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승부
김혜리 2018-11-07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실제 엔딩은 따로 있지만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영화적 클라이맥스는 레이첼(콘스탄스 우)과 엘레노어(양자경)의 마작 게임이다. 전날 엘레노어의 아들 닉(헨리 골딩)으로부터 청혼을 받은 레이첼은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엘레노어를 게임 룸으로 청한다. 관객은 청혼의 결과를 모른다. 엘레노어와 레이첼은 각각 동쪽과 서쪽에 앉고, 닉의 프러포즈에 대해 말을 주고받으며 동시에 손으로 안무하듯 마작의 수를 던진다. 마작은 화려한 손 움직임과 육면체의 패가 부딪혀 나오는 시청각과 촉각적 자극으로 영화에 자주 등장하지만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이 시퀀스는 각별히 효과적이다. 레이첼은 포커에서 카드를 노출하듯 패를 보이고 엘레노어가 그 기회를 잡는 순간 타일을 뒤집어 게임 전체가 처음부터 자기 손 안에 있었음을 드러낸다. 당신의 승리는 내가 허락한 것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이 클라이맥스는 경제학 교수인 레이첼이 게임 이론을 강의하는 영화의 첫 장면과도 정확히 호응한다.

10/23

데이미언 셔젤 감독은 <퍼스트맨>에서 슈퍼 16mm, 슈퍼 35mm, 아이맥스 65mm의 세 가지 포맷을 사용했다. 외적으로는 우주로 향하지만 내적으로는 개인의 내면으로 수렴하는 영화 <퍼스트맨>에는 미국 항공우주국 못지않게 닐 암스트롱(라이언 고슬링)의 가족이 사는 집이 주요 공간으로 등장하는데 16mm 촬영 덕분에 아련한 1960년대 홈무비를 보고 있는 기분에 휩싸이게 된다. 그러나 가장 야심만만한 포맷의 한수는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는 순간이다. 닐이 월면에 발을 딛는 동시에 지금까지 우리가 지켜보아온 세계의 장막이 찢기듯 아이맥스의 광활하고 쨍한 시야가 왈칵 밀려든다. 누구의 지문도 묻지 않은 신세계의 풍경은 모서리 하나하나가 눈이 시리다. 이미지의 밀물과 동시에 음향은 빨려나간다. 거대한 적막은 어떤 이명보다 세차게 귀를 울린다. 닐의 어항 같은 헬멧은 볼록거울이 되어 그를 에워싼 낯선 세계를 비쳐낸다. 달 착륙 이전까지 <퍼스트맨>은 닐의 익스트림 클로즈업에 풍경의 반영을 결합한 숏을 지속적으로 구사한다. 그런데 마침내 숱한 죽음과 감정적 자폐를 건너온 한 남자의 감흥이 집약된 모멘트는 정작 닐의 얼굴을 뺀 세상을 담은 숏으로 연출한다. 집요하게 관객의 시선을 붙들어온 라이언 고슬링의 얼굴이 사라질 때 인물과 관객은 동시에 초월적인 해방감을 맛본다. 편집의 방식도 바뀐다. 닐의 모습, 달의 풍경, 잃어버린 딸의 이미지가 접속사 없이 컷과 컷으로 연쇄된다. 숏이 설명 없이 충돌할 때 관객은 숏과 숏 사이의 간극에 스스로를 밀어넣고 의미를 찾는다.

10/25

로맨틱 코미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조이럭 클럽>(1993) 이후 처음으로 아시아계 배우가 주요 배역을 모두 연기한 할리우드 스튜디오 영화라고 하는데, 많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극장 전석을 예매해 친구들을 초대하는 현상이 그동안의 갈증을 방증한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프롤로그는, 런던 특급 호텔에서 문전박대당한 중국계 가족이 즉석에서 호텔을 인수해버리는 에피소드인데 이 말 저 말 할 것 없이 경제력으로 존중을 얻어낸다는 점이, 실제 관객 캠페인과 닮은 데가 있어 재미있다. 소수자를 재현한 할리우드 서사로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차별성은, 백인 미국인과 아시아계 미국인의 차이가 아니라 아시아에 사는 아시아인과 미국에서 나고 자란 아시아인의 차이에 집중한다는 데에 있다. 지금까지 ‘아시안’이라는 균질한 한 덩어리로 재현되던 인구 집단이, 어디서 태어나고 어떻게 교육받고 생활했느냐에 따라 엄연히 정체성이 다르다는 사실을 정면에 내세운 영화에 통쾌한 공감을 표하는 현상은 당연해 보인다.

이민자 홀어머니의 딸로 젊은 나이에 뉴욕대 교수가 된 레이첼은, 싱가포르에 가서 대면할 남자친구 닉의 가족이 자신을 싫어할 이유가 없다고 확신하지만 어머니는 딸에게 경고한다. “겉보기는 같아도, 네 머리와 가슴은 그들과 다르단다.” 게다가 닉의 집은 공교롭게도 중국 디아스포라 전체에서 손꼽히는 재벌 영 가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영 가문이 중국의 자본주의화로 등장한 신흥 부자가 아니라 유서 깊은 올드 머니의 대명사라는 사실이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상상을 초월한 부유층 소비문화를 볼거리로 제공하는 한편, 레이첼의 친구 펙 린(아콰피나)의 집과 영 저택의 소비 행태를 시각적으로 대비시킨다. 역사가 짧은 부를 지닌 펙 린의 가족은 베르사유 궁전, 트럼프 저택을 본뜬 실내장식이 빼곡한 디즈니랜드 같은 집에 사는 반면, 영 저택은 중국 전통 예술과 가족사의 전시장이다. 닉의 어머니 엘레노어가 레이첼을 거부하는 중요한 이유도 경제적 계급 차보다 문화적 차이다. 개인의 성취를 삶의 제 1 목표로 삼는 여성은 보다 오래 지속되는 가치- 자식의 양육과 가족 전통의 보존- 에 희생하기 불가능하다는 믿음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신념은, 엘레노어 본인이 변호사의 길을 포기하고 가족에 헌신한 세월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굳어진 것이라 강고하다.

일반적으로 로맨틱 코미디의 마지막 1/3은 예측 가능해서 재미가 덜한 장인데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전개보다 결말의 해법이 신선한 희귀사례다. 존 추 감독 등이 각색한 시나리오의 초점은 사랑의 성패보다 레이첼과 엘레노어의 승부에 있다(남자주인공 닉의 역할은 스토리 전개에서 딱할 만큼 부수적이다). 다시 말해, 엘레노어가 ‘2등 중국인’으로 낮추어 본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레이첼이 어떻게 긍정하고 삶의 주도권을 행사하느냐가 관건이다. 레이첼은 시어머니가 될 엘레노어의 마음에 들려고 애쓰는 대신 엘레노어가 틀렸음을 입증하는 길을 택한다. 가족을 떠나 당신을 택하겠다는 닉의 마지막 제안을 받아든 레이첼은 엘레노어에게 마작 게임 룸에서의 최종 면담을 청한다. 대사의 의미가 게임의 판세로 직역되는 이 자리에서 레이첼은 다음을 명확히 한다. 나는 개인주의자일지 몰라도 당신의 아들을 깊이 사랑해서 청혼을 거절한다. 당신의 반대가 이별의 이유가 되면 평생 그가 어머니를 미워하며 불행할 테니까. 다만 먼 훗날 마음에 드는 며느리와 손자에 둘러싸여 흡족한 밤, 당신의 행복은 다름 아닌 홀어머니가 키운 근본 없는 미국 이민자 여자애가 허락한 것임을 기억하라. 말을 마친 레이첼은 한쪽에서 기다리던 어머니- 독신모가 된 우여곡절을 영 가문에서 꼬투리잡은- 와 합류해 방을 나선다. 엘레노어는 일찍이 희생과 가족의 가치를 모른다고 확신했던 ‘미국인’ 레이첼이 바로 눈앞에서 사랑을 위해 희생하고 가족을 지키는 모습을 목도하는 셈이다. 메시지는 제대로 배달된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특정한 가치관이 옳다고 판정하기보다 선택의 가능성을 낙관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레이첼은 로맨틱 코미디의 여주인공이지만 설령 닉이 비행기까지 따라오지 않았다고 해도 충분히 행복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 영 집안에는 허영꾼부터 기품 있는 교양인까지 다양한 캐릭터가 있다. 미친 듯이 돈 많은 집안에 태어났다고 비슷한 인간이 되도록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고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다. 조금 엉뚱한 예지만, 펙 린은 부잣집 딸이고 레이첼에게 훌륭한 파티 의상을 골라줄 수 있을 만한 안목도 갖췄지만 평소에는 파자마 바람으로 편하게 생활하기를 택한다(물론 명품 파자마다).

<할로윈>

좋아요

외할머니 댁

2018년판 <할로윈>은 어느 형무소 관계자가 무려 핼러윈 당일에 마이클 마이어스를 이감하겠다는 경솔한 아이디어를 내는 바람에 시작된다. 40년 전의 희생자이자 생존자인 로리(제이미 리 커티스)에게도 기다린 날이 온다. 마이클이 살아 있는 한 편히 잠들 수 없는 로리는, <터미네이터2>(1991)의 사라 코너처럼 대비해왔다. <할로윈>의 쾌감은 ‘할머니 대 연쇄살인마’라는 구도에서 나온다. 사라 코너보다 훨씬 나이 든 로리는 육체적 훈련도 훈련이지만 ‘보급’에 공을 들였다. 숲속에 자리한 로리의 집은 딸 캐런(주디 그리어)과 사위, 손녀 앨리슨(앤디 마티책)을 마지막 위기에서 보호하는 요새이기도 하다. 오래된 집은 지하 벙커를 품고 있으며 실제로 100분의 1도 쓰지 못하는 무기고를 갖췄다. 압권은 집 전체를 덫으로 바꾸는 모종의 건축적 트릭들이다. <할로윈>이 본래 아이를 베이비시터에게 맡기는 가정에 대한 공격이기도 했다는 점을 떠올리면, “폭력에는 폭력. 내 가족은 내가 지킨다”라는 동시대 미국 사회의 보수적 메시지의 발현 같기도 하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