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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가 당연한 시대, 국내 감독들은 왜 흑백으로 영화를 제작했을까?

<풀잎들>

홍상수 감독의 <풀잎들>이 10월25일 개봉했다. <풀잎들>은 지난 2월 베를린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후 뉴욕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등 여러 영화제에 초청받은 작품이다. 어느 작은 커피집에서 주인공 아름(김민희)이 여러 인물들의 대화를 기록하는 이야기를 그렸으며, 대게의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그렇듯 정적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주고 있다.

<풀잎들>은 홍상수 감독의 네 번째 흑백영화다. 아직 개봉일이 정해지지 않은 <강변호텔>까지 하면, 홍상수 감독은 무려 다섯 편의 흑백영화를 찍었다. 1949년, 한국 최초의 컬러영화인 홍성기 감독의 <여성일기> 이후 차차 컬러로 바뀐 한국영화들. 지금은 컬러가 당연한 시대가 됐다. 그러나 홍상수 감독을 포함, 일부러 흑백을 선택한 국내 감독들이 있다. 그들은 왜 흑백으로 영화를 제작했을까.

<오! 수정>

감독: 홍상수 / 출연: 이은주, 정보석, 문성근 / 개봉 2000년

<오! 수정>

<오! 수정>은 홍상수 감독의 세 번째 영화이자 첫 번째 흑백영화다. 홍상수 감독이 처음으로 흑백을 시도한 가장 큰 이유는 ‘취향’ 때문. 그는 영화평론가 데이비드 보드웰과의 <오! 수정> 관령 인터뷰에서 “(흑백으로 촬영한 이유는) 무엇보다 내가 흑백 시절의 고전영화들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꼭 한 번은 흑백을 찍고 싶었고, 촬영 시간대인 겨울과 흑백이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취향이라니, 매 영화마다 자신만의 색을 보여주는 지극히 홍상수 감독다운 이유다.

또한 그는 “더 단순한 자극체(흑백)에서 작은 디테일 간의 비교가 좀 더 쉽게 이루어졌으면 했다”고 말했다. 실제 영화는 같은 상황을 수정(이은주), 재훈(정보석) 두 사람의 다른 기억으로 두 번 보여준다. 같은 상황이지만 그들의 사소한 행동, 대화들은 미묘하게 달라져있다. <오! 수정>은 사랑을 중심 소재로 한 홍상수 감독의 첫 번째 영화기도 하다. 그는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선을 컬러가 주는 다양한 색감이 방해하지 않기를 바랐다.

홍상수 감독의 두 번째 흑백영화 <북촌방향>의 탄생 과정은 조금 다르다. <북촌방향> 관련 인터뷰에서 홍상수 감독은 “편집이 끝날 즘 흑백으로 돌려보니 컬러보다 좋았다. 눈 내리는 서울의 느낌과 작은 것들이 반복되는 디테일이 흑백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배경, 디테일이라는 이유는 <오! 수정>과 유사하다. 그러나 <오! 수정>은 처음부터 흑백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제작한 반면, <북촌방향>은 그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즉흥성이 흑백영화를 탄생시킨 경우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감독: 류승완 / 출연: 박성빈, 류승범, 배중식, 김수현 / 개봉 2000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류승완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네 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영화는 마지막 4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흑백으로 제작했다. 류승완 감독은 ‘잔혹성’을 그 이유로 들었다. 네 개의 단편 모두 액션 신은 빈번히 등장하지만, 특히 마지막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조직폭력배들의 선혈이 낭자한 결투를 그리고 있다. 류승완 감독은 이에 대해 “집단 패싸움과 칼부림 장면이 컬러로 찍으면 붉은색의 피바다로 보일 것을 걱정했다. 주인공의 눈이 빠지고 동생이 비참하게 죽는 처절한 이야기를 흑백으로 처리해야 제대로 분위기를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속 가장 유명한 장면은 펑펑 내리는 눈 속, 상환(류승범)이 무릎을 꿇으며 죽어가는 장면이다. 피범벅이 된 그의 위로 내리는 새하얀 눈은 흑백의 화면 속에서 더욱 돋보인다. 그런데, 여기에는 반전이 있다. <아라한 장풍대작전>, <주먹이 운다> 등으로 이미 스타 감독이 된 그는 2008년 <MBC> 예능프로그램 <황금어장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제작에 얽힌 비화를 이야기했다.

그는 “촬영 실수로 인해 승범이가 쓰러지는 장면을 재촬영하는데, 때마침 눈이 내리더라. 아무리 독립영화라도 날씨는 맞춰야 된다 생각했지만 부족한 제작비로 인해 그냥 촬영을 강행했다. 그런데 완성본을 보니 의도치 않았던 서정성이 생겼다. 마치 영화 <친구>에서 장동건이 비를 맞고 쓰러지는 장면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인터뷰에서는 하얀 눈밭에 쓰러지는 피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 그것을 순화시키기 위해 흑백으로 처리했다 거짓말했다”고 밝혀 웃음을 자아냈다. 상환의 죽음 신은 부족한 제작비와 우연이 만든 산물인 것.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

감독: 오멸 / 출연: 이경준, 홍상표, 문석범, 양정원, 박순동, 성민철 / 개봉 2012년

<지슬 - 끝나지 않는 세월2>

오멸 감독의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이하 <지슬>)은 제주 4.3 사건(1948년 제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한 남로당과 미 군정, 국군 등의 무력 투쟁 사이에서 수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학살당한 사건)을 그리고 있다. <지슬>은 영문도 모르는 채 피난길에 오른 제주민들을 통해 제주의 아픈 역사를 담담히 풀어냈다. 제목의 ‘지슬’은 피난민들의 양식이었던 감자를 일컫는 제주 사투리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장면을 흑백으로 담아낸 <지슬>. 오멸 감독은 ‘슬픔’을 위해 흑백을 택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는 아름다운 색을 지닌 곳으로 기억하지만, 화려함의 이면에는 4.3 사건과 같은 아픔이 있다. 그 아픔을 얘기하는데 색을 빼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고 전했다. 4.3 사건에 대한 그의 진중한 시선이 보이는 대목이다. 또한 한국화를 전공한 그는 “수묵의 다채로움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오멸 감독의 바람대로 <지슬>은 한국영화 최초로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넷팩상, 시민평론가상 등 4관왕을 휩쓸며 4.3 사건의 슬픔을 알리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동주>

감독: 이준익 / 출연: 강하늘, 박정민, 김인우, 최희서 / 개봉 2015년

<동주>

최근 흑백영화 중 가장 화제가 된 것은 1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이준익 감독의 <동주>가 아닐까. 영화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한국문학사에서 빠질 수 없는 시인, 윤동주의 삶을 그렸다. 이준익 감독은 <동주>를 흑백으로 제작한 것에 대해 두 가지 이유를 말했다. 그 첫 번째는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흑백 사진 속 윤동주 시인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싶었기 때문. 사실적으로 윤동주의 삶을 그리고 싶었던 이준익 감독은 “흑백 사진으로만 봐오던 윤동주, 송몽규의 모습을 최대한 담백하고 정중하게 표현하기 위해 흑백 화면을 선택했다"고 전했다.

두 번째는 제작비에 대한 문제다. 컬러영화는 흑백영화에 비해 후반 색보정 작업 등 더 많은 기술력을 필요로 한다. <동주>는 컬러로 촬영을 진행한 뒤, 흑백으로 영상을 출력한 영화지만 제작 단계부터 흑백을 염두에 두고 촬영을 진행했다. 만약 그대로 컬러 영화로 제작됐다면 인물, 나무, 쇠 등의 질감을 살리기 위해 더 많은 제작비가 들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이준익 감독은 “일제시대를 재현할 때 드는 막대한 비용을 윤동주 선생님께 부담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준익 감독의 의도 외에도, <동주>는 흑백이 가지는 아름다움이 돋보인 영화기도 하다. 감옥 속에서 최후를 맞이하며 ‘서시’를 읊는 윤동주(강하늘). 그가 사라진 빈방, 쇠창살 사이로 비친 까만 밤 속 반짝이는 별의 모습은 영화의 명장면으로 남아있다.

<춘몽>

감독: 장률 / 출연: 한예리, 양익준, 박정범, 윤종빈 / 개봉 2016년

<춘몽>

‘실화’가 흑백으로 영화를 제작하는 계기가 됐던 <지슬>, <동주>. <춘몽>의 장률 감독은 이와 반대 격 이유로 흑백을 선택했다. 그가 흑백으로 영화를 제작한 이유는 ‘꿈속’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서다. <춘몽>은 제목 그대로 ‘봄날의 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영화다. 장률 감독은 <춘몽>의 흑백 촬영에 대해 “꿈을 생각했을 때 컬러가 선명하게 있었던가 싶다. 나는 꿈을 꿔도 컬러가 별로 생각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춘몽>은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예리(한예리)와 그녀를 좋아하는 세 남자의 하루하루를 그렸다. 영화에서는 이야기가 꿈인지 아닌지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갑자기 사라져 있는 인물들, 흑백에서 서서히 컬러로 바뀌는 신 등 <춘몽>은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를 넘나드는 장면이 빈번히 등장했다. <똥파리>의 양익준, <용서받지 못한 자>의 윤종빈, <무산일기>의 박정범. 감독과 주연을 겸했던 이들의 영화 속 캐릭터를 고스란히 가져온 캐스팅도 마치 장률 감독의 꿈속을 보는 듯했다.

<춘몽>의 기자회견, “이 영화는 누구의 꿈인가”라는 질문에 장률 감독은 “제가 누구의 꿈이라고 말하면 그쪽으로 쏠리게 되잖아요. 누구의 꿈이라 해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또한 “꿈이 아닐 수도 있느냐”는 물음에는 “사는 것이 꿈이 아닌가. 현실 같지가 않잖아요”라는 애매한 답변을 내놓기도 했다.

늘 ‘장소’를 영화의 중요 소재로 담고 있는 장률 감독답게 흑백을 선택한 데는 영화의 배경지도 한몫했다. 장률 감독은 “(영화의 배경지였던) 수색역에서 2~3년간 살았던 적이 있는데, 수색역을 떠올리면 도무지 컬러가 떠오르지 않더라. 하루만 자나도 컬러가 아닌 흑백으로 그곳이 그려졌다”고 말했다. 또한 “흑백 질감의 공간에 사는 인물들에게도 언젠가는 연두색의 봄이 오지 않겠냐는 생각을 담았다”고 영화 속 이야기의 의미를 담아 설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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