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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아시아인만이 감지할 수 있는 어떤 재미에 대해서

아시아 멜로드라마 장르의 게임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2018)을 같이 본 동행은 “싱가포르 사람들도 과연 영화 속 사람들처럼 ‘교포화장’을 할까?”라고 물었다. 나 역시 갑자기 궁금해졌다.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은 실제 싱가포르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가까울까? 영화가 그리는 1% 중 1% 사람들의 패션과 메이크업은 일반적인 싱가포르 사람들과 얼마나 다를까? 분명 이 영화의 싱가포르는 할리우드화된 버전 같긴 한데, 인터넷 검색 몇분 만으로 답을 알았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아마 나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그렇듯 한국인의 틀에서 싱가포르를, 아시아를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한국은 어떻게 봐도 무언가의 보편적인 표준이 될 수 있는 나라는 아니다. 다들 자주 까먹지만.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국내 흥행 성적과 관심도는 그렇게 높은 편이 아니다. 이는 예상되었던 일이다. 백인들이 주인공인 할리우드영화는 어딜 가도 대부분 비슷하게 감상된다. 주인공이 흑인이라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우린 미국과 할리우드의 이야기에 익숙해져 있고 이들 문화와 역사를 세계적인 보편의 틀 안에서 받아들인다. 하지만 주인공이 동양인일 경우 사정은 조금 까다로워진다. <서치>(2017)나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에서처럼 주인공이 미국 사회에 거의 동화된 인물이라면, 그냥 할리우드영화로 보면서 그런 작품에 출연하는 동료 동양 배우를 자랑스러워하겠지만, 싱가포르에 사는 중국계 사람들이 등장인물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면, 그리고 전세계 영화계에서 뽑아온 것이나 다름없는 다국적 캐스팅의 배우들이 그들을 연기한다면 그 영화는 아주 까다로운 모양을 취하게 된다. 관객이 어디에 서서 자신을 어떻게 정체화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영화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느 작품도 완벽하지 않다.

화려하고 부유한 주류 아시아인들

일단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교포영화이다. 싱가포르에서 태어난 코스모폴리탄 작가가 쓴 영어 소설을 할리우드에서 각색한 작품이고 미국계 중국인이 주인공이다. 그리고 아시아 교포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도 어색할 수밖에 없다. 이들 세계를 이루는 다양한 세대와 문화 속 사람들을 정확히 그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 어느 쪽 사람들도 문화 전체를 볼 수 있을 만큼 시야가 넓지 못하다. 어쩔 수 없이 손실을 감수하고 위치를 정해야 하는데,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그 위치를 겉은 노랗지만 속은 흰 바나나에 비교되는, 미국 문화에 거의 동화된 이민 2세 중국인 주인공에 맞춘다.

당연히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 감동적인 작품이 된다. 만만치 않은 인구 비율을 차지하면서도 정작 미디어로부터는 투명인간처럼 소외되어 왔던 그들이 당당하고 화려한 주인공이 되어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아시아인으로서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는다. 영화 속 아시아인들은 당연히 주류이며 화려하고 부유하고 엄청난 권력의 소유자들이다. 영화를 본 어떤 아시아 관객이 영화 속 싱가포르를 <블랙팬서>(2018)의 와칸다 왕국에 비교했다고 하니 그들의 감상이 어땠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번 핼러윈 때 사람들이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캐릭터들로 분장하고 거리로 나온 것도 이해가 된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의 주인공 라라 진으로 분장한 사람들이 더 인상적이었지만 그건 다른 이야기이고.

하지만 싱가포르가 동양의 와칸다라고? 이건 너무 이상한 비유이다. 와칸다는 우리가 아는 아프리카 역사에서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허구의 공간이다. 비브라늄만큼이나 철저한 판타지인 것이다. 하지만 싱가포르는 당연히 현실 세계의 공간이며 영화가 그린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역시 현실 세계에 존재한다. 그리고 아시아인들이 당연한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이들이 그 안에서 만만치 않은 양의 문화상품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대륙에 사는 우리와 같은 관객에게 이들 ‘교포들’의 반응은 이해가 되면서도 여전히 이상한 호들갑처럼 보인다. 아시아인들만 나오는 멜로드라마는 우리에게 당연한 일상이 아니던가.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처럼 할리우드 자본을 등에 업은 화려함은 갖추지 못했지만.

아시아 관객은 당연히 동지애로 넓게 뭉친 교포들보다 까다롭게 영화를 본다. 일단 한국이나 다른 아시아 국가의 관객에게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은 그렇게 쉽게 ‘우리’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문화에 속한 다른 사람들이다. 싱가포르에 사는 비중국계 국민들은 자신의 존재가 은근슬쩍 사라졌다고 느낄 것이다. 이 영화에 비중국계 싱가포르 사람들이 몇이나 나왔던가? 저택 앞을 지키고 있던 고용인 두명은 기억난다. 밴드에 몇명 더 있었을지도 모르고. 그리고 다양한 나라에서 온 다양한 혈통의 아시아 배우들은 그렇게까지 자연스럽게 같은 국가의 사람들처럼 어울리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당연시 여긴다. 아시아인들만이 나오는 영화는 대단한 이벤트의 의미가 없다. 아, 그리고 앞에서 말했던 교포화장. 우린 싱가포르 1%의 메이크업에 대해 아는 게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미국 사람들의 이국 취향과 취미에 의해 재창조되었다는 사실까지 무시할 수는 없다.

힘을 거머쥔 멜로드라마의 여자주인공

그러니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 재미없는 영화라고 할 수는 없다. 단지 다른식으로 재미있을 뿐이다. 아마 대부분의 ‘교포들’과 미국인들은 이 영화 속 아시아 멜로드라마를 큰 붓으로 거칠게 그린 큰 그림으로 볼 것이다. 하지만 아시아 멜로드라마와 그 관습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는 그 자잘한 교포식 터치가 더 상세하게 보인다. 영화가 그리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재료와 전개방식, 디테일, 태도는 전혀 다르며, 그 차이는 오로지 아시아 문화권에 익숙한 사람들만이 감지할 수 있는 재미와 연결된다.

이 재미의 상당 부분은 주인공 레이첼이 일반적인 아시아 멜로드라마 장르의 게임을 가볍게 무시하고 있는 데에서 나온다. 다시 말해 레이첼은 진짜 ‘교포’이다. 아시아 멜로드라마 속 교포들은 늘 조금씩 이상하게 행동하지 않던가(자국인이 본 양물 먹은 동포들의 초상이 얼마나 이상하게 이지러질 수 있는지 보려면 역시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보면 된다). 레이첼은 안 그런다. 그리고 레이첼의 양물, 그러니까 서구성은 뉴욕대 최연소 경제학과 교수라는 만만치 않은 경력을 가졌으며 언제든지 자신의 우선순위를 통제할 수 있는 독립적인 여성이라는 위치에서 표출된다. 레이첼의 이야기에는 일반적인 아시아 멜로드라마의 불쾌한 서스펜스가 없다. 남자와 로맨스를 언제든 무심하게 우선순위에서 떨어낼 수 있는 여자는 이 장르에서 무시 못할 힘을 가진다. 많은 미국인들은 이를 현대적인 서구 문명의 우위를 보여주는 것으로 읽을 것이다. 하지만 아시아 멜로드라마의 시청자들 상당수는 레이첼을 서구 문화의 상징보다는 지금까지 이 장르가 여자주인공에게 주기를 꺼려했던 힘을 자연스럽게 거머쥔 여자로 볼 것이다. 그 힘이 어느 문화권에서 나왔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힘이 있다는 것 자체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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