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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드 목탄, 미누를 기리며
심보선(시인)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 2018-11-07

2009년 10월 15일, 내가 미누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다. 사무실 앞에서 연행당한 그는 화성외국인보호소에 갇혔다. 말이 보호소지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수감복을 입고 면회실의 아크릴 창 너머에서 친구들을 맞았다.

1992년 한국에 들어와 18년 동안 머물면서 그는 한국인과 이주민의 공존을 위해 노력했다. 밴드 ‘스탑크랙다운’의 리더였던 그는 한국말로 이주민의 권리를 노래했다. 그와 나는 정부가 주최하는 다문화주의 세미나에 참여하기도 했다. 한국을 비판한 건 나였고 한국에 고마워한 건 그였다.

보호소 면회실에서 그가 말했다. “나의 18년 한국 삶은 처절했다. 네팔의 가족들과 18년 동안 떨어져 있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은 가보지도 못했다. 남북이산가족을 제외하고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이런 삶을 살았겠는가. 만약 나의 18년 한국 삶이 가차 없이 부정된다면 나는 불효자로 네팔에 돌아가 아버지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의 말에 모두가 울었다.

그러나 그는 네팔에 돌아가 역시 미누답게 살았다. 그는 한국에서 부정당한 삶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그는 네팔에서 사회운동가로 활동했고, 공정무역 사업을 통해 한국과 교류했다. 2015년 4월 네팔에서 지진이 났을 때, 나는 그의 안부가 걱정돼 연락을 시도했고 어렵사리 전화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지만 자신은 안전하다고, 전화해줘서 고맙다고 그가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보면 나와 미누는 언제나 위기 속에서 만났다. 감호소의 면회, 네팔의 지진뿐만이 아니었다. 우리가 함께 탁구를 치고, 다문화주의 세미나와 축제에 참여하고, 밥을 먹고 술잔을 기울일 때에도 그의 처지는 안전하지 못했다. 나보다 더 밝고 활달했지만 그의 삶은 언제나 쫓기는 상태였다. 정부는 그의 존재를 “불법”으로 규정했고 결국 그를 추방했다.

한국 정부는 최근까지도 그를 불법이라 보았다. 미누는 2017년 서울 핸드메이드 국제박람회에 네팔 대표로 한국에 초청되었다. 그러나 그는 인천공항에서 입국을 거부당했다. 이 과정을 담은 영화 <안녕, 미누>가 얼마 전 DMZ국제다큐영화제에 개막작으로 선정됐고 그는 이번에는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는 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았고 포토월에서 관객에게 손을 흔들었다. 드디어 그는 대한민국에 의해 “합법”으로 인정된 것이다.

짧은 한국 방문 동안 미누와 나는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네팔로 돌아가고 얼마 후 그가 심장마비로 명을 달리했다는 것이다. 충격과 슬픔 속에서 나는 미누를 떠올렸다. 감옥에 갇힌 미누의 슬픈 얼굴, 흔들리는 땅 위에서 흔들리지 않는 그의 목소리, 위기 속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미누의 모습, 약하고 강한 모습, 그외 온갖 다른 모습들을.

그의 삶은 너무 짧았다. 활동가로, 음악가로, 노동자로 네팔과 한국을 오가면서 법의 제약을 받았지만 법 너머의 세상을 꿈꾸면서 그 모든 존재들을 살면서 미누의 몸은 소진돼버렸는지도 모른다. 여러 삶을 동시에, 최대치로 산 미누, 미노드 목탄, 나는 당신을, 당신의 수많은 모습들로 인해,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오늘은 당신이 노래하는 모습, 빨간 목장갑을 끼고 불끈 쥔 주먹을 허공으로 내뻗는 그 모습이면 족하다. 그렇다. 어떤 사람도 존재 자체로 불법이 될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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