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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에 핀 감성의 꽃
2001-03-21

빔 벤더스,나와 70년대 시네필을 지배하는 이름

빔 벤더스는 나에게 ‘영화 체험의 감성적 동반자’로서 먼저 떠오른다. 이것은 문화적으로 황폐한 시기였던 70년대에 외국 문화원 시사실에서

영화를 보며 성장한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공통되는 감정일 것으로 생각한다. 록음악으로 대표되는 미국문화에 대한 양가적 감정, 16mm 카메라를

통한 개인영화의 가능성, 사회학적 텍스트로서의 영화의 의미 등을 당시에 어렴풋이 깨우쳐가기 시작했는데 늘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 벤더스가

아니었나 한다. 지금은 퍽 소박하게 들리는 이슈들이지만, 비디오의 존재를 몰랐고 서점에서 영화서적이라곤 두세권밖에 볼 수 없었던 당시로서는

대단한 문제들이었다. 물론 이 모든 이슈들은 뒤에 고다르의 영화들을 공부하면서 더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연구서를 읽으면서 거리를

두고 사고하기 이전에, 함께 체험하고 성장한다는 어떤 동료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를 ‘감성적 동반자’로 부르고 싶은 것이다.

더욱이 벤더스는 그 당시 내가 알던 외국감독 가운데 이 땅을 찾아온, 그래서 가까이서 직접 볼 수 있었던 최초의 영화감독이기도 했다. 비틀스가

60년대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필리핀만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아내곤 안타까워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벤더스의 영화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1학년 때 교양과목으로 들은 사회학개론 시간에서였다. 독일에서 공부를 했던 담당교수는 <페널티킥을 맞은

골키퍼의 불안>이라는 긴 제목의 영화를 수업시간에 상영한 뒤 강의를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때 나는 사회학적 의미들보다 일종의 히치콕적

긴장을 더 즐겨보았을 것이다. 페터 한트케의 이름과 함께 빔 벤더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던 같은 해에 그는 일본어 자막을 단 <미국인 친구>라는

신작 필름을 가지고 서울을 방문했다. 벤더스는 아직 <파리, 텍사스> 이후만큼 세계적 거장으로 대접받지 못하던 때였지만 문화적으로 헐벗고

굶주리던 당시의 영화청년들은 경복궁 근처에서 있었던 그와의 대화에 감격스러워했다.

벤더스는 이렇게 갑자기 가까워졌다. 그래서 이후 헤어초크, 파스빈더 등과 함께 독일문화원에서 그의 영화가 상영되면 빠뜨리지 않고 보았다.

16mm로 촬영해 35mm로 블로업한 <도시의 알리스>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먼곳의 일로 생각되던 상황에서 ‘나도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일깨워준 영화였다. 강한섭, 전양준, 정성일 등 주위의 친구들도 모두 이 영화를 좋아했던 것 같다. 이상하게 <도시의 알리스>는 이때 이후

아직 다시 보질 못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내게 도심을 나는 도시 전철 등의 파편적 이미지들이 엉켜져 있고, 다양한 공간들이 자유롭게 뒤섞인

상태로 기억된다. 아마도 이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당시의 특수 체험이 그 원형적 형태로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기회가 되면 다시 보고

싶은 영화 중 하나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당시에 참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다. 지금 이 영화는 독일분단에 대한 강박증 대신 벤더스의

시네필적 감수성의 측면이 더 기억에 남는다.

비슷한 시기에 벤더스가 팝음악에 가진 애정을 알게 되면서 다시 한번 동료의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그의 장편데뷔작이 ‘킹크스에게 바친다’는

부제를 가진 <도시의 여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곤 꽤 흥분했다. 70년대 말과 80년대 초는 학교들마다 데모가 잦았고, 그런 가운데 국수주의

정서가 강화되던 시기였다. 게시판에 붙은 ‘양키 밥 딜런은 듣지 말자’라는 구호에서도 보였듯, 미국문화를 좋아하는 것은 부끄러워해야 할

것으로 간주되던 때였다. 이를테면 낮에는 학교에서 미국을 비판하고 밤에는 방 안에서 브루스 스프링스틴을 들으며 고민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때에 벤더스가 유명한 팝음악 제목을 자신의 데뷔작 제목으로 삼았다는 작은 사실에 짜릿해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는

러빙 스푼풀의 히트곡 제목이다).

요즘 벤더스의 작품들을 돌아볼 때 흥미로운 것은 그의 영화 노정에서 보이는 여성이란 존재의 의미변화 양상이다. 종종 지적되듯이 초창기 벤더스

영화에는 여성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모두 남성으로 이루어진 집단이고, <도시의 알리스>에서처럼 여성이 나온다 해도 소녀 정도이다. <파리,

텍사스> 시점에서 드디어 여성이 중요성을 획득하지만 아직도 남자는 그녀를 특수 유리창을 통해서 본다. 마침내 <베를린 천사의 시>에 와서야

여성이 영화의 중심으로 나오는 것이다. 어느 정도 나이 들면서 주위를 돌아보니 시네필들의 여성에 대한 심리변화도 벤더스 영화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같아 미소를 짓게 한다.

한상준/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