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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철 편집장] 옛날 영화잡지를 보다가
주성철 2019-04-19

“제2의 창간을 선언하면서, <로드쇼>는 영화잡지의 대중성 확보에 노력을 기울이려고 합니다. 일부 전문가들, 혹은 마니아들의 취향보다는 보통 사람들을 위한 영화잡지를 만들겠습니다. 아직은 몇 사람만이 즐기는 컬트무비를 먼저 다루기에 앞서 흔히 명작이라고 불리는 영화들을 소개하고 깊이 있게 분석하는 지면을 늘리겠습니다. 또한 아직은 완성된 작품을 뚜렷하게 보여주지 못하면서 이름만 무성한 ‘포스터 모더니즘’에 대한 논의도 잠시 보류하겠습니다. <로드쇼>는 자폐적 증상으로 충만한 영상에는 결코 현혹되지 않을 것이며, ‘남의 떡으로 제사 지내려는’ 이즘(主義)에 매달리지 않겠습니다. <로드쇼>는 오늘 제2의 창간을 선언하면서 ‘즐길 수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즐길 수 없다’는 명언을 가슴에 새깁니다. 1992년 11월 <로드쇼> 편집부.”

거의 30년 전, 정성일 편집장이 월간 영화잡지 <로드쇼>를 그만둔 다음 외부 편집장이 부임해온 호에 실렸던 글 중 일부다. 몇몇 단어들만 봐도 ‘그 시대엔 그랬구나’ 싶을 만큼 고색창연한 글이며, 정확히는 전 편집장을 ‘디스’하는 글이다. 아무튼 ‘작가주의’를 얘기하는 것 같은 ‘주의’와 ‘자폐적 증상으로 충만한 영상’을 좋아했던 나는 그때부터 구독을 그만두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재밌는 영화잡지였다고 생각하는 <로드쇼>는 구회영이라는 필명을 썼던 김홍준 감독의 ‘도씨에’로 대표되는 전문적인 글과, 한국영화와 홍콩영화 현장을 직접 누비며 인터뷰했던 생생한 기사로 큰 인기를 끌었다. 영화잡지라는 갈래를 떠나 대중성과 전문성 양쪽 모두 만족스러웠던 드문 잡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글에서 “청소년 독자들이 좋아하는 기사나 화보를 전문적인 독자들이 즐겨 읽을 리 없고, 또 전문가 수준의 독자들이 만족하는 기사는 청소년 독자들이 잘 이해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갈등과 고민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오랜 고심 끝에 <로드쇼>는 깊이 파기 위해서 우선 넓게 파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라는 이상한 말과 함께 오랜 팬들을 떠나보냈다.

‘무슨 저따위 글이 있나’ 싶으면서도 ‘그래도 나름 고민이 많았겠지’ 싶기도 하고, 하여간 당시 정성일 전 편집장의 기분은 어땠을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올해 <씨네21>이 창간 24주년을 맞이하고, 개인적으로는 언제 이 일을 시작했는지 세어보기도 싫을 만큼 긴 시간을 보내고 보니 온갖 상념에 젖어든다. 기획과 섭외, 취재와 마감으로 이어지는(이제는 간혹 ‘소송’도 포함된다) 빠듯한 일정 속에 극도의 피로를 호소하는 기자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든다. 한편으로, 그동안 회사 안팎에서 온갖 이상한 인간들을 다 만나봤지만 요즘처럼 심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넘치던 자신감은 자괴감으로 바뀌고, 사방에 적들뿐이라는 생각에 극도의 우울감이 엄습하며 그렇게 괜히 새벽에 옛날 <로드쇼>를 뒤적여보았다. 이렇게 끄적여봐야 무슨 도움이 되겠냐만, 아무튼 힘이 필요한 기획취재, 편집팀을 대표하여 인피니티 스톤을 모으는 타노스의 마음으로 쓰게 된 넋두리를 딱 한번만 용서해주시길.

PS. <씨네21> 주식회사 역사상 최초로 장영엽 기자가 여성 노조위원장으로 부임하여 5기 집행부가 출범했다. 쓰고 보니 이 또한 독자들과는 무관한 내용일 수 있지만, <씨네21>에도 노조가 있다는 말을 그렇게 해보았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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