스토리다. 두개의 선은 한점에서 마주친 후 다시 멀어져가니 예정된 비극이다. 사랑, 중독, 음악, 쇼 비즈니스. 할리우드를 솔깃하게 만드는 요소를 종합한 이 스토리가 같은 제목으로 네번이나 제작된 사실은 놀랍지 않지만, 그것이 성공시키기 쉽다는 뜻은 아니다. 관건은 앞서 나열한 사랑, 중독, 음악 퍼포먼스 등을 업데이트해 동시대 관객을 설득하는 것이다. 주연을 겸한 감독 브래들리 쿠퍼는 이 기본적 시험을 통과한다. 무명 싱어송 라이터 앨리(레이디 가가)와 스타 뮤지션 잭슨(브래들리 쿠퍼)이 처음 사랑에 빠진 밤은, 신데렐라식 로맨스 전형을 벗어나지 않음에도 공감과 매혹을 납득하게 만드는 대화와 에피소드를 갖췄다. 잭슨의 중독과 만인이 파파라치인 시대에 스타덤이 의미하는 바도 브래들리 쿠퍼의 개인적 경험에 기초해 구체적으로 그려졌다. 무엇보다 공연 장면에서 오리지널 송의 완성도와 사운드 연출은, 이 영화가 본격적인 음악영화임을 인식시킨다. 더불어 무대에서 공연자가 듣는 주관적 음향과 무대 뒤 불안과 엑스터시도 생생히 구현됐다.

그러나 전반부의 모범적인 균형은 영화가 반환점을 돌면서 흐트러진다. 둘의 결혼 후 앨리가 팝 스타로 변모해가자 잠시 치유의 기미를 보였던 잭슨의 중독은 악화된다. 잭슨은 약물과 알코올의 영향으로 제대로 공연하지 못하고, 대형 기획사가 조율한 앨리의 음악은 개성이 떨어지니, 음악영화로서의 매력은 자연 반감된다. 이야기도 기운다. 서사의 전환점이 앨리의 음악적 정체성 변화임에도 불구하고, 애초 심지 굳은 인물로 그려졌던 앨리 본인의 생각은 모호하게 그려진다. 스크린 밖 현재 레이디 가가의 공적 아이덴티티가 영화 후반 앨리처럼 인위적 페르소나를 끊임없이 발명하는 팝 스타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아쉽다(영화 크레딧에 레이디 가가는 본명이 아니라 예명을 그대로 썼다). 대신 영화는 잭슨의 절망과 자학으로 초점을 옮긴다. 결말이 정해진 고전의 리메이크로서 불가피한 결함이라고 보기엔, 과정의 플롯이 약간 조야하다. 예컨대 잭슨의 중독은 복합적 원인의 결과임에도, 영화는 변신한 앨리의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리허설을 잭슨이 술을 마시는 계기로 명시한다. 그래미 시상식에서 잭슨이 벌이는 해프닝도 너무 극단적이고, 잭슨에게 “당신이 앨리의 걸림돌”이라고 통고하는 매니저의 악의적 행동은 노골적이다 못해 결과가 타살에 가까워 보일 지경이다. 결국 영화가 끝났을 때, 관객은 특별한 하나의 사랑을 반추하기보다 후반부 내내 예고된 평범한 최루성 멜로의 결말을 확인한다. 관객이 방금 전에 본 행복한 시간들을 재차 몽타주하며 울려퍼지는 앨리의 마지막 노래는, 잭슨의 불행한 선택을 위대한 연인의 영웅적 희생으로 기릴 뿐이다.

10/22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전작 3편과 달리 뮤지컬도 뮤지션 영화도 아닌 <퍼스트맨>은 음악도 적은 데다 인물마저 과묵해 상대적으로 조용하다. 막판에는 우주의 무음과 고요의 바다까지 나온다. 아니, 사실 조용하지만은 않다. <퍼스트맨>에는 굉음과 소음이 밀어닥쳤다가 물러가길 반복한다. 모하비 사막에서 닐 암스트롱이 착륙을 훈련하는 도입부부터 영화는 귀청이 떨어지게 요동친다. <위플래쉬>(2014)에서 음악 연주의 피땀 어린 육체성을 묘사했던 셔젤 감독은 이번에는 우주비행에 대해 유사한 작업을 한다. 1960년대의 우주선은 조종석 바로 뒤에 폭탄이 붙어 있는 쇳덩어리에 가깝다. SF영화에서 보아온 희고 매끄러운 표면은 찾아볼 수 없고 나사와 볼트로 조립된 보일러 같은 공간이다. 농담 아니고, 손봐야 할 작은 문제가 발견되자 나사 직원은 스위스 군대 나이프를 찾는다. 비행사들이 밀어넣어지는 조종실은 오븐이나 형 집행실처럼 보인다. 영화 속 이륙의 감각은 오늘날 우리가 비행기에서 경험하거나 영화를 통해 상상한 우주비행 상황과 딴판이다. 상하좌우 회전 훈련 장치에서 세탁기 속 빨래처럼 휘둘려진 암스트롱과 동료들은 앞섶을 토사물로 더럽힌 채. 로켓 추진 물리학 수업을 듣는다. <퍼스트맨>의 우주비행은 척추가 울리고 위장이 뒤집히는 경험이다.

데이미언 셔젤은 <위플래쉬>, <라라랜드>(2016)에 이어 <퍼스트맨>에서도 직업적 목표를 위해 희생을 감내하는 남성주인공을 이야기한다. 강철 같은 프로페셔널이라는 점은 마찬가지지만 닐 암스트롱은 셔젤 전작의 음악인 주인공들처럼 목표에 소리내어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실제로 닐 암스트롱은 언론을 멀리했고, 달 착륙 일성에 대해서도 “사다리 한칸 내려딛을 뿐인데 뭐라고 해야 하는가?”라고 난색을 표했다고 전해진다. 나사 채용 면접 장면에서 우주탐험의 의의를 묻자 암스트롱은 “다른 위치에서 바라보면 관점이 달라질 것이고, 오래전에 봤어야 했으나 못 봤던 것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답을 한다. 그렇다면 그가 다른 시점에서 바라보고 싶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퍼스트맨>이 짐작하는 유력한 한 가지는 두살배기 딸 캐런의 죽음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감독과 작가는 닐 암스트롱을 단일한 트라우마로 움직이는 병리적 캐릭터로 해석하진 않는다. 어린 딸 외에도 우주 개발 계획의 참여자로서 암스트롱은 여러 동료의 순직과 희생을 경험했다. <퍼스트맨>에서 죽음은 간결하고 단호하게 묘사되고 우주비행사의 가족들은 언제 비보가 날아올지 모르는 불안 속에 살아간다. 말하자면 전쟁영화의 기운이 감돈다. “이럴 가치가 있냐고 묻긴 좀 늦었지 않나요?” 상사에게 반문하는 암스트롱의 마인드는 군인의 그것에 가깝다. 영화가 공개된 후 “암스트롱은 스스로를 아메리칸 히어로로 여기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라이언 고슬링의 인터뷰는 미국 보수인사들의 맹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퍼스트맨>은 히어로는 고사하고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을 성공이나 승리의 맥락으로도 찍지 않는다. 그저 ‘완수’의 감흥이 있다. 닐 암스트롱은 빼어나게 유능하고 애국적인 영웅이어서 ‘퍼스트맨’이 된 것이 아니라 숱한 죽음을 목도하고 살아남았기에, 그 의미를 끝내 찾고자 했기에 ‘퍼스트맨’이 됐다고 영화는 말한다.

<아워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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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이야기

인간의 육체성은 타 예술과 차별화되는 영화의 성립요건이다. 그러나 매력적인 몸과 액션의 전시가 주류 영화의 셀링 포인트인 반면, 몸 자체를 주제로 삼는 영화는 적다. 토론토국제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아워바디>는, 몸에 대한 무관심과 강박적 관리가 나란히 억압이 되는 사회에서 30대 초반 여성 자영(최희서)이 체험하는 각성을 따라간다. 방치와 강박적 통제는 반대말처럼 보이지만 몸을 다른 목표를 위한 도구로 여긴 결과이긴 마찬가지다. 행정고시를 준비하며 몸을 방치한 자영은 탈진한 어느 날 자신 있게 달리는 현주(안지혜)의 모습에 매료된다. 복수 소유격을 제목에 넣은 <아워바디>는 만남 초반 현주의 얼굴을 명확히 잡지 않아, 자영의 얼굴을 투사하게 만든다. 마치 숨죽였다 깨어난 또 다른 자아처럼. 현주를 향한 자영의 동경은 결국 (자기도취 아닌) 진정한 자기애로 향하는 첫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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